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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물꽃 May 06. 2024

소설_10

가장 객관적인 기준

마지막 과제를 제출하고 두 가지 생각이 공존했다. 이렇게 하루 만에도 소설을 써내는구나, 하면 되는구나 하는 대견함과 이따구로 후루룩 써낸 글을 과연 사람들은 어떻게 읽을까 하는 걱정. 나에 대한 칭찬과 비난이 같이 떠오르는 이 상황이야말로 모순된 나를 잘 설명하는 구간이다.


합평을 앞두고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내 글을 다시 읽어봐야 했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 피드백을 주기 위해 그 사람들의 작품도 읽어야 했다. 하지만 어느 글도 손대기가 싫었다. 다른 사람이 쓴 소설은 솔직한 마음으로 나보다 너무 잘 써서 내가 자괴감을 느낄까봐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버둥거려 겨우 제출만 했는데 같은 기간 동안 고퀄리티로 써낸 글을 보면 겨우 끌어올린 자신감이 금방 휩쓸려 사라질 거 같았다.


내 글을 보기 싫었던 이유도 비슷하다. 제출했던 당시에는 일단 냈다는 사실에 취해서 들떠있었지만 독자의 입장으로 다시 그걸 읽어보자니 걱정이 됐다. 정신을 차리고 읽었을 때 너무 별로면 당장 그걸 찢어버리고 도망가고 싶을 거 같았다. 쓰면서도 어떤 피드백을 들을지 너무 예상됐는데 소설을 들여다보면 이거밖에 못쓰냐는 자책이 나를 휘감을 거 같았다. 어찌 됐건 자신감이 사라지는 그 상황이 두려웠다.


하지만 뭐가 됐든 결국은 읽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내게 주어진 마지막 합평시간이었고 내 글에 대해서 궁금한 걸 풀어보려면 내 글을 읽고 문제점을 찾아야만 했다. 내 실력으로 개떡 같은 글밖에 쓸 수 없다면  피하지 말고 지금 내 수준을 부딪히기로 했다. 다음에 더 나은 글을 쓰려면 이번에 내가 써낸 글을 마주해야 했다.


우선 다른 사람이 쓴 소설부터 읽었다. 펼치기 전에는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는데 막상 읽어보니 별 게 없었다. 나보다 소름 끼치게 더할 것도 없었고 덜할 것도 없었다. 아직 수강생의 입장이니만큼 그분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이해되지 않은 부분도, 내 취향이 아닌 부분들도 있었다. 질투심에 사로 집히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는 달리 생각보다 차분하게 내가 느낀 점, 원하는 수정방향에 대해 피드백을 남길 수 있었다. 한편으론 빠듯한 기간 안에 과제를 제출했다는 데 묘한 동지애가 느껴지기도 했다. 


타인과 비교하며 자신감을 얻는다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는 알고 있지만 아직은 내가 이 모양이다.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서야 겨우 평정심을 유지하고 내가 쓴 소설을 읽을 수 있었다. 내입으로 말하는 게 좀 웃기지만 솔직히 도입부는 몇 번을 읽어봐도 너무 재밌었다. 이걸 쓸 때 신들렸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sf를 하루 만에 뚝딱 써낸 여파 때문인지 설정이 엉성하게 잡혀있어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도 쓰면서 몇 번이나 헷갈릴 정도였으니 사람들이 이걸 이해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사실 이렇게까지 사람들 반응을 두려워한 건 바로 직전의 과제에서 들은 피드백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다는 평이 많았고 전달하려던 의도가 완전히 빗나갔다. 소설이 일기와 다른 건 독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하려는 말이 읽는 사람에게 전달되지 않는다면 그건 독백과 다름없다. 소설로써는 실패한 것이다. 그 충격이 컸기 때문인지 이번에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까봐 겁이 났다.  


하필 과제도 마지막에 제출해서 합평 순서는 가장 꼴찌였다.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준비해 둔 카모마일티만 계속 홀짝거렸다. 줌수업이라 화면에는 담기지 않았지만 차가워진 손발도 열심히 주물럭거리며 긴장을 풀었다.


