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PAIN NO GAIN
감기 때문에 후각을 잃었다. 지금 정말로 아무 향기도 맡을 수가 없다.
처음에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차 때문이었다. 한동안은 감기의 다른 증상들 때문에 너무 시달리느라 내 몸을 알아채기 어려웠다. 증상들이 폭풍처럼 지나간 뒤 조금 여유가 생겼을 때 향기가 좋았던 티백을 뜯어 뜨거운 물에 우려냈다. 예전에 맡아봤던 강한 꽃향기를 떠올리며 한 모금 마셨을 때 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따뜻하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향기를 맡을 수가 없었다.
나쁜 점만 있었던 건 아니다. 발톱의 매니큐어가 다 벗겨진 게 신경 쓰였다. 아세톤이며 매니큐어며 냄새가 워낙 독하다 보니 사실 방에서 매니큐어를 벗기고 칠하는 걸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 그걸 닦아낸 솜도 방 휴지통이 아닌 베란다 휴지통에 버릴 정도인데 지금은 괜찮을 거 같았다. 혹시나 싶어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아봐도 아무 냄새가 나지 않았다. 매니큐어를 새로 칠하고 다 마를 때까지도 전혀 괴롭지 않았다.
하지만 점점 정말로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나쁜 점도, 좋은 점도 모두 느낄 수 없는 그야말로 무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친구의 집들이에 초대받아 놀러 갔을 때 그 상태를 더욱 직면했다. 새해인 만큼 떡국을 끓여준다며 친구가 요리를 해줬다. 같이 있던 다른 친구가 맛있는 냄새가 난다며 부엌으로 몸을 돌리는데 나는 따뜻한 온기만 느껴질 뿐 아무 기대감도 맛볼 수 없었다.
커피 향이 좋다며 내게 들이밀고, 차를 골라보라며 내게 건네봐도 표현을 할 수가 없었다. 나도 친구도 냄새를 못 맡는단 사실을 잊어버리곤 그 행위를 되풀이했는데 내가 감각을 잃었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었다. 무의 상태가 된다는 건 나쁜 것만 피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모든 것들도 포기해야 한다는 걸 몸소 알게 됐다.
냄새를 맡지 못하는 것의 단점은 또 있었다. 사실은 남은 음식을 신경 써서 보관하는 편이 아니라 먹기 전에 괜찮은지 확인할 때에는 꼭 냄새를 맡아봐야 한다. 며칠 전에도 배달음식을 시키고 남은 음식이 있었고 습관처럼 괜찮은지 확인하려고 냄새를 맡았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위험을 감지할 수 없었다. 귀찮은 마음에 한입 넣어보니 맛이 이상하진 않아서 그대로 먹긴 했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건 나를 제대로 보호하지도 못한다는 걸 알게 됐다.
생각해보면 감정도 그렇다. 지금보다도 더 어렸을 때 친했던 친구와 좋지 않은 마무리를 맺으며 많이 상처받았던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다른 친구에게 그 일을 털어놓으며 나이가 들어 내가 더 단단해지면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면 좋은 감정도 느끼지 못할 거라며 더 엇나가려는 나를 달래줬다. 그때는 그 말이 제대로 와닿지 않았었는데 냄새를 통해서야 정말로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지금도 짜증이나 슬픔, 분노 같은 내가 다루기 어려워하는 부정적인 감정들이 올라오면 외면하고 싶어 진다. 이 감정들을 제대로 마주하는 게 두려워 내가 그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에서 도망치려 할 때가 있다. 다시는 이 감정들을 느끼고 싶지 않아 차라리 영원히 모르고 지냈으면 싶을 때도 많다. 하지만 부정적인 감정이 없으면 반대로 긍정적인 감정도 그만큼 즐겁게 느낄 수는 없을 거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건 내가 즐길 수 있는 삶의 영역을 줄여나가는 일이다.
뭐 물론 사람마다 행복을 영위하는 부분이 달라서 누군가는 감정을 아예 포기해버리는 편이 더 즐겁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약간의 불편함을 견뎌야 한다면 차라리 모든 것들을 느끼는 걸 선택하고 싶다. 불쾌한 냄새가 있어도 그 냄새가 영원히 나를 붙들어두진 않는다. 내가 즐기고픈 순간에 향기로운 것들로 내 삶을 채워나간다면 충분히 더 좋은 향들과 함께할 수 있다.
이렇게 뜬금없는 이야기로 브런치를 채울 수 있는 것도 멘탈이 어느 정도 회복된 덕분이다. 연말연시에 다소 산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후각을 잃은 덕분에 인생의 중요한 가치를 되돌아보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