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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물꽃 Nov 24. 2023

트라우마_40

할머니가 되면 스포츠댄스 강사를 할거야

친구들이 근황을 먼저 정리하고 가자면 김씨는 미국에서 일을 하다 만난 남자친구와 결혼을 해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다. 우리가 26살일 때 결혼했으니 벌써 5년 정도가 되어간다. 동네친구였던 이씨는 재작년 교회에서 만난 남자친구와 결혼해 동네를 떠났다. (김씨와 엄씨는 무교, 나는 불교에 가깝다.) 엄씨는 워낙 독립적인 친구라 동네를 떠나 혼자 산지는 오래됐고 바쁘게 일하며 지낸다.


아직 전남친을 만나던 시기에 친구들을 만난 적이 있다. 사실은 연애하고 처음 친구를 만나는 거였지만 여행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이별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날은 이씨의 초대를 받아 처음으로 집들이를 가는 날이었다. 빈손으로 갈 수는 없다보니 엄씨와 둘이서 먼저 만나 꽃을 사가기로 했다. 고속터미널에서 꽃을 구경하고 화병도 구경하고 고터 상가 한복판에 앉아 꽃을 다듬었다.


전남친하고의 일을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이 없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친구가 나한테 전남친하고의 일을 말하면서 헤어질까 물어본다면 당장 헤어지라고 말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보다 사실은 너무 부끄러웠다. 겨우 하게 된 첫 연애에서 이런 사람을 만났다는 게, 내가 이런 대우를 받으면서 사귀고 있다는 게 스스로도 미련함을 알아서 고민마저도 혼자서만 끙끙 앓았다.


엄씨에게도 말하는 게 쉽진 않았지만 그래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선 나보다 연애를 많이 해봤고, 어떻게 보면 생각이 나랑 비슷하기도 해서 마냥 닫혀있지 않기 때문이다. 속으로만 꽁꽁 숨겨뒀던 이야기를 이 친구에게 처음 털어놨다. 엄씨는 나를 비난하거나 당장 헤어지라며 뜯어말리지 않았다. 그냥 전남친같은 그런 사람들이 더러 있더라며 내 이야기를 그냥 들어줬다. 내가 바랬던 것처럼 너무 정답에 가까운 답변이 아니라 좋았다. 


그러고 친구들을 다시 만난 게 남자친구랑 헤어진 다음이었다. 끝의 끝까지 정리한 다음이라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전남친하고 끝을 내고도 내심 든든하기도 했던 건 조만간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 거고, 그때 상처받았던 마음들을 모두 위로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만큼 이 친구들은 존재만으로도 내게 힘이 된다. 더욱이 미국에서 살던 김씨가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와 네 명이서 다 같이 볼 수 있다는 게 기뻤다. 


엄씨는 그날 직장 동료의 결혼식이 있어 조금 늦을 수도 있다고 했다. 먼저 만난 김씨와 이씨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우린 만나면 시덥잖은 이야기부터 철학적인 이야기까지 별의별 대화를 다 한다. 그날도 처음엔 우리가 한창 과몰입했던 환승연애 2 이야기로 시작했다. 최종화를 얼마 남기지 않은 상황이라 어떻게 흘러갈 건지 우리 나름대로 진지하게 추측했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고 앉아서는 각자의 근황을 이야기하다 내가 전남친이랑 헤어진 이야기를 털어놓게 됐다. 현타가 와서 헤어짐을 결심했던 일, 안되겠다 싶어 이별을 통보했던 일, 시간이 지나고 다시 연락이 와서 한번 더 마무리하게 됐던 일들까지 모두 말했다. 


헤어짐을 결심했던 일, 헤어지고서 다시 연락이 와서 한번 더 이별하게 됐던 이야기. 마무리된 이야기를 털어놓는데 말하면서 더 실감이 나서 그런지 감정이 올라왔다. 처음엔 덤덤하게 이야기했는데 마지막에 다시 만났던 이야기를 할 때는 그때의 감정이 올라왔다. 그때처럼 아프다기보단 그때 느꼈던 슬픈 감정이 생각나서 눈물이 났는데 앞을 보니 이야기를 듣던 이씨의 눈이 그렁그렁했다. 그 모습을 보는데 또 울컥해서 눈물이 터졌다.


이씨는 내가 원래 내 이야기도 잘 안 하고 혼자 견디고 넘어가는 걸 알다보니 이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혼자서 힘들어했을 거 같아 눈물이 났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너무 고마워서 속으로는 정말 더 크게 울었다. 내가 굳이 나라는 사람을 설명하지 않아도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정말 든든했고 크 위로가 됐다. 어느 순간부터 주변 사람에게서 공감이 막혀버려 혼자서만 끙끙 앓던 내가 겨우 숨이 트인 순간이었다.


엄씨가 도착하고는 본격적으로 파티가 시작됐다. 이씨가 미국에 살다 오랜만에 들어온 만큼 이 친구가 먹고 싶었던 음식 리스트대로 음식을 준비했다. 오랜만에 넷이서 인생 네 컷 사진도 찍었다. 우리는 여전히 정해진 포즈 없이 뚝딱거렸고 컷이 넘어갈 때마다 우당탕탕 정신이 없었다. 16살 때나 29살이나 여전하다는 사실이 나를 안심시켰다.


