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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물꽃 Dec 08. 2023

트라우마_41

상처를 먹고 자란 아이

단편영화 시나리오를 쓸 때 나는 주로 내 이야기를 했다. 대부분이 유년시절이나 사춘기에 머물러있었고 이상한 점은 아빠가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글을 쓸 때부터 애초에 아빠라는 역할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아마도 그건 아빠하고의 관계가 반영된 거라 생각한다.


24살에 처음으로 심리상담을 받았던 건 엄마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엄마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끝의 끝까지 파고들어 엄마라는 사람을 이해하고 싶었다. 물론 그 밑바탕에는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표면적으로는 엄마와 잘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컸다. 그때 아빠하고의 관계까지는 다루지 않았다. 문제라는 걸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이렇다 할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상담 중에 나열된 그림들을 보면서 떠오르는 생각을 말하는 날이 있었다. 여러 그림들에 나를 투영해서 이야기를 했지만 단 하나의 그림에선 내가 보이지 않았다. 어떤 여자와 남자가 한 공간에 있는 그림이었는데 난 그 그림을 보면서 여자가 남자를 계속 기다리고 있는 거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건 마치 엄마가 아빠를 늘 기다리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석했다. 선생님은 모든 그림에 분명히 내가 있을 거라고 말했다. 


내가 보고 있던 여자가 나라는 걸 깨달았을 때, 아빠를 기다린 건 엄마가 아닌 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정말로 놀랐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나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 떠오른 감정은 슬픔이었다. 스스로 알아차리지도 못할 정도로 아빠를 바라고 기다렸다는 걸 알게 되니 그동안의 내가 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을 제외하고 아빠와 함께 했던 기억은 없었다. 늘 아빠의 자리는 공백이었다. 사춘기 시절을 지내면서 아빠의 사업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는데 아빠하고의 소통은 점점 줄어들었다. 어딘가 위축되고 우울해보이던 아빠를 보면서 나와 닮아있다고 느꼈다. 아마도 아빠한테 우리가 짐이라서 세상을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빠의 처진 모습을 볼 때 나는 존재자체로 죄책감을 느꼈다.


늘 그런 불안함과 우울함을 끌어안고 살았다. 엄마와 아빠의 싸움은 끊이질 않았는데 한편으론 아빠가 집에서 점점 말을 잃는 게 이해가 갔다. 나였어도 엄마와 함께 지냈다면 엄마를 밀어냈을 거라 생각했다. 엄마가 내게 아빠 욕을 쏟아낼 때 엄마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어 그 모든 감정을 받아냈지만 아빠를 마냥 미워하지도 못한 건, 아빠를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엄마를 점점 멀리하면서부터는 내심 원망스럽기도 했다. 무심한 아빠와 내가 점점 닮아가는 거 같아서 지독한 자기혐오를 겪었다. 나는 내가 너무 싫었다.


아빠는 저장강박증이 있었다. 우리 집엔 아빠가 모아둔 수많은 짐이 쓰레기처럼 쌓여있었다. 엄마는 늘 정리하라며 싸움을 걸었고 아빠는 알아서 한다며 회피했다. 그런 모습은 내게도 물들어있었다. 버리지 못하는 많은 물건들이 있었다. 그중 많은 것들이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오기 전 살았던 집에서 갖고 있던 물건들이었다. 9살에 이곳으로 이사 왔으니 대부분이 어린 시절 물품들이었다.


쓰레기라고 말하는 건 정말로 그 물건은 가치 있거나 대단한 물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를 소개하자면 그건 아빠가 9살 때쯤 화이트데이라며 선물로 줬던 사탕 바구니였다. 제대로 된 바구니도 아니고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포장 용기에 불과했다. 어릴 때 학용품을 담아두기도 했지만 이미 20년이 지난 지금에는 정말로 썩지 않은 쓰레기였다. 하지만 그걸 버릴 수가 없었다. 그건 내가 아빠한테 사랑받았다는 증거물이었다. 그걸 버리고 나면 사랑받았다는 기억도 모두 잃어버릴까봐 무서웠다. 아무리 방정리를 해도 매번 남겨뒀다. 


