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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물꽃 Dec 11. 2023

질문_01

사랑해 본 적 있나요? 왜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했나요

고등학교 친구 두 명과 함께하는 프로젝트가 있다. 일명 보이후드 프로젝트라고 3년에 한 번씩 모여 서로에게 질문하고, 그 모습을 영상으로 기록하는 내용이다. 사실 거창해 보이지만 시작한지는 3년전이 처음이라 올해 두번째 모임을 앞두고 있다. 첫번째 모임에서는 사실 처음이다 보니 정해진 규칙도 없어서 다소 정신없이 마무리 됐다. 이번엔 미리 답변을 생각할 수 있게 질문을 두 가지씩 준비하고 서로 준비해오기로 했다.


내가 고른 첫 번째 질문은 사랑에 관한 내용이다. 사랑해 본 적 있는지, 만약 있다면 왜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했는지를 물었다. (사랑에 여러 유형이 있다 보니 나는 연인 간의 사랑으로 제한했다.) 이건 지극히 주관적인 질문이었는데 내가 사랑이란 키워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런 거 같다. 알면 알수록 나는 이상적인 사랑을 꿈꾸고 또, 현실에서 이뤄지는 수많은 로맨틱한 상황들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콘텐츠를 고를 때도 사랑이 없으면 뭔가 좀 아쉽게 느껴진다. (물론 사랑 따위 들어올 틈도 없는 스릴러도 좋아한다.)


연애를 해보기 전에는 당연히 내가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건 사랑하는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처음으로 남자친구를 사귀고 연애하는 동안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는 건가 계속 헷갈렸다. 그러다 끝을 보고서야 확실해졌다. 전남친과 연애는 했어도 그 사람을 사랑하진 않았다. 정이나 연민과 같은 형태의 감정을 느꼈고 누군가는 그걸 사랑이라 할 수 있어도 내겐 사랑이 아니었다.


사랑이라 느낀 건 전남친과 사귀기 전 마음이 있었던 동료였다. 사실은 팀에 합류하고서 제일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었다. 첫인상은 낯가리느라 좀 차갑다고도 생각했지만 막상 이야기 해봤을 땐 그렇지 않았다. 내가 워낙 철벽을 치는 스타일에다 사람들 눈치도 많이 봐서 팀에 들어가고도 마음을 두기 어려웠는데 그 사람은 나보다 한 살 더 많았는데도 편하게 대해줬다.


다 같이 술자리를 하는 시간이 많아서 그런지 더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팀 내 사람들 중에서도 자주 어울리게 됐다. 한 번은 휴차날에 친구를 만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서 그 사람이 카페에 앉아있는 걸 봤다. 원래도 나랑 비슷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호감이 있던 차에 카페에서 책을 읽고 있는 그 모습을 보니 왠지 마음이 설렜다. 정말로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 순간 용기를 내서라도 그 사람에게 인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문에 다가가 똑똑 노크하고선 그 사람에게 인사했다. 눈이 마주치고서 들어가 더 대화를 할 법도 했지만 그만큼의 용기는 없어서 그렇게 인사만 하고서는 바로 숙소로 들어갔다. 들어가는 내내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후 스케쥴을 다니면서도 회식 자리에서 늘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찾게 됐다. 내가 그 사람을 찾으면 그 사람도 나와 눈이 마주쳤다.


포스팅에서 종종 언급했지만 작년 영화팀에서 일할 때 나는 매일을 버텨야 했다. 그러면서도 꼭 지키고 싶었던 모습이 있었다. 지금 내가 사람과 일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는 다짐이었다. 상업 영화팀에서는 워낙 현장이 바쁘게 돌아가고, 직급으로 사람이 구분되는 순간이 많다보니 사람을 함부로 대하기가 쉬워진다. 나는 물들고 싶지 않았다. 할 수 있는 한에서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그리고 도와줄 수 있는 것들은 최대한 도와주며 사람과 일한다는 걸 상대도 느끼게끔 해주고 싶었다.


둘이 있는 순간에 그 사람이 내 노력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자기들이 편하려고 알아도 모르는 척 넘어가는 사람을 많은데 나는 다른 거 같다고 말했다. 도와주겠다는 말을 진짜로 지키는 걸 보고 그게 쉽지 않은데 대단하다며 칭찬해줬다. 내가 노력하고 있었던 부분을 제대로 알아주는 그 모습에 부끄럽기도 했지만 사실은 너무 고마웠다. 겉모습만 보고 대충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던 사람들과 다르게 느껴졌다. 내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오해와 솔직하지 못했던 내 태도로 그 사람과의 관계는 다르게 흘러갔다. 아직은 전남친과 만나고 있던 무렵에 마지막으로 팀 회식이 잡혔다. 오랜만에 그 사람을 만났다. 전남친과는 헤어짐의 과정에 있었고 혼자보다 둘이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정말 비교되는 순간이 있었는데 그때의 기억으로 나는 이게 사랑이 아닐까 알아챌 수 있었다.


그때 그 사람이 회식이 끝나면 혼자 영화를 보러 갈 거라고 말했다. 그 당시 내가 좋아하던 감독 영화가 나왔을 때라 그 영화를 보라며 추천다. 근데 그 질문을 하기 전에 내가 이 사람에게 그 감독 영화 좋아하냐고 물어보면 아마 이 사람이 봤다면서 좋아한다고 말해줄 게 예상이 됐다. 그 사람에게 그 질문을 하니 정말로 내가 예상했던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어떤 말을 할지 내가 알 것 같다는 게 편하고 설렜다. 전남친을 만나면서는 아주 쉬운 질문도 어렵게 흘러가느라 대화가 늘 불안했지만 이 사람하고의 대화는 달랐다. 아주 어려운 감정도 늘 편하게 흘러갔다.


아마도 이런 편안함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는 사람, 내 물음에 어떻게 답할 지 예상이 가는 사람. 전남친은 만나면 만날수록 알 수 없는 사람이었고 그 모습이 너무 불안해서 같이 있으면 편안하지 않았다. 나를 드러내지 않으면 않을수록 조용히 지나가는 날이 많다보니 그 사람과 있을 때 점점 지워졌다. 한 사람이 사라지고 한 사람만 온전해지는 관계는 분명 사랑이 아니다.


이 답변을 인터뷰로 남기고 싶은  다음엔 실수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3년 후에 기록될 영상에선 지금의 깨달음을 토대로 더 나다운 사랑을 하고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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