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만이 내 세상이었다
어린시절을 떠올려보면 스마트 폰도 없었고,
소통의 시대가 아니었음에도 오히려 사람과 더욱 가까웠던 때가 아니었나 싶다.
놀이터에서 놀다가도 너희 집 갈래? 우리 집 갈래? 하고 오가면서 밥도 먹고 게임도 하고 인형 놀이도 했다.
때론 서로 책을 한줄씩 번갈아 읽으면서 하하호호 웃고 떠들며 놀던걸 지금와서 생각하면 뭐가 그리 재미있었던 걸까 싶으면서도 그때가 참 많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아파서 학교 결석으로 친구와 놀지 못하던 날들은 드라마와 만화를 보거나 책을 봤다. 독서를 꽤 좋아했기에 그냥 마음이 가는대로 고른 책의 페이지를 슥슥 넘겨가면서 그 안에 있던 세상으로 잠깐씩 빠져 들어갔다 나오고는 했다. 적어도 그 세상속의 나는 자유로웠다.
한참 대여점 시대를 살아갈 때, 초등학생 이던 내가 만화책과 인터넷 소설을 빌리러 가는 것은 삶의 낙이었고 단돈 200원, 300원이 주던 행복이 어린이에겐 큰 사치이기도 하였다.
독서는 나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아마도 좁았던 나의 세상을 넓었던 세상과 이어주던 작은 연결 고리가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그 흔하다는 개근상을 단 한번도 구경도 못하게 결석이 잦고, 수