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하고 단단하게, 나만의 속도로

오늘도 나답게 살아가기(8)

by 녕이담

'졸업'이란 단어는 '끝'의 의미보다는 '시작'의 의미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또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시작하라는 졸업은 또 다른 고민을 안겨준다.


20대 중반이 되니 주변에선 슬슬 자기만의 길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대학원, 취업, 사업, 등등..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나 자신이 너무 좁은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살아왔다고 느끼곤 한다.


어떻게 해야 이 우물을 벗어날 수 있을까?


이 고민에 답을 구하기까지 수년이 흘렀다.


난생처음 아르바이트를 구해보겠다고 지원했다가

대학생이 아니라는 것과

나이에 비해 무경력자라는 이유로 탈락되어

사회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졌는데.


무언가를 달성하면 나아질까 싶어

비록 어린아이 수준이지만 한자 등급 시험도 쳐봤다.


병원이 아닌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가면서

한동안 수제 방향제를 만들어 주변에 선물도 하고,

주변인들에게 주문을 받아 만들어주기도 했다.


한 번은 원데이 클래스로 마카롱을 만들어 보기도 했는데,

한번의 경험이 힘들지만 내 손안에서 만들어진 달콤한 향기가 재미있어서 집에서 다시 한번 만들어 보고

한동안 몸살로 고생한 뒤로는 베이킹은 다신 안 하겠다며 마음을 접기도 했었다.


어느 날은 햇살이 좋아서 동네 산책을 갔다가 장도 봐오고, 새로운 가게가 생기면 기웃거리다 들어가보기도 하고.

그동안 누려보지 못했던 일상을 이렇게라도 채워나가 보겠다는 마음의 나날들.


대학을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매일 정기적인 외출을 나가는 것은 나에게는 무리한 일정이었기에 망설이고 고민을 거듭하였지만 결국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 포기는 영원히 놓을 수 없는 아쉬움으로 자리하고 있지만, 이러한 일상이라도 간신히 손에 닿아

한낮의 태양에 몸에 달린 수액 줄 없이 잠깐이지만..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는 소소한 해방감에 감사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런 마음도 서서히 시간이 가면서 다시 초조함으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점점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안정을 이루어가는 주변인들을 보고 있으면, 나만이 다른 세상에서 다른 속도로 동떨어져 살아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이. 직장. 소속. 소득.

현실적인 압박감은 나에게도 여지없이 다가와서 자신을 채찍질하고 가족마저도 그런 나의 압박에 힘을 보태어왔다.


이미 더딘 걸음으로 나아가는 나에게 더 속도를 내라고, 다른 이들은 저만큼 나아가는데 너는 왜 여기 멈추어 있냐고, 나무라는 말들에 휘둘러진 채찍이 나를 사정없이 때렸다.


나의 걸음은 너무 더뎌서 누군가에게는 나아가는 모양새로 보이지조차 않는다는 생각에 자신이 없어졌다.


이 믿음이 결국 혼자만의 만족이자 핑계가 아니었나 싶어서 그동안 스스로의 자기 보호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게 한동안 갉아먹던 감정들 속에서 하늘나라로 가는 친구들이 하나둘씩 늘어갔다.


나는 계속.

자꾸만 나이를 먹고 있는데.

그들은 기억속에서 여전히 그 나이의 사람으로 존재하여 나만이 자꾸 나이를 먹어가고 있었다.


어느 겨울날, 예정된 입원일이라 병원에 가던 길.

동갑이었던 병원 친구의 장례식을 들르게 되었다.


바로 며칠 전 면회로 마지막이 오기 직전의 친구를 볼 수 있었는데, 친구의 모습에서 처음 장례식에 가기전 만났었던 그가 떠올라 마음이 쓰렸다.


그 친구의 장례식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 울적한 마음이 가득한 채로 입원 짐을 실은 캐리어를 덜덜 끌고 가면서 지난 추억에 잠겼다.


우리는 모두 한때 같은 곳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지만..


지금은 하나 둘씩 볼 수 없는 이들이 되어버리고,

나만이 여전히 그 장소에 남아 있었다.


그때부터 나의 고민은 다시 시작되었다.


나는 앞으로 어떤 길을 걷고 싶은 걸까?


그들이 걷고 싶었을 이 '삶'이라는 길을 나는 계속 걸어갈 수 있음에도 왜 이리 나아가지 못하는 걸까?


과연 나는 삶을 제대로 나아가고 있는 걸까?


어쩌면 내가 아닌 그들이 이 삶을 걸어갔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뒤늦은 성장통처럼 아픔이 뼈마디 마디에 부서질 듯 고통스럽게 다가왔다.


이미 없는 이들에게 수없이 물어보아도 답이 돌아올리 만무해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그들은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한번 잃어버린 것은 다시 돌아올 수 없고.

삶도, 생명도 그러하기에.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이 이어나가지 못할 삶을 내가 잘 이어 나가 보겠다고, 적어도 이 생이 이어지는 동안 내 나름의 최선을 다할 테니 지켜봐 달라는 말 밖에는 없었다.


마음속의 작은 무덤이 하나씩 늘어가며, 그들의 생각이 날 때마다 묻는다.


날 지켜보고 있어?

나 잘 버텨나가고 있는 것 같아?


비록 들을 수 없는 답일지라도.

늘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작은 꽃 한 송이를 무덤마다 놓으며 한때 세상에 존재했던 이들을 추억한다.


내 삶의 졸업에 다다를 때가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훗날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이어나가길 바라며 - 조용하게, 천천히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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