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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물꽃 Feb 23. 2024

소설_02

뭐가 중요한 지 잘 아는 것

과제 제출을 끝냈다. 마감 시간보다 하루를 넘겨 겨우 완성했다. 원래 같았으면 시간에 맞추지 못했다며 나를 자책했을 텐데 이번엔 달랐다. 뭐가 중요한지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기시험을 마치고서 바로 소설을 구상해야 했다. 모자랐던 잠이 쏟아지는데 몸에서 살려달라고 외치는 거 같았다. 잠은 잠대로 잤지만 아이디어를 짜내야 한다는 생각이 남아있어서 그런지 자도 자도 피곤했다. 하지만 잠을 일부 포기한다고 괜찮은 생각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었다. 머리가 안개가 낀 듯 뿌옇게 느껴졌다. 도무지 생각나는 게 없었다.


따지고 보면 4일 만에 5000자의 짧은 소설을 써야 하는 일정이었다. 과제를 내기도 전부터 괜찮을까 싶었다. 뭐 마땅한 아이디어가 없으니 드라마를 보면서 이것저것 떠올려보려는데 문제는 나를 자극할 만한 드라마도 찾지 못한 것이다. 시험 기간만 되면 보고 싶어서 참지 못하겠는 드라마들도 꼭 필요할 때면 더 예민하게 보느라 재미가 반감된다. 결국 뭔가를 보긴 하지만 새로 채워지는 거 없이 시간만 보냈다.


과제 제출 전날에는 뭐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 사실 마감을 넘기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라 내가 제시간에 맞추지 못하면 스스로를 압박할게 더 싫었다. 시간에 쫓겨 급하게 제출하는 것도 싫었기 때문에 여유 있게 초안을 쓰고 몇 번을 고쳐 제출하고 싶었지만 제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구성을 잡을 이야깃거리가 없다 보니 계속 초조해졌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마감날이 되면 압박감에 못이겨 뭐라도 뱉어내지 않을까 싶었다.


단편영화를 만들 때도 그랬고 기획안을 써보는 수업을 들었을 때도 떠올려보면 난 마감 시간을 엄청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주입식 교육의 전형적인 학생이라 시키는 대로 잘 따랐던 게 몸에 박혀서 그랬던 거 같다. 마감을 어기면 기본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라 생각했고 스스로에게도 너무 엄격하게 구느라 마감이 있는 수업을 들을 때면 날짜가 잡혔을 때부터 나를 못살게 굴었다.


이번엔 그런 생각에서 조금 풀어줬다. 생각을 다시 해본 건 굿피플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고 나서부터였다. 굿피플은 로스쿨 학생들이 로펌 변호사로 채용되기 위해 인턴으로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첫 번째 과제를 받았을 때 인턴 변호사들은 그날 마감 시간에 맞춰 과제를 제출하도록 미션이 떨어진다. 대부분은 그 시간에 맞춰, 혹은 어기더라도 1분 2분 정도의 시간을 초과해 과제를 제출하는데 단 한 사람만이 한 시간이 지나도록 제출하지 못한다.


여기서 다른 관점을 배울 수 있었다. 프로그램을 볼 때만 해도 그걸 지켜보는 내가 초조해 지금 한 것까지만이라도 제출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과연 시간을 어겨도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까 궁금했다. 아마 그러지 못할 거라고 짐작했던 것 같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사람은 시간 초과에 대한 페널티를 받고서도 과제 순위 2등을 받으며 좋은 결과를 얻었다. 중요한 건 그 사람이 어디에 중점을 뒀느냐는 것이었다.


마감 시간이 있으면 그걸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나 역시 과제 제출 후 다른 사람이 읽고 피드백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시간을 맞추는 것이 도의적으로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 강의를 수강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과제 시간을 잘 맞추기 위해서 선택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늦게 제출하느라 피드백을 받지 못하더라도 내 마음에 드는 글을 만들어 괜찮은 아이디어를 얻게 되는 것, 그리고 내가 압박감을 이겨내고서라도 이야기를 써내는 것 그 자체를 배워가기 위해 강의를 선택했다.


뭐가 중요한지를 떠올리니 시간에 대한 압박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관성에 젖은 게 있다 보니 시간이 넘어갔을 때, 그리고 나 외의 사람들이 과제를 제출했을 때는 물론 초조해지긴 했다. 하지만 수업 전까지만이라도 괜찮은 아이디어를 내보자. 하나의 글을 완성해보자 그렇게 마음먹고 아이디어 구상을 멈추지 않았다.


마감 시간을 넘기고서는 수업 시간 전까지 하루의 시간이 더 남아있었다. 아마 그래서 더 여유를 가졌는지 모르지만 사실은 수업 전날까지도 당장 정리해둔 게 없었기 때문에 과연 내가 과제를 낼 수 있을까 조바심이 났다. 이대로면 제출할 수 없을걸? 스스로를 흔드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를 다시 꽉 잡고 열심히 응원했다. 표현이 조금 우스울지 몰라도 정말로 내가 나를 응원했다. 아냐, 할 수 있어. 분명히 괜찮은 걸 떠올릴 거야. 그 응원이 정말로 나를 도왔다.


새로운 자극을 얻으려 찾아본 영화는 생각보다 재미없었다. 하지만 내가 엮으려던 이야기들이 서로 얽힐만한 지점들이 보였다. 아이디어가 떠오르자마자 구성을 잡고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글자수를 채워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었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나면 그건 알아서 채워질 거라 생각했다. 도중에 막히는 부분이 생겨도 일단 쓰고 고치자는 생각으로 계속 이어갔다. 결국은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할 수 있었다.


소설을 다 쓰고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정말로 해냈구나였다. 사실은 할 수 없을 거라 의심했던 마음도 있었는데 그걸 넘고서, 모든 압박감을 뛰어넘고서 결국은 완성했구나 싶었다. 필기시험을 준비하고 또 작문 시험을 치른 후에 당분간은 글을 쓰고 싶지 않다고도 생각했었다. 글이 싫었다기보다 그만큼 생각을 쏟았고 지쳤었으니까. 그럼에도 과제를 위해 계속 머리를 굴리면서 여기서 과연 더 짜낼 수 있을까 싶었다. 


그 과정은 마냥 즐겁다기보다 조금 고통에 가까웠다. 하지만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좋아서,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었다. 그 괴로운 일을 기꺼이 감당하려는 건 좋아하는 일을 잘하는 일로 만들어보겠다는 결심 때문이었다. 아무 변명 없이, 핑계 없이 내 일을 책임질 수 있는 건 모두 내가 어떤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근본적인 단단함이 결국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차근차근 나는 분명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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