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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물꽃 Dec 25. 2023

감기_01

크리스마스의 악몽

오랜만에 반가운 화이트 크리스마스..이지만 사실 내 상태는 그렇지 못하다. 지독한 감기에 걸렸다. 사실 원인은 분명하다. 아빠 때문이다. 가족 식사를 한 다음날 아빠가 기침을 심하게 했다. 감기 기운이 있다는 거 같다는 말에 지금 저 정도로 심하다면 분명 어제도 몸이 안 좋았을 텐데 왜 같이 식사를 한 거지? 싶긴 했다. 하지만 정말로 아팠던 걸 모를 수도 있으니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아빠는 전염병이란 걸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부엌이면 부엌, 거실이면 거실에서 터져 나오는 대로 기침을 했다. 손으로 막는다거나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것도 아니었다. 그 상태로 술약속에 나가기까지 했다.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나갔는데 저 방에서 온갖 바이러스들이 나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솔직한 마음으론 아빠한테 감기에 옮을 게 걱정되니 좀 조심해달라 말하고 싶었지만 우선은 아빠가 지금 아픈 상황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고, 두 번째는 아빠가 잘 삐지는 사람이라 괜히 신경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일단 이 이야기는 아빠가 나은 다음에 하자고 생각하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했다. 아빠가 나간 사이 방문을 닫아놓고 집안을 환기시켜 그나마 남아있을 바이러스를 내보냈다.


사실 그렇게 해놓고서도 불안한 마음이 컸다. 가뜩이나 연말에 친구들하고의 약속이 몰려있어서 혹시라도 감기에 옮아서 만나지 못한다면 아빠한테 화가 날 거 같았다. 그리고 그 불안은 현실이 됐다.


친구하고의 약속이 있던 23일, 아침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요 며칠 생리할 날짜가 다가오는 통에 생리전 증후군을 세게 앓고 있었던 터라 그것 때문이라 생각했다. 이 친구하고의 약속도 겨우 잡았던 거라 당장 당일에 취소하기도 미안했다. 우선은 약을 먹고 침대에 누워 좀 쉬다가 준비를 시작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상태가 나빠졌다. 하지만 정말로 약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 취소하자고 말하는 게 눈치 보여서 결국은 그 상태로 집을 나섰다.


지하철에서 내려 약속장소로 걸어가는데 머리가 핑 돌았다. 이러다 정말 기절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힘이 없었다. 약속장소에 도착해 차를 시키고 친구를 기다리는데 벌써부터 집에 돌아갈 게 걱정이 됐다. 친구가 도착해 상태를 말하고 너무 안 좋으면 일찍 가봐야 할 수도 있겠다고 말했다. 친구는 미리 말해도 괜찮았다며 나를 걱정해줬고 그 반응에 내가 더 고맙고 미안했다. 


친구와 있는 동안에는 그래도 몸 상태가 당장 쓰러질 거 같진 않아서 그동안 밀린 이야기를 했는데 상태가 나빠 제대로 집중할 수 없으니 아쉽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내가 몸살일 거라는 생각은 못해서 핫팩으로 배를 따뜻하게 하면서 버티고 있었는데 3시간 정도가 지나자 정말로 안되겠다 싶었다. 택시를 타야 할 거 같지만 왠지 또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동안에 괜찮아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집까지 1시간이 걸리는 거리는 체감상 10시간처럼 느껴졌다. 역에 도착해 집까지 돌아오는 길이 너무 끔찍했다. 오한이 들어 몸이 덜덜 떨리는데 그 자리에서 쓰러지지 않기 위해 정신력을 꽉 붙잡았다. 아빠 보고 데리러 나와달라고도 하고 싶었지만 당장 한 자리에서 버티기가 어려울 만큼 몸이 안 좋아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집에 왔다.


통화를 하고 있던 아빠에게 지금 쓰러질 거 같다며 약 좀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 뒤 방에 기절하듯 누웠다. 당연히 방에 갖다줄 거라 생각했지만 아빠는 식탁에 둘 테니 가져가라고 말했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하필 핸드폰도 수납장 위에 얹어뒀고 목도 제대로 나오지 않아 아빠를 부를 수가 없었다. 당장 일어날 힘도 없어 엄마가 올 때까지 그냥 그 자리에서 버텨야만 했다.


엄마가 도착하고 상태를 말하고서 약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는데 정말로 상태가 계속 나빠졌다. 몸이 너무 추웠고 열이 오르는 거 같았다. 머리가 뜨겁다는 말에 엄마는 열은 없는 거 같다며 내 손이 차가워서 그렇게 느끼는 거 같다고 말했다. 사실은 그 말에 또 내가 괜히 그렇게 느낀다고 생각하는구나 싶어 서러웠다. 하지만 내가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하니 결국 체온계를 찾아온 엄마가 체온을 쟀고 37.5도가 나왔다. 엄마는 그제야 열이 있다는 내 말을 믿어줬다.


왜 우리 가족은 내가 아프다는 말에 이렇게까지 증명을 해야만 믿어주는 걸까 서러움이 밀려와 눈물이 터졌다. 일단은 몸이 너무 아파 통증 때문에 울기 시작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점점 가족들에 대한 서운함, 아빠에 대한 원망이 합쳐져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혼자서 끙끙 참으려다가 나도 그냥 터트리자 싶어 엄마에게 그 서러움을 쏟아냈다. 엄마는 나를 달래며 약도 주고 밥도 먹이며 열을 가라앉혔다.


다행히 자기 전에는 열이 좀 가라앉았고 상태가 나아지자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물쩍 넘어가지 않고 제대로 사과하고 싶어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엄마는 아플 때 투정 부리는 건 괜찮다고 말했다. 사실 이때의 내 모습이 서른 살 성인이 할법한 행동은 아니었다 싶긴 했어도 덕분에 아플 때 누군가에게 기대고 의지한다는 느낌을 아주 오랜만에 경험할 수 있어 고마웠다. 하지만 통증은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전 이렇지만.. 다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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