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판단

트라우마_02

by 김물꽃

스물세 살, 처음으로 공황발작이 일어난 이후 나는 트라우마에 대해 끊임없이 공부했다. 도대체 내가 왜 이 지경이 된 것인가 궁금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부터 아동심리발달 관련 책들을 하나씩 섭렵하며 지금의 괴로움이 내 어린 시절하고 연관이 있다는 것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책에서 보여주는 사례들에선 트라우마를 떠올리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다 차츰 트라우마를 직면하며 지금은 과거의 상황과 다르다는 걸 받아들이며 그 기억에서 벗어나곤 했다.


나는 막연히 그 사람들이 부럽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참 철없는 생각이었다. 만약 트라우마가 있었다면 내가 그걸 모른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기억하는 한에선 뚜렷한 트라우마라고 할 게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가진 슬픔과 괴로움은 너무 애매하고 모호하다고 생각했다. 구체적인 원인이 없으니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조차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5년 전 처음으로 상담을 받았던 건 엄마와의 관계 때문이었다. 엄마에게 기대고 싶으면서도 엄마가 늘 불편했고 내가 상처받으면서 거리를 좁히느니 외로운 채로 거리를 두는 게 낫겠다 싶었다. 하지만 늘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왜 이렇게까지 엄마를 힘들어하는 걸까. 친구들이 엄마와 친구처럼 지내는 모습을 볼 때면 늘 부럽고 질투가 났다. 나는 왜 그렇게 못할까. 모든 문제가 나한테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트라우마라고 생각했던 첫 번째 기억은 이 상담으로부터 찾아내게 되었다. 이것도 역시나 11살 무렵의 일이었던 것 같다. 집에는 온통 불이 꺼져있었고 우리 집에서 가장 작은 방이었던 내 방에 엄마가 혼자 들어가 있었다. 방에선 엄마의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엄마가 걱정됐다. 소주 한 병과 잔 하나만 놓인 어두운 방 안에서 엄마는 쪼그려 앉은 채로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울고 있었다. 나는 엄마에게 휴지를 건네며 울지 말라 달래주고 물도 마시라며 가져다줬다. 그 집안엔 아빠도 언니도 없이 울고 있는 엄마와 어린 나 둘 뿐이었다.


이때 역시 내가 왜 이 기억을 잊어버렸을까 싶었다. 어린 시절 내 정서를 잡아먹었던 괴물 같은 일이었는데 어떻게 잊을 수 있었던 걸까 놀랍기도 했지만 사실 버거웠다. 그때의 감정과 무게가 한꺼번에 느껴지면서 이 기억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당시 엄마가 죽을까봐 겁이 났다. 내가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으면 엄마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린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버거웠던 엄마의 상처들을 모두 흡수해버렸다.


성인이 되고선 엄마와 멀리해야겠다는 것까지는 인지를 했었다. 내가 살기 위해 엄마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이때에도 내가 아니면 안 될 텐데 하는 생각에 엄마를 외면하면서도 극심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어린 시절 엄마에게 무관심했던 아빠를 극도로 미워했는데 아빠의 모습을 닮아간다고 느낄 때면 스스로 자괴감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엄마에게서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던 아빠를 이해하고 연민하기도 하며 나는 혼란의 구렁텅이에 빠져 허덕였다.


나는 이 기억이 내 트라우마라고 생각했다. 그때를 떠올리는 것이 내게 충분한 고통이 되었고 여전히 나는 엄마에게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이야기를 들은 상담선생님은 그때로 돌아가 엄마에게 그 이야기는 내가 아닌 엄마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라고 말해보라 했지만 나는 말하지 못했다. 엄마가 없는 상담실에서 조차 엄마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며 나는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줄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5년 전 상담을 받으며 내가 먼저 챙겼던 건 내가 아닌 엄마였다. 그 기억을 떠올리고 엄마와 대화를 하게 됐을 때 나는 어릴 때 엄마의 우울증을 내가 같이 감당했던 게 많이 힘들었었다고 이야기했다. 엄마는 내게 미안해했지만 나는 엄마가 미안해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 내가 받았던 고통을 이야기하는 대신 엄마를 위로했다. 그 당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비슷하게 돌아가시고 아빠도 무심하고 언니도 사춘기였다보니 엄마도 나밖에 없었을 거라고. 그래서 나한테 이야기했던 걸 테니 어쩔 수 없었을 거라며 엄마의 상처를 위로했다.


엄마와의 이야기를 끝내고 후련해지는 건 없었다. 내가 받았던 상처는 엄마에게 영영 털어놓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트라우마가 있다면 한 번에 그걸 알아차릴 거라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트라우마를 마주했다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 본질을 직면하게 된 건 엄마와의 기억을 떠올리고서도 5년이 더 지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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