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썼다
방금 전 자소서를 제출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붙들며 수정했지만 사실 마음에 들진 않는다. 사실 완벽하다 싶을 때까지 몰아붙이는 성향이었어서 한창 언론고시 준비할 때는 거의 울면서 제출하곤 했었다. 그 덕에 자소서에서 탈락한 적은 한 번도 없긴 하지만 이번엔 잘 모르겠다. 근데 신기한 건 그때만큼 나를 자책하고 힘들진 않다는 거다. 아질 결과를 모르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불킥할 시간이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밥 먹을 시간도 부족해 대충 과자와 초콜릿을 집어넣으며 버티다 식사도 주문했다. 도무지 뭔가를 차려먹을 기운도 없어 누워있다 겨우 일어났다. 브런치 연재만큼은 밀리지 말자고 마음먹고 글을 쓰는 중이지만 사실 하루종일 글만 쓰느라 정신은 없다. 솔직히 노트북이 꼴도 보기 싫었지만 브런치는 죄가 없으니 다정하게 대하는 중이다.
태도가 변한 건 열정이 식었기 때문이 아닐까 의문이 들기도 했다. 언론고시를 준비했던 26살 언저리의 나는 매일 토할 듯이 살았다. 아직 드라마를 만들어본 적도 없으면서 이걸 너무 좋아한다는 생각에 도무지 놓을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신이 먼저 그 나태함을 알아보고 내게 벌을 줄 거 같았다. 그런 불안함이 들어 나를 속이지 않으려고 더 몰아세우게 됐다.
이번에도 물론 최선을 다했다. 비록 후각을 잃어 대학병원을 다니기도 하고, 감기약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는 와중에서도 매일 꼬박꼬박 자리에 앉아 자소서를 다듬었다. 자소서 항목을 작성하기 위해 거의 2년 치의 드라마를 몰아보기도 했다. 불안한 마음이 들 때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며 마음을 다잡으려고 했다.
드라마 pd는 끝까지 가보지 못한 영역이기 때문에 아쉬운 마음이 큰 직업이다. 2년간 열심히 준비했던 만큼 다시 자소서를 작성할수록 그때의 한 맺힌 나를 다시 꺼내보는 거 같아 무섭기도 했다.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미련이 남아있었고 또 여전히 불안하게 느껴지는 미래가 걱정되기도 했다. 꼭 다시 그때로 돌아가는 것만 같아서 채용 공고를 보게 된 게 후회되는 날도 있었다. 결국 이렇게 다시 진심을 다하게 되는 게 힘들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나아갈 수 있는 건 나를 마주할 때뿐이다. 드라마 pd가 되고 싶은 마음이 아직도 간절하게 남아있다는 걸 받아들였다. 그건 안정된 소속에 높은 연봉과 보장된 복지에 대한 욕망도 포함되어 있었다. 1년의 시간을 보내며 궁극적으로는 좋은 작품을 만들자고 마음먹었지만 여전히 나는 그런 환경에 흔들리고 마음이 간다. 이런 마음을 부정하고 나를 속이려 했지만 사실은 나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런 나도 받아들이려 한다.
결과가 어찌 되든 이번엔 더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적어도 예전처럼 결과에 일희일비하며 식음을 전폐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어쩌면 자소서의 결과보다도 그런 모습에서 예전의 나와 달라졌다는 걸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기왕이면 좋은 결과가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