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그러진 날
겨울에 크게 아프면서 큰 대가를 치르고 나자,
일종의 등가 교환의 법칙처럼 1,3,5월의 입원의 저주도 깨지고,
어쩌면 근래 중 가장 평화로운 시기로 보일 수 있는 때가 온거 같다.
정작 나 자신은 매일같이 자신과의 전쟁중인데도 말이다.
평온이라는 단어가 주는 기대치는 무언가 더 보상적인 부분으로 작용할 듯하여서.
기왕이면 더욱 더 만족스러운 것을 바라게 되는 것은 인간이라서인지,
아니면 그저 내가 욕심을 더 부리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수술한 이후로 자잘하게 찾아오던 복통이나 혈변이 없어졌으니
누군가는 살만하지 않냐고 묻지만.
당사자인 나는 몸에 달린 것이 한개에서 두개로 늘어났는데,
이상하게도 신경 쓸것은 열배로 늘어난 것처럼 느껴져 영 평온하지가 않다.
분명 나아진 점도 있지만.
그것으로 다 만족하기가 어려워서 어떤 날은 버티고 버텨가는 하루가
무척이나 지겹게 느껴질때가 있다.
처음엔 이런 마음에 죄책감도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난 평범한 인간인데, 이기적인 마음이 들면 잘못인가?'
이날도 그런 생각이 드는 하루였다.
오전과 오후 모두 진료가 있어 아침 일찍부터 병원으로 향했다.
뜨거운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며 왼손에는 선풍기를 들고, 오른손은 고정을 위해 한 반깁스가 자리잡아
손목에 무리를 주지 않고 지탱을 하려 슬쩍슬쩍 적은 힘을 싣기 위해 애쓴다.
며칠 전 스테로이드 치료를 시도했다가 염증 반응이 더 활성화 되어 손목에는 푸른 멍과 찌릿한 통증이 오히려 손목을 더 쓰기 힘들게 만들어 한숨이 푹 나왔다.
진료 시간에 임박하게 도착해버려 서둘러 도착 접수를 하고. 대기하고 들어간 여성클리닉 외래에서 자궁내막증이란 소소한 진단이 추가가 되어 추적 관찰이 필요히다는 밀과 함께 다음 외래 일정을 받아 나왔다.
담당 교수님은 이것저것 친절하고 자세히 설명을 해주셨는데,
막상 듣는 나는 별 생각이 없었다.
어쩌면.. 그다지 놀랍지 않아서 랄까.
아니면.. 굳이 생각과 마음을 쏟고 싶지 않았달까.
오후 진료를 기다리는 동안 커피를 마시며 뎅-하니 앉아 있는데 머리가 묵직했다.
이날은 대서였는데, 더위에 나약한 몸에게 반응이 온다.
아직 오후까지 내내 병원에 있어야 하는데 벌써 몸이 지쳐버렸다.
오후에 시작하는 진료 시간에 맞춰 다시 진료실로 향하는데 무더위와 다르게 하늘의 구름이 참 예뻤다.
걸어가는 내 뒷편에서 직원분들이 구름이 너무 예쁘다고 즐겁게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피식 웃었다.
한 달만에 뵙는 교수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려했는데 맥아리 없이 말할 기운도 잃어버려,
그냥 간단히 필요한 내용만 말씀 드리고 나왔다.
수납하고 처방된 약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간단히 요기를 하려 오뎅을 하나 사서
1/3정도를 열심히 꼭꼭 씹어 먹고 에너지를 충전했다.
늘 받는 보름치 정도 수액을 카트를 밀어 옮기는데, 거의 100키로에 가까운 액체의 무게이다 보니
밀때마다 구슬땀을 흘려대지만, 나름의 요령도 터득해 슥슥 밀다보면 목적지로 잘도 밀고가기도 한다.
그러나 이날은 이마저도 수월하지가 않으니 도대체가 왜 이러나 싶은 날이었는데.
무겁게 끌고가는 카트 바로 앞이나 옆으로 지나가는 사람.
휴대폰만 들여다보느라 안 비키는 사람.
앞에서 가다가 갑자기 멈춰서는 사람.
혹여 부딪힐까 '앞에 보세요!', '비켜 주세요!' 소리를 내어보아도..
딴 생각 하거나 귀가 어두우신 어르신인 경우 소용이 없어 몇 번을 가다 멈추길 반복했다.
큰 무게가 실린 것은 천천히라도 쭉 밀면 큰 힘을 들이지 않을 수 있지만,
한 번 멈추면 다시금 힘을 실어 밀어야 할 때마다 큰 힘이 힘들가니 매번 참 고역이다.
그렇게 간신히 목적을 다하고 외부 약국으로 가서 먹는 약을 받아 나오는데 버스 타는 곳이 코앞이라
걸어가며 굳이 양산을 펼칠까 고민하는데, 위에서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물음표를 띈채 서둘러 양산을 펼치자 그 위로 물방울이, 아니 빗방울이 잠깐 소리를 내더니 버스 정류장에 오자 다시 종적을 감추었다.
집에 오는 길.
손목 진료를 보는 날이라 진료 후 물리치료를 하는데 전기 자극과 마사지를 하는 중에 점점 팔에 뻐근한 통증이 와서 호출기를 눌러 다시 위치를 조정했다.
내 표정이 안 좋았었는지 '참지 않으셔도 돼요' 라고 해주셔서 멋쩍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치료를 받는 동안 하루가 너무 고되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저기 망가진 몸이 마음마저 물들여 온다.
sns에 투덜대는 글을 올리며 그런 마음을 달래본다.
남들 보라고 올리는 sns라지만 그냥 나의 이야기를 세상 단 한 사람쯤은 이해해줬으면 하는 바램.
자기 만족 일지라도.
망그라진 하루가 지나고 내일은 다시 내일의 하루로 찾아오기를 바라며.
아직은 밝지만 곧 해가 질듯한 하늘을 바라보며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