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을 보는 것
무사히 마지막 과제 제출을 마쳤다. 결과로는 그렇긴 해도 역시나 이번에도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이번에 쓴 글은 sf가 들어간 사랑이야기로 시작했다. 설정 자체는 꽤 빨리 잡힌 편이었다. 평소 진지하고 잔인한 이야기만 썼다 보니 마지막만큼은 좀 더 키치 하게, 가볍고 유쾌한 글을 써보고 싶었다. 다행히 그렇게 풀어낼 수 있는 우주인 이야기를 생각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설정만 있고 전개가 안된다는 거였다.
과제제출이 2주를 남겼을 때 아직까진 괜찮다며 일단 정해진 플롯 없이 설정만으로 도입부를 만들었다. 이런 경우가 드물긴 한데 내가 적은 걸 보고 읽는데도 꽤 재밌었다. 사실 제대로 써봐야지 하고 각을 잡고 적은 게 아니라 정말 도저히 생각이 안 나는데도 자리에 앉아서 끄적인 건데 원래 그렇게 적으려고 했던 것처럼 글이 술술 나왔다. 이대로라면 마감 전까지 무리 없이 제출할 수 있겠군 하고 한시름 놔버렸다. 그게 문제였다.
그만큼의 좋은 아이디어가 이후 이야기로는 떠오르지 않았다. 설정만 있고 전개 내용이 없는 거다. 앞서 두 번의 과제를 아이디어 소개 정도로 제출했었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한편으론 그 강박 때문에 내가 완벽한 글을 선보여야 한다는 부담이 짓눌렀던 것 같다. 또, 도입부가 너무 잘 써졌다 보니 그 이후로 그만큼 이끌고 가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쉽게 다음이 써지지 않았다.
마감일 이틀 전, 엄마아빠는 외가 식구들과 여행을 갈 예정이었다. 글이 완성될 무렵이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지다 보니 (그걸 가족들에게 풀진 않더라도) 사람이 없으면 편하게 예민해진 상태로 과제를 끝내면 되겠다 싶었다. 하지만 계획에 차질이 생겨 엄마만 먼저 출발하고 아빠는 다음날 여행에 합류했다. 이미 글이 안 써진다는 예민함에 더해 혼자 있을 수 없다는 갑작스러운 변수까지 더해져 상태는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마감은 계속해서 다가오고 떠오르는 생각은 없었다. 자리에 앉아도 이어지는 글은 너무 별로라 도무지 이미 써둔 글에 붙일 수가 없었다. 그때 또 마침 여기저기 지원했던 제작팀 한 곳에서 미팅 연락을 받았다. 당장 내일 볼 수 있는지 물었지만 내일은 마감일이었고 나는 마감을 무조건 맞추겠다는 생각으로 마감 다음날로 미팅을 보류했다.
드디어 찾아온 마감날, 엄마가 여행에서 도착할 때까지 글을 완성하지 못했다. 약 15,000자 분량을 써내야 하는 게 과제였는데 내가 적어둔 건 고작 3,000자 정도였다. 마감까지는 3시간 정도 남아있었고 나는 이미 포기한 상태였다. 무엇보다 가장 싫었던 건 내가 나와의 약속을 저버린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결국 글을 써내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게 싫었다. 항상 촉박한 시간에 소설을 써내면서 시간만 충분하다면 해낼 수 있다고 변명했지만 더 많은 시간이 주어졌는데 또 도망쳐버리는 내가 실망스러웠다.
모든 상황이 싫었다. 당장 내일 있을 제작팀 미팅도 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제작팀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며 여기까지 달려와놓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못한 채 돌아가는 모습이 부끄러웠다. 그렇다 한들 지금 와서 미팅을 취소하는 것도 경우가 아니니 억지로 마음을 챙겼다. 일단은 여행에서 돌아온 엄마에게 새치 염색을 부탁했다. 사실은 방에 처박혀 되든 안되든 글을 쓰며 혼자서 이 모든 감정을 삭일 생각이었지만 흰머리가 올라온 채로 면접에 갈 수도 없었다.
“사실은 오늘이 마감이었고, 글을 못 썼어. 그래서 지금 좀 슬퍼.”
2박 3일의 여행을 끝나고 저녁 늦게 돌아와 영문도 모른 채 염색약을 발라주는 엄마에게 지금의 심정을 토로했다. 늘 그랬듯 아주 덤덤한 말투로 그렇게 내 감정을 이야기하는데 슬프다고 말로 꺼내니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어떤 감정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불안해만 하면서 해내지 못한다고 자책만 하고 있었는데 사실은 많이 슬펐던 거다. 혼자 있을 때는 울고 싶어도 눈물조차 나지 않았는데 그렇게 엄마에게 털어놓고 나니 감정도 같이 새어 나왔다.
