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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물꽃 Dec 15. 2023

트라우마_42

젊어서 고생은 안 하는 게 낫다

아리아나 그란데의 needy라는 곡을 좋아한다. 가사에 보면 사랑받는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알려달라는 부분이 있는데 이십 대 전반의 내 상황이 그랬다. 늘 사랑을 갈구했다. 제발 단 한 번이라도 넘치게 사랑을 받아서 제발 그만, 이라고 외쳐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평생을 그렇게 부족해할 거 같아서, 이뤄지지 못할 소원인 걸 알아서 더 바랬다.


내가 많은 걸 바랬던 건가? 하고 돌아보면 그렇지 않다. 필요했던 건 힘든 순간 나를 달래주는 한마디였다. 감정을 계속 누르고 살면 내가 어떤 걸 바라는 지조차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그 말을 해줘야만 내가 이걸 늘 바래왔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스스로에게도 그 말을 해주지 못해 서서히 말라간다. 아빠에게 마음을 연 건 내가 어떤 말이 필요한 순간에 그 말을 내게 해줬기 때문이다. 엄마에게선 전혀 받아보지 못했던 응원이었다. 


언론고시를 그만둔 건 드라마 공채가 뜨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송국 채용이 점점 줄어가고 있었지만 그 끝자락에서 난 내 힘으로 필기시험을 합격해 면접을 경험했다. 하지만 하필 그 무렵 코로나가 시작됐다. 가뜩이나 사람을 뽑지 않던 채용시장이 약속이라도 한 듯 얼어버렸다. 언론고시 카페에 들어가도 답이 없었다. 한 걸음만 더 가면 잡을 수 있을 거 같은데 한순간 기회가 모두 사라졌다. 매일같이 써내던 작문도, 드라마 기획안도 피디가 되지 않으면 모두 소용없는 일이었다.


언론고시 준비는 2년이 되어가고 있었고 주변 친구들은 서서히 자리를 잡아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러다 영영 사회에 속하지 못할 거란 불안감이 커졌다. 시험이 있고 불합격되는 상황에선 내가 더 노력하면 되겠다는 동력이라도 남지만 자리가 없으니 혼자서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드라마 제작사를 알아본 건 혹시나 추후에 뜰지 모를 방송국 채용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면접에서 심하게 긴장하는 걸 줄여보자는 생각으로 연습 삼아 경험 해보기로 한 것이다. 진작 제작사를 들어가지 않은 건 들리는 소문이 너무 흉흉했기 때문이다. 열정페이는 기본이고 제대로 된 대우도 받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었다. 


수능에서 아쉬운 성적을 냈던 내게 드라마 피디가 되는 건 나를 증명해내는 일이었다. 사실은 내가 이만큼의 능력이 있는데 수능에선 운이 안 좋았던 거라고, 드라마 피디가 된다면 그 모든 아쉬움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드라마 제작사는 아니었다. 남들에게 보여줄 만한 조건이 아니라면 2년 동안 피땀 흘려 준비한 시간도 모두 사라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검색해도 아무 정보조차 나오지 않는 제작사에서 연락을 받았다. 사실은 면접을 보러가기 전까지도 괜찮을까 걱정을 했다. 면접 장소에 도착했을 때도 이름이나 간판조차 없는 오피스텔인 걸 알고서 혹시나 안 좋은 일을 당할까봐 앞사람이 나오는 걸 확인하고 안심했다. 시간이 되고 안으로 들어갔을 때 대표와 팀장이라는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결말을 미리 이야기하면 두 사람과는 좋지 못한 관계로 끝을 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생각해보면 나는 이들에게 너무 쉬운 사람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보자고 생각했던 면접은 생각보다 간절해졌다. 사실 제작 pd라든지 기획 pd라든지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 기본적인 질문에도 아는 척을 하느라 진땀을 뺐다. 하지만 왜 회사에 들어오고 싶은지, 어떻게 일할 것인지 그 태도를 묻는 말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대답하면서 나도 내 진심을 알았다. 


희망 연봉을 말하라는 현실적인 조건에도 소극적으로 답하던 내가 일을 하고 싶다는 말만 확실하게 어필했다. 나는 그때 정말로 어떻게든 일을 시작하고 싶었다. 드라마 pd가 되기 위한 시험을 준비하는 일로는 내가 채워지지 않았다. 사회에서 제대로 된 내 몫을 해보고 싶었다. 회사에 궁금한 건 없는지 물어보라할 때도 난 최대한 그 사람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했다. 내가 갑이 되고 싶었던 면접에서조차 나는 스스로 을을 자처했다. 누구든 나를 휘두를 수 있게끔 그 주도권을 넘겨줬다.


그렇게 시작한 제작사 일은 순탄하지 않았다. 사실은 일하는 내내 위기가 찾아왔었다. 제작사에는 꼭 나처럼 사회생활을 시작한 어린 친구들이 대부분이었고 우리와 함께 회사가 시작된 거라 상사는 면접 때 만난 팀장 한 명이 전부였다. 매일 같이 야근이 기본이었지만 당연하다시피 야근수당은 없었고 심지어는 수습 기간이 지나면 올려주기로 했던 연봉도 은근슬쩍 대답을 피하며 넘어갔다. 


주말에도 넘어오는 대본을 읽느라 쉴 틈이 없었다. 회사를 갈 시간이 다가오면 속이 얹힌 것처럼 답답했다. 언론고시를 준비할 때보다도 내 상태는 안 좋아졌다. 회사에 가면 대표에게 어떤 말을 들을지 몰라 벌벌 떨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직원들이 욕받이가 될 때면 그 차례가 언제 내게로 돌아올지 몰라 불안했다. 지켜보는 것도 당하는 것도 끔찍했다. 


지금이야 사그라든 존버라는 표현은 인간을 끝까지 착취할 수 있는 끔찍한 단어라고 생각한다. 안될 거 같을 때엔 바로 그만둬야 한다. 만약 나보다 어린 친구가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이런 대우를 받았다면 난 더 몹쓸 꼴을 보기 전에 당장 그만두라 말할 것 같다. (물론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그만두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걸 감당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고생에 익숙해질수록 고생의 굴레를 벗어나는 건 더 어려워진다. 이게 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버티지 못하면 끝이라는 생각에 더 나아지려면 이 정도는 버텨야 한다고 자꾸 고집부리게 된다. 하지만 버티는 것만으론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 제작사의 횡포는 단순히 여기서 끝나지 않았고 점점 심해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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