드디어 차례가 됐다. 차분하게, 있는 척하면서 소개하려는 생각은 모두 버렸다. 있는 그대로 나를 다 보여주기로 했다. 이번 소설을 쓰면서 많이 힘들었고 이 소설이 이해되지 않을까봐 걱정된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러면서 왜 이 글을 쓰게 됐는지 어떤 주제를 담고 있는지 설명했다. 수강생들의 피드백에 앞서 선생님은 아마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는 전달됐을 거라 말해주셨다. 하지만 이게 진심인지 그저 나를 안심시켜주려 하시는 말씀인지도 구분하기 어려웠다.


피드백이 시작되고 내가 마주한 건 생각보다 더 좋은 칭찬들이었다. 내가 썼던 과제들 중에서 가장 좋은 반응을 들었다. 스스로도 확신했던 도입부에선 모두가 동일하게 재밌었다는 이야기 했다. 설정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전달이 됐다. 물론 그 주제에서 취향이 갈리기도 했지만 그렇다 해도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는 이해한 거 같아서 다행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칭찬도 많았다. 너무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대신 유쾌하게 풀어보려 했던 시도나 대사에서 캐릭터가 보이도록 더 신경 썼던 부분도 알아채고 피드백에서 말씀해주셨다. 


막상 마주하고 보니 남들보다 못한 게 아니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안다는 건 참 중요한 일인데 가장 어려운 일 같다. 요즘 들어 특히나 이 어려움을 강하게 느낀다. 수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난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내가 최고라 생각했다. 피드백으로 아쉬운 소리를 들어도 그건 사람들이 아직 잘 모르기 때문이라며 귓등으로 넘겨버렸다. 그런 피드백은 훌훌 털어버리고 금방 아무렇지 않게 새로운 작업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점점 내가 의도한 것과 사람들의 반응이 어긋나자 내 실력이 정말 우주최고 바닥 수준인 것처럼 느껴졌다. 남들에게 보여주기가 겁이 날 정도로 자신감이 떨어지자 아이디어를 낼 때마다 별로인 거 같아 속상했다.


객관적으로 못하는데 혼자만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 객관적으로 잘하는데 혼자서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 그 어디에도 정답은 없을 텐데 그 중간지점을 찾아내는 게 아직 쉽지가 않다. 그리고 이건 꼭 글에서 뿐만이 아니라 삶의 곳곳에서도 발견되는 어려움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이 따르는 것, 경제적인 안정을 이뤘지만 하는 일을 싫어하는 것. 각자의 기준이 모두 다르다 보니 다른 사람의 기준을 들어서야 정답을 찾을 수 없다. 사실은 내가 어느 쪽에 서고 싶은지 잘 알아야만 하는 문제인데 아직 어느 쪽도 확실하게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으니 계속해서 다른 사람의 의견에 휘둘리고 있다. 이게 과연 앞서 한 이야기들과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내가 이렇다. 여러 기준들 앞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중이다. 


다시 돌아온 브런치를 제대로 이어가지 못한 것도 그런 불안함 속에서 휘청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또 글을 쓰면서 다짐하고 깨닫게 되는 건 알 수 없는 것들은 그 자리에 두고 계속해서 나를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지금 어떤 글을 쓰고 있는지 얼마나 성장했는지 구석구석 뜯어보며 문제점을 찾아내고 실력을 확인해야 한다. 


내가 느끼는 불안함들도 어디에서 그 문제가 발생했는지 원인을 찾아보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해내는 것밖에는 답이 없다. 바꿀 수 있는 문제라면 그걸 해내면 되는 거고 손댈 수 없는 문제라면 고민해도 바뀌는 건 없을 테니까. 내가 어디에 있는지, 뭐 때문에 문제인지는 누구에게 묻지 않고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야 한다. 객관적인 실력이든 삶의 가치든 결국 정답이라 할 수 있는 기준을 세우는 건 나여야만 하지 않을까. 결국 나에게 적용되는 객관적인 기준이란 가장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뭐 아직은 흔들거리는 중이지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방법은 잘 알고 있으니 이대로 길을 잃지 않고 평안함으로 잘 돌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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