엄마는 그 모습에 당황하기보다 차분하게 내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계속 도망치는 것 같다는 이야기에는 더 잘 쓰기 위해 한보 후퇴하는 것뿐이라며 달래주기도 하고, 내가 너무 못나게 느껴진다는 말엔 외가 식구들을 만나서 다들 얼마나 나를 예뻐했는지 말해주기도 했다. 오늘이 마감이지만 맞추지 못할 거 같다며 완벽하지 않으니 보여주기도 싫어 도망가고 싶다고 말했을 땐 나를 붙잡아줬다.
“일단 피하지 말고 끝까지 해봐. 끝까지 해봐야 그 결과를 너가 받아들일 수 있어.”
알고 있는 말인데도 너무 힘들 때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만 그 말이 들린다. 항상 나를 다독이며 했던 말은 엄마에게서 들으니 마치 처음 듣는 위로처럼 내 마음에 와닿았다.
사실 어떤 글을 쓸 때 가장 무서운 건 내가 정말 최선을 다했는데도 그 글이 너무 볼품없게 느껴지는 것이다.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고 그저 내 실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면 나는 어디로 도망칠 곳도 없고 지금의 실력으로 내 평생의 재능을 모두 의심하며 당장의 포기를 들이민다. 하지만 그 생각을 깨부수기 위해선 늘 그렇듯 일단 개떡 같은 글을 써보는 수밖에 없다. 정말 뭣도 아닌 내 실력을 피하지 않고 계속계속 마주할 때, 지겨워서 토할 거 같은 그 글을 뜯고 고치고 이리저리 심폐소생술 해서 살려보려고 노력할 때 조금씩 실력이 나아진다.
개떡 같이 쓰자. 늘 나를 책상에 앉혔던 그 모토를 다시 끌고 왔다. 마감 3시간의 기적을 보여주자며 일단은 노트북을 켜고 끄적였지만 3시간의 기적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도저히 각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자정에 가까운 시간, 몇 번이고 반복했던 사과문을 올렸다.
‘죄송합니다.. 마감은 맞추지 못할 거 같습니다. 내일 자정까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올리겠습니다.’
마감이 하루 지난 그날, 제작팀 미팅까지 있던 그날, 새벽부터 눈이 떠졌다. 오늘은 어떻게 해서든 마감을 해야 한다! 비몽사몽 한 정신으로 일단 자리에 앉았다. 생각할 거 없이 그냥 노트북을 켜고서 글을 썼다. 일단 쓰고 고친다는 생각으로 이 이야기가 말이 되는지 판단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막상 또 쓰다보니 감이 잡혀서 이대로 더 이어가고 싶을 때 미팅 시간이 다가왔다.
미팅을 하러 지하철로 이동하는 시간에도 키보드 케이스를 씌운 아이패드를 무릎에 올려두고 글을 썼다. 지하철이 덜컹거릴 때마다 속이 뒤집혀 울렁거리는 데도 손을 쉴 수 없었다. 한번 감이 올라왔을 때 흐름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더 욕심을 냈다.
걱정했던 제작팀 미팅도 나름 재미있게 끝냈다. 일을 쉬었던 기간이나 전의 작품에서 어떤 걸 맡았었는지 여러 질문들을 했을 때 내 대답을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할 새가 없었다. 이미 나는 너무 피곤했고 글을 쓰고 싶다는 거에 정신이 팔려서 그런지 머리를 굴리지 못하고 최대한 솔직하게 말했다. 어떤 사람으로 보이려고 했던 그전의 면접들보다도 더 나다운 면접을 볼 수 있었던 이유였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미어터진 지하철에선 아이패드를 꺼낼 수 없었고 몇 주간 잠도 못 잔 상태라 그럴 체력도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주문을 외는 것뿐이었다. 할 수 있어, 오늘 안에 제출할 수 있어. 자꾸 의심이 들 때 정말 어디에다가 비는 것처럼 간절하게 그 말을 되풀이했다.
집에 도착하니 다 쓰러질 것 같은 상태였다. 우선은 밥을 먹었지만 지쳐버린 심신을 조금이라도 쉬고 싶었다. 하지만 불현듯 잠깐 편하자고 지금 쉬어버리면 나중에 이 시간을 너무 후회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두려움은 불안함으로 번져 당장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다시 노트북을 펼쳐 아직 남아있는 분량을 채워갔다. 도저히 이어지지 않았던 부분들도 마감의 힘 덕분인지 어찌저찌 계속해서 붙여지긴 했다.
완성한 분량은 13,000자 정도. 하루 만에 거의 10,000자를 창조해낸 거니 이 정도면 성공이라고 봤다. 검토할 시간이 충분하진 않았지만 완성한 글을 다시 처음부터 읽으며 잘못 쓴 문장, 이해되지 않을 것 같은 부분을 찾아내 새로 고쳐냈다. 최종의 최종으로 맞춤법 검사까지 돌리고 나니 아슬아슬하게 시간은 밤 열한 시였다. 아직은 아쉬움도 남았지만 지금으로선 최선을 다했다고 느껴졌다. 더 이상 돌아갈 머리도 없었고 우선은 이대로 제출하고 수정은 피드백을 들은 후 반영하자 생각하며 업로드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