한참을 먹고 떠들다 자정이 넘어 하나둘씩 자기 시작했다. 워낙 이 당시에 불면증이 심할 때였는데 특히 집이 아닌 곳에서는 더 잠을 못 잤어서 밤을 꼴딱 새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하지만 마음이 편해서 그런지 좀 뒤척이긴 했어도 분명히 잠이 들었다. 옆에서 친구가 조용히 환승연애를 보는 소리에 잠에서 깼지만 잠에서 깼다는 예민함보단 우리가 같이 있다는 편안함이 먼저 느껴졌다. 


체크아웃 시간이 다가오고 김씨는 가족 행사에 참여해야해서 먼저 떠났다. 엄씨와 이씨, 나는 이대로 헤어지는 게 아쉬워서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전날 하루종일 떠들었는데도 아직 대화가 부족했다. 그때도 정말 정해진 주제 없이 막 떠들어댔는데 어쩌다보니 기억에 남는 대화가 있었다. 모두 우리의 관계에 관한 내용이었다


하나는 김씨에 대한 걱정으로 시작된 말이었다. 김씨는 26살 우리 중에선 가장 어린 나이에 결혼했고, 실제로 내 주변에서는 제일 먼저 결혼한 친구였다. 결혼도 결혼인데 아무 연고도 없는 미국에 넘어가 살다보니 혼자서 괜찮은지, 별일 없는지 그런 게 많이 걱정이 됐다. 내 나름대로는 이유가 있는게 이 친구도 정말 자기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아서 이 친구가 아주 오랫동안 힘들어했던 일을 거의 10년이 지난 후에야 들을 수 있었다. 그런 점이 나랑 비슷하기도 해서 정말 괜찮은지 자꾸 물어보고 싶으면서도 부담스러울까봐 섣불리 물어보지 못하기도 했다.


김씨를 걱정한다는 이야기를 친구들과 나눴다. 누구 하나 다를 거 없이 그 마음이 같았다. 이씨도 엄씨도 모두 김씨가 잘 살고 있는지, 무슨 고민은 없는지 걱정하고 있었고 모두 꺼내놓고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때 시간이 쌓인 덕분인지 우리가 연결되어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끈끈함이 든든했다. 그리고 김씨에게도 이 마음을 꼭 전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마음을 안다면 외로움을 덜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하나는 미래에 관한 이야기였다. 내가 한예종을 준비하겠다는 말을 꺼냈다. 사실 29살에 대학을 다시 들어가는 일이니 괜찮겠어?라는 말을 할 법도 한데 친구들은 그냥 나를 응원했다. 새로운 일이라 재밌을 거 같다고도 말했다. 친구들이 더 진지해져서는 지금의 선택이 어떤 장점들을 가지고 있는지 오히려 내게 설명해보기도 했다. 그 모습이 귀엽고 고마웠다. 내 결정을 심각한 고민이 아니라 즐거운 도전으로 풀어갈 수 있어서 좋았다. 다른 누군가에게서 깎여버린 자존감이 이 친구들 덕에 다시 채워질 수 있다는 게 행복했다.


이에 덧붙여 엄씨는 자신의 꿈에 대해서도 말했다. 대단한 포부라기보다 일상에 녹아있을 만한 꿈이었다. 자신이 할머니가 되면 스포츠댄스 강사가 되어보고 싶다며 60대가 기다려진다고 했다. (이 친구는 아직 스포츠댄스의 스텝조차 밟아보지 못했다. 다만 흥은 넘치는 친구이다.) 엄씨가 그 말을 했을 때 참 엄씨 답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말이 뭔가 멋있었다. 나이드는 게 기대된다는 말이야말로 자신을 믿었을 때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닐까. 


사실 난 언제부턴가 미래를 그려본 적이 없었다. 우울증을 가장 심하게 앓았을 때, 다시 움직일 수 있었던 건 그때의 나를 죽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언제든 삶을 포기할 수 있다고 마음먹었다. 어느 순간에도 끝낼 수 있으니 지금은 일단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은 모두 해보자며 몸을 일으켰다. 동력이 되긴 했어도 그 생각은 늘 불안하고 우울한 나를 함께 데리고 다니게 만들었다. 주변에서 미래 이야기를 해도 내 머릿속에서는 그려지는 게 없었다. 밖으로 꺼내지 못해도 속으로는 ‘과연 내가 그때까지 살아있을까.’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말로 엄씨가 60대가 됐을 때 스포츠 댄스 강사를 하겠다는 그 말에서 미래를 그려보게 됐다. 우리가 함께 하는 모습이었다. 뭐 대단한 모습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넷이서 똑같이 나이가 들어서 좀 더 편해진 모습으로 지금처럼 별 것 아닌 대화들을 이어나가는 거라면 그 나름대로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친구들은 이런 변화까지 알 수 없었겠지만 어쩌면 그건 내가 더 길게 살아가도록 만들어준 원동력이 됐다. 


할머니가 돼서 스포츠댄스 강사를 하겠다는 것, 때론 별 거 아닌 말에서 엄청난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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