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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물꽃 Dec 22. 2023

트라우마_43

아닌 거 같을 때 당장 튀어라

집에서 회사까지는 왕복 3시간이 걸렸다. 면접에서부터 괜찮겠냐고 질문했지만 그런 건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집이 멀어서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 남들보다 30분 먼저 출근해 준비했다. 사회에 속해있다는 그 안정감이 좋았다.


드라마 제작사에 들어가고 처음으로 대본을 넘겨받았을 때, 워터마크로 내 이름이 박힌 기획안을 읽을 때 내가 정말 이 세계에 들어왔다는 게 실감 났다. 하루하루 정확히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정해져 있고 순서에 맞게 끝낼 수 있다는 사실도 기뻤다. 하지만 그런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처음엔 대표가 조금 엄격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별 거 아닌 일로 직원들을 소집해 막말을 쏟아낼 때도 어쩌면 정말로 저 일이 중요한 일일지 모른다고 모든 의심을 눌렀다. 그저 순할 뿐인 직원을 타겟으로 삼아 그 사람의 출신 지역과 대학을 들먹이며 놀림감으로 삼을 때 그 분위기를 못 견디겠으면서도 내가 대상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열심히 하려고 했던 초반의 모습은 대표의 마음에도 들어 대표가 자주 데리고 다니는 직원에 속할 수 있었다. 작가들하고의 회의에 따라가 참여하고 이야기가 끝나면 식당에서 밥을 먹고 하는 식이었다. 그 자리가 특별하다기보다 불편하게 느껴진 건 다른 직원들을 향한 온갖 험담을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대충 그렇죠, 하며 반응하면서 나도 언젠가 버려질 수 있겠구나 싶어 무서웠다. 아니면 지금도 어디선가 내 욕을 하고 다닐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회사엔 대표와 팀장, 나를 포함한 신입사원 4명이 전부였다. 일을 몰라도 제대로 물어볼 상사가 없었다. 팀장은 자신이 다이아 수저라 이야기하고 다니던 사람이었는데 나랏일을 한다는 어느 분의 자제였다. 몰래 알아낸 것도 아닌 본인의 입으로 말한 사실이었다. 뉴스로 검색하면 비리를 저질렀다는 내용이 나오는데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다니는 게 좀 신기하기도 했다. 


뭔가 좀 이상하다고 느낀 건 정말로 그 타겟이 점점 내가 되고 있던 상황 때문이었다. 계약서 작성 일을 맡은 적이 있다. 법적인 문제가 걸린 일이라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해도 되나 싶었다. 정해진 틀도 없었고 팀장에게 물어봐도 직접 해보라는 말밖에 들을 수 없었다. 한 번의 실수로도 모욕감을 주는 대표가 무서워 모르는 일이지만 완벽하게 준비해야 할 거 같았다.


작성해보라는 말을 듣고 하루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작가와의 미팅이 있었고 대표는 다른 곳에서 문제가 있었는지 이미 기분이 나빠진 상태로 등장했다. 대표가 왔으니 하던 말을 멈추고 인사를 하는데 나와 다른 팀원에게 너네는 작가랑 한마디도 안 하냐며 대뜸 화를 냈다. 그전까지 한창 대화를 하고 있었던 터라 작가가 대신해서 오해를 풀어줬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대표는 정말로 우리가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화를 풀 상대가 필요했을 뿐이다.


다른 말을 하다 말고 너는 계약서 작성을 맡겨둔 게 언제인데 아직도 안 보내냐며 화를 냈다. 우리끼리 있는 식당도 아니었고 작가님을 포함 다른 손님들까지 있는 고깃집이었다. 기한이 정해져 있던 것도 아니고 일을 맡긴 시간이 오래됐던 것도 아니다. 일이 늦어진 것에 대해 타박하는 정도로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나라는 사람의 자존감을 뒤흔들 정도의 모독을 쏟아냈고 얼굴이 빨개져서 그저 죄송하다고만 말했다.


대학 때부터 이런 모욕감은 익숙했다. 담당교수는 연출을 하려면 강하게 커야 한다며 막말을 쏟아내던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에게 지지 않기 위해 어떤 억울함에도 악으로 깡으로 버텼다. 내성이 쌓인 건지 대표에게도 그런 마음이었다. 보여주자는 마음으로 다음날 바로 계약서 조항을 완성했다. 이게 제대로 된 건지 비교할 자료도 없었지만 대표한테 이대로 꺾이지 않는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정작 상처받았던 나는 돌보지 않았다. 


예쁨 받는 직원의 자리는 결국 오래가지 못했다. 대표는 제작사를 하다 말고 사업을 확장한다며 가게를 오픈했다. 신입사원 네 명은 얼결에 대표의 가게 오픈에 동원됐다. 메뉴판을 작성하는 직원이 있는가 하면, 식당으로 출근하며 가구를 들이고 들어오는 택배를 확인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한동안 나는 작가와의 회의가 있어 그 일에선 배제될 수 있었다. 제발 그 일이 나에게까지 넘어오진 않기를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결국은 모두가 그 식당으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아는 피디나 누군가가 방문하면 주문을 받아 커피를 내려주는 일도 맡았다. 그 사람들이 떠나면 컵을 헹궈 식기세척기에 넣는 것까지 모두 우리 일이었다. 작가와의 회의를 준비하는 것보다, 대본을 읽고 준비하는 일보다 쿠팡으로 필요한 물품을 정리해 주문하는 업무가 더 많았다. 지금 내가 어디에 취직한 건지 현타가 왔다.


신입사원들의 수습기간은 3개월이었다. 3개월 동안 우리는 최저시급을 조금 벗어난 월급을 받았고 분명 3개월 후엔 조금 더 올려주기로 정확히 액수까지 약속하고 계약했었다. 3개월이 지나고 한창 식당일을 돕고 있을 때 대표는 다 같이 있는 자리에서 애매한 말을 했다. 약속했던 3개월이 지나 정규 멤버가 됐다는 이야기를 하고서 사업이 확장되면 더 잘 챙겨주겠다는 말을 했다. 월급을 받고서야 어물쩍 넘어갔던 그 말이 수습 이후 월급을 올려주지 않겠다는 말이었다는 걸 알았다.


그런 와중에 대표는 우리를 불러두고 회사 퇴근 후에 새벽 2시 정도까지 식당에서 알바할 사람을 구했다. 매일 하면 힘들 테니 직원들끼리 날짜를 정해 로테이션을 돌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내가 듣고 있는 게 현실 맞나 싶을 정도로 어이가 없었다. 말려주길 바랬던 팀장은 옆에서 달력에 체크하며 각자 나올 수 있는 횟수를 계산하고 있었다. 그 순간 팀장에 신뢰도 모두 깨졌다. 그 사람들이 정말로 우스워 보였다.


면접에 합격하고 드라마 현직 피디까지 불러 함께했던 회식 자리에서 한 피디는 내게 이 회사에 왜 들어왔는지 물었다. 일을 하고 싶다는 당장의 이유가 있긴 했지만 대표가 했던 말에 마음이 끌렸기 때문이었다. 대표는 내게 남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드라마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대표의 약속은 지켜진 것이 없었다. 난 이 회사를 다니고 있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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