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오래된 기억이 있었다. 11살 무렵 엄마아빠가 크게 싸우고 큰엄마큰아빠가 집으로 찾아왔다. 엄마가 엉엉 우는 안방으로 두 분이 들어가셨고 내내 큰소리가 났다. 그 사이 언니랑 나는 언니방에서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숨을 죽이고 있었다. 찍소리라도 내면 안될 거 같아 둘만의 암호를 만들어 손짓 발짓으로 대화하며 그 시간을 버텼던 기억이 난다.
이 기억은 우습게도 재작년이 되어서야 다시금 떠오르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지워버렸던 건지 본능적으로 억눌렀던 것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기억을 떠올리게 된 건 단편영화를 준비하던 때부터였다. 시나리오 작성을 위해 내 어린 시절 기억들을 파헤치는데 문득 그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정말이지 문득. 이 기억을 어떻게 잊었나 싶을 만큼 내게 파괴적인 일이었는데 왜 이제서야 생각이 났을까 싶었다.
내가 만들었던 이야기는 장녀에 관한 영화였다. 나는 늘 언니에 대한 죄책감이 있었다. 원하는 걸 모두 가져야만 하는 나와 달리 언니는 다른 사람을 위해, 특히나 엄마를 위해 포기하는 일이 많았다. 내 실력으로 지원해 용돈도 주는 외국에서 부모님께 한 학기 등록금 정도의 지원을 받으며 교환학생을 떠났을 때에도 나는 왠지 모를 죄책감이 있었다. 사실은 잘못한 거 없는 상황인데도 나는 너무 즐거운 상황이 되면 내가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감정을 억눌렀다.
고작해야 3살 차이인 언니가 희생하는 모습을 보면 늘 마음이 아프고 미안했다. 항상 나는 내가 가족 중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라는 죄책감이 있었다. 그 때문에 이 영화는 어쩌면 언니에 대한 헌정이기도 하면서 내 죄책감을 씻고 싶은 마음에서 만들었다. 어렸을 때의 장녀가 결국은 엄마에게 배운 대로 동생에게 매를 들어 훈육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착한 언니가 내 영화 속에서라도 나쁜 사람으로 살아보길 바랬던 거다.
단편영화를 잘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에 과거 일을 계속해서 파헤쳤지만 사실 어린 시절의 일들을 떠올리는 건 내게 고역이었다. 11살 때부터 20살 때까지는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 노릇을 했었고, 아빠는 무심하게 그 상태를 방치했다. 내게 어린시절이란 공허함이다. 그때의 기억을 파헤치는 건 말라비틀어진 땅을 갈퀴로 마구 헤집는 것과 같다. 꺼내볼수록 자꾸 상처가 된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를 위해 과거를 건드렸다. 영화의 뼈대를 잡는 과정에서 예전의 그 기억이 떠올랐고 왠지 모르게 불안함이 밀려왔다. 기억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과 함께 언니한테 물어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 일은 도대체 어떤 일이었을까. 언니가 사실 별 일 아니었다 말해주면 이제 내가 그 불안함에서 벗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그렇게 쉽게 해결되기를 내심 바랬던 거 같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쉽게 흘러가지 않았다.
장녀 이야기를 쓰겠다고 결정하고서 언니를 인터뷰했다. 장녀로서 어땠는지 여러 질문들을 하다가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그 일에 대해 물었다. 언니는 어떤 일이었는지 알고 있다고 했다. 내가 그 일을 어렴풋이나마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란 것도 같았다. 나한테 말해줄 수 있는지 물어보자 언니는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다.
언니는 그 당시 바로 그 일을 알게됐지만 내가 구김살 없이 자라기를 바래서 숨겼다고 말했다. 3살 차이 나는 언니가 그 생각을 하며 자라왔다는게 마음이 찢어질 거 같았다. 동시에 그 일이 웬만한 일이 아니구나싶어 내 불안감은 증폭됐다. 언니가 나를 지키려고 했던 노력을 위해서라도 이 기억은 꺼내볼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