아빠는 나를 자주 아프게 했다. 교환학생을 떠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때 이전보다 우울증을 더 심하게 앓았던 건 아빠의 영향도 컸다. 교환학생 생활을 하며 가족들과 떨어져 있던 6개월 동안 나는 정말 오랜만에 나다움을 느꼈었다. 거실에서 자고 있는 엄마를 보고 엄마아빠 싸움을 애써 모른 척하며 느꼈던 죄책감도 그곳엔 없었다. 가족과 따로 사는 동안 그래도 조금은 단단해진 거 같았고 돌아가서 내가 잘하면 다 괜찮아질 거 같았다. 


엄마아빠의 결혼기념일이라 오랜만에 요리를 하고 엄마아빠를 기다렸지만 아빠는 등장하지 않았다. 엄마와 먼저 식사를 하고 한참 후에서야 아빠는 취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어쩔 수 없는 모습으로 자리에 앉아서는 맛있다 거나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몇 입 먹다 말고 방으로 들어갔다. 뭔가를 바라고 요리를 했던 건 아니었어도 이렇게 냉대를 받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아빠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짜증 한번 내지 못했다. 아빠가 나를 그렇게 대하는 게 너무 익숙했다. 


엄마가 잠시 일을 쉬게 돼서 아주 오랜만에 가족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엄마와 언니의 싸움으로 결국은 언니를 두고 엄마아빠나 셋이서만 다녀오게 됐다. 모든 계획을 세우고서 엄마아빠를 데리고 여행 다니는 동안 아빠는 모든 것을 불평했다. 관광지에서 주변 사람에게 옳은 말을 하겠다며 시비를 거는 아빠가 너무 창피했다. 질서를 안 지켰다며 정당한 척했지만 내 눈에 질서를 어기는 건 아빠였다. 


계획을 세울 때엔 마음대로 해도 괜찮다며 참여하지 않던 아빠가 모든 걸음마다 불평을 말해다. 이런 못난 사람이 내 아빠라는 게 너무 창피했다. 오랜만의 여행에서 난 엄마아빠와 어떻게든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다. 아빠의 지적들은 내게 너무 크게 느껴졌다. 


가족이 아니라 클라이언트를 모시듯 불안한 마음으로 시달리던 나는 결국 샤워를 하는 동안 물줄기를 맞으면서 오열을 했다. 그나마도 아빠에겐 들리지 않게 하느라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아빠의 바람을 모두 들어주느라 환전한 돈이 떨어져 비가 내리는 밤, 혼자 돈을 바꾸러 나갈 때도 아빠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내가 다녀오는 게 너무 당연해보였다.


사는 동안의 절반 이상을 엄마에게서 아빠 욕을 들으며 자랐다. 엄마를 불쌍해하는 마음, 아빠를 이해하는 마음, 엄마를 내버려두는 아빠를 미워하는 마음, 나를 함부로 대하는 아빠에게 속상한 마음. 그 모든 감정이 정리 없이 섞여있었고 아빠 하곤 거리를 두고 지냈다. 한 집에 있어도 인사하지 않는 날이 많았다. 굳이 말을 섞고 싶지도 섞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나는 그렇게 아빠를 내 마음에서 포기했다.


아빠의 사업이 다시 좋아지기 시작했을 때 나는 드라마 제작사 입사를 앞두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가족끼리 식사를 하게 됐다. 아빠는 나보고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했다. 언론고시를 그만두고서 도피하듯 선택하게 된 회사였다. 하고 싶은 걸 하는지에 대한 확신도 없었고 내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든 게 불확실했다. 아빠는 좋아하는 게 뭔지 모르는 게 더 슬픈 일이라며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거 같아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 말이 너무 필요했다. 나는 다시 마음을 열었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다지만 난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자식은 부모를 너무 사랑해서 틈만 보이면 다시 사랑해버린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래서 어디까지 참을 수 있는지 모두 몰랐던 거 같다. 그건 많이 슬픈 일이다. 나는 부모가 주는 상처를 먹으면서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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