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없는 사람
대표가 자신의 식당에서 알바하라는 그 제안을 다시 거둬들이긴 했지만 난 회사에 대한 모든 신뢰가 깨져버렸다. 모든 업무에 대한 애정이 빠르게 사라졌다. 작가 회의가 있던 날 난 여전히 식당으로 출근했다. 전날 식당일을 돕고도 한참 쿠팡 주문을 시켜주느라 늦은 퇴근을 했다. 아이디어 구상이나 이전 기획안 리뷰 등을 간단하게 메모로 정리해뒀다.
회의 시간에 맞춰서야 뒤늦게 등장한 팀장은 처음부터 기분이 안 좋았다. 나와 다른 직원이 가게 청소를 하고 있었고 회의에는 우리 두 사람이 모두 참여하기로 되어있었다. 팀장은 회의 준비는 제대로 했냐며 갑자기 나만 따로 불렀다. 대뜸 회의 준비한 페이퍼를 달라고 했다. 이미 진행했던 회의는 여러 번이 있었지만 페이퍼를 작성해야 한다는 규칙은 없었다. (이건 다른 직원도 마찬가지라 그 직원 역시 페이퍼를 작성하진 않았다.)
페이퍼를 준비하진 않았다고 솔직하게 말하자 팀장은 회의 내용이 완벽한가 보네? 하고 비꼬더니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회의 준비를 안 한 건 아니었기에 생각했던 것을 말했지만 팀장은 하나하나 트집을 잡았다. 애초에 아이디어 회의라는 게 각자의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정답이 정해져 있을 수 없지만 팀장은 내가 틀린 사람인 걸 증명해내고 싶어 보였다. 정말로 내가 어떤 답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팀장 역시 자신의 화풀이 상대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식당에서 대표에게 모욕당했을 때만 해도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지만 이젠 내 앞의 이 사람이 무섭지가 않았다. 오히려 네가 뭔데? 하고 얕잡아 보는 마음이 있었다. 아마 팀장의 눈밖에 난 건 그런 마음이 팀장에게도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팀장은 준비가 안돼있다며 나를 회의에서 제외하겠다고 했다. 당장 몇 분 후가 회의였다. 나와 똑같이 페이퍼를 준비하지 않은 그 직원은 따로 불려 가는 일도, 나처럼 꼬치꼬치 캐물어보는 일도 없었다.
대표가 도착하자 팀장은 준비가 안 돼서 나를 회의에서 빼기로 했다고 말했고 작가가 도착했을 때도 팀장은 똑같이 말했다. 정말 내가 회의 준비가 부족했다는 걸 지적하고 싶어서 하는 행동이 아니라 나를 창피하게 만들려는 목적이었다. 그런 의도에 휘둘리고 싶지 않아 더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다. 다른 직원은 아까 추궁당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이 울 뻔했다고 말했지만 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러기도 아까웠다.
팀장은 이후 은근한 괴롭힘을 시작했다. 우선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다른 직원이 팀장의 뒷담화를 계속 전해주는 바람에 마지못해 사과를 건네긴 했지만 그걸 받아준 것도 아니었다. 직원들 사이에서도 나를 따돌렸고 일감을 몰아줬다. 일을 해내면 하나하나 트집을 잡아 말로도 카톡으로도 자신의 감정을 쏟아냈다.
기분 나쁜 티를 내면 팀장에게 오히려 휘둘리는 걸 인정하는 거 같아 그 모든 모욕을 그저 참아냈다. 묵묵히 일을 했다. 일감을 몰아주면 말없이 그 모든 일을 해치웠고 사소한 트집을 잡아내면 내 감정을 보이지 않고 수정해서 다시 전달했다. 다른 직원이 팀장이 내게 쏟아낸 험담을 전해줄 때에도 애써 괜찮은 척을 했다.
회식을 하던 날 대표는 식당일을 혼자 하기가 힘들다며 비서일을 도와줄 직원을 구한다고 말했다. 하고 싶은 사람을 손을 들어보라 말했다. 다른 직원들이 모두 손을 든 건 정말로 그들이 하고 싶었다기보다 대표가 그런 사람이니, 안 한다고 했다가는 존재를 들먹이며 욕을 쏟아낼 사람이니 하겠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그 일을 할 자신이 없었다. 드라마일을 하고 싶어 들어온 회사에서 식당 비서를 한다니 내가 너무 싫어질 거 같았다. 대표는 솔직히 손을 들라했고 난 들지 않았다.
대표는 다른 직원들은 하고 싶어서 하겠냐며 태도를 바꾸곤 내게 욕을 쏟아냈다. 하지만 난 정말로 그때부터 될 대로 되라의 상태였다. 더 이상 대표나 팀장이 겁이 나는 것도 없었고 그냥 모든 것에 지쳐있었다. 살아지니까 살고 있을 뿐이지 매일 차가 다니는 도로를 보면 내가 이대로 뛰어들지도 모른다는 충동을 눌러야 하는 상태였다. 아주 중증의 우울증이었다.
대표가 말한 것이 있으니 처음엔 손을 든 직원 중에서 비서를 시켰다. 하지만 그 직원이 일을 제대로 못한다는 이유로 대표는 나를 선택했다. 마지못해 알겠다며 그 일을 시작했다. 작가 회의에서 밀려나고 내게 넘어오던 대본의 숫자도 줄어들었다. 하는 일은 대표에게 필요한 가구를 주문해주고 식당에 필요한 식자재를 주문하는 일이었다. 누가 뭐래도 드라마 일을 하는 거라며 합리화시켜주던 일들까지 모두 빼앗기자 출퇴근하는 길은 지옥에 가까웠다.
회사에서 나는 점점 만만한 사람이 되어갔다. 타겟이 된 다른 직원을 보며 내가 안도했던 것과 상황이 바뀐 거 같았다. 이번에야말로 내 차례다. 직원들은 나에게 대표와 말을 해보라며 아주 쉽게 조언했지만 사실은 모두 자신의 일이 아니라 다행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내가 관두면 누군가는 내 역할을 하게 될 테니 그때서야 고통을 알겠지만 그전까지 나는 철저히 혼자였다.
모두가 나를 향해 나가라고 몰아세운 기분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만둘 수가 없었다. 여기서 그만두면 정말로 내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 거 같았다. 이곳이 아니면 나를 받아줄 곳도 없어 보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회사에서 꾸역꾸역 버티는 것뿐인 줄 알았다. 사실은 모든 결정은 내가 할 수 있었던 건데도 난 다른 사람이 나를 끝내주길 바랬다.
나는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말할 곳은 엄마뿐이었다. 나는 이때 정말로 내가 제대로 되지 못한 인간이라 생각했다. 내게는 아무런 결정권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회사에서 차라리 먼저 나를 버려주길 바라는 상태였다. 하지만 만약 엄마가 먼저 회사를 그만두라고 말해준다면 용기를 낼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런 곳은 너한테 안 좋을 뿐이라고, 너는 더 좋은 대접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고, 이런 회사 그만둬도 그렇게 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고 그렇게 힘이 되어주길 바랬다.
엄마는 그렇게 힘들면 그만두라고 말했다. 다만 다른 일을 구했을 경우에만. 끝까지 지금 당장 그만두라는 말은 해주지 않았다. 그냥 나오면 더 힘들지 않겠냐면서 일이 구해지기 전까지는 그 회사를 다니라고 말했다. 그때 난 내가 무능한 인간이라 다른 회사에서 절대로 날 받아줄 리 없다고 믿었다. 그러니 엄마 말대로라면 난 영원히 이 회사에 머물러야 했다. 엄마에게 말을 할수록 풀리지 않은 감정이 더해져 계속 쌓이기만 했다. 더 이상 엄마에게도 고민을 말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