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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물꽃 Nov 27. 2023

요가_03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월요일과 금요일, 1시간 30분 동안 요가를 한다. 처음 등록하고는 몸이 안좋으면 몇 번 빠지기도 했지만 요새는 컨디션이 안좋을수록 꼭 요가를 하러 간다. 몸이 찌뿌둥하고 마음이 좀 가라앉은 날에 몸을 움직이고 나면 훨씬 가벼워진다. 


나는 뭔가를 할 때 완벽하게 해내려는 욕심이 크다. 근데 그게 내 수준을 넘어가는 정도여도 무조건적으로 해내려는 강박 같은 거라 운동과 연관될 때는 나쁘게 작용할 때가 많았다. 


어릴 땐 살을 빼고 운동하려고 할 때마다 집어드는 게 줄넘기였다. 줄이 달린 줄넘기로 하자니 날씨나 공간에 대한 제약이 많아서 줄이 없는 줄넘기로 집에서 운동하곤 했다. 하루에 천 번을 하자는 혼자만의 원칙을 지켜두곤 뛰기 시작하는데 몸이 안좋은 게 딱 느껴졌다. 정말로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이 들면 그만둬야 하는 게 맞는 건데도 나는 고집스럽게 그 원칙을 지켰다.


천 번을 끝내고 줄넘기를 내려놓을 때 정말로 하늘이 도는 걸 느꼈다. 눈앞이 하얘지는 걸 가까스로 버티고서 침대에 누웠다. 잠깐 진정이 된 사이 토할 거 같은 기분이 들어 화장실로 달려갔을 때 얼굴이 핏기 없이 창백하게 질린 걸 발견했다. 이러다 정말로 잘못되는 건 아닌가 겁이 나기 시작했을 때 생리가 터졌다. 생리를 앞둔 몸으로 줄넘기를 천번이나 뛰었으니 몸상태가 더 악화되는 건 당연했다.


이런 행태는 멈추지 않고 계속 됐다. 아마도 얼마 전의 포스팅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겠지만 근력 운동의 경우에도 비슷했다. 나는 주로 맨몸운동을 하는데 플랭크나 스쿼트 같은 동작들을 할 때 꼭 몸을 혹사시켰다. 특히 최근까지 배우던 춤 수업에서는 스트레칭 시간이 있었는데 몸상태가 어떤지 관계없이 선생님이 정한 시간을 무조건 버텨야했다.


30초라고는 했지만 입으로 세는 30초라, 더욱이 최대한 천천히 세는 바람에 정확히 얼마의 시간이 지나는 지도 알 수 없었다. 춤을 배우는 게 좋아서 듣기 시작한 수업이었지만 스트레칭 시간을 떠올리면 벌써 겁이 나기도 했다. 몸상태가 정말 안좋은 날에는 선생님께 미리 양해를 구하기도 했지만 매번 그럴 수 없었다. 또, 배려가 통하는 수업이었다기보다 선생님이 정한 원칙에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방식이라 동작이 무너지면 내가 꼭 잘못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도 힘든데 다 참고 있는 거라는 그런 이야기를 듣는 걸 원하지도 않거니와 나와의 싸움에서 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으로 깡으로 버티겠다는 오기로 시간을 견뎠다. 허리가 끊어지고 팔이 터질 거 같아도 절대 주저앉지 않았다. 팔이 저리고 힘줄이 끊어지는 것처럼 찌릿찌릿한 느낌이 들었을 때 조금 현타가 왔다. 내가 뭘 위해 버티고 있었더라? 나를 위한 운동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몸이 안좋은 날에 요가를 더 가려고 했다는 건 선생님 덕분이었다. 나는 원래도 엄청나게 뻣뻣한 사람이라 사실 요가와 잘 어울리는 유형의 인간은 아닌 거 같다. 사실 지금의 선생님과 수업하기 전에는 요가를 할 때에도 무리하게 욕심을 낸 적이 많았다. 할 수 있는 이상으로 몸을 버티면서 운동을 하고 더 아픈 적도 많았고 그 아픈 몸을 이끌고 다시 운동을 하면서 며칠 누워있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선생님은 운동하는 내내 항상 나를 지켜봤다. 동작이 잘못되면 그냥 넘어가지 않고 당장이라도 달려와 자세를 고쳐 주셨다. 그리고 늘 하는 말씀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세요.”였다. 몸도 마음도 안좋은 날에 계속 요가를 가게 만든 건 선생님이 해주신 그 말 덕분이었다.


모두가 허리를 접어 바닥과 닿을 기세가 되어있을 때 혼자서 우뚝 서있는 모습은 왠지 창피했다. 나 혼자서만 뒤떨어진 거 같아 조급했다. 안되는 몸으로 억지로 접어 스스로에게 고통을 줄 때도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라며 내가 나에게 주지 못한 아량을 선생님이 베풀었다. 처음에 부끄러웠던 그 모습은 점차 익숙해졌고 지금의 나를 받아들이게 했다. 남들이 얼마나 유연하든지 간에 지금의 내 상태와 내 몸에 집중하게 됐다. 


사실 돌아보면 항상 나는 한계를 넘어서는 정도로 나를 혹사시켰다. 내가 한창 대학생일 때 유행했던 존버라는 단어는 20대 전반에 녹아있다. 학교에서 시급으로 따지면 300원 정도를 받으며 열정페이로 일했을 때에도, 드라마 제작사로 들어간 회사에서 갑작스레 식당일을 시킬 때에도, 발가락이 부러진 채로 몇 주간 몸을 쓰며 일했던 바로 작년의 일까지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는 게 존나게 버티는 것보다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보면 그 일들도 나를 위한 일을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의 아량을 이제는 내가 내 삶 전반에 적용시키려는 중이다. 사람하고의 관계에서도,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에서도 딱 내가 할 수 있는 정도로만 유지해나가고 있다. 마음 같아선 모두를 품어줄 수 있는 아량도 가졌음 좋겠고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하루에 4000자씩 꼬박꼬박 써내는 성실한 소설가가 되고 싶지만 지금의 나는 그렇지 못하다. 지금은 내가 계속해나갈 수 있는 정도로만 하는 수밖에 없다. 그게 정말 나를 위한 일이니까.


조금 있으면 또 오늘의 요가 수업을 하러 나간다. 오늘도 사실 몸상태가 썩 좋진 않지만 큰 걱정은 없다. 자세가 비뚤어져 어딘가 통증이 느껴지면 선생님께 방법을 물어보면 되고, 동작을 하다가 너무 힘들면 지금 상태에 맞는 정도로만 무리하지 않을 예정이다. 컨디션이 안좋을수록 더 요가를 찾게 되는 건 이제 정말 이 운동이 나를 위한 행위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인 거 같다. 인생도 그런 거 아닐까. 정말로 나를 위한 삶이어야지 계속 살고 싶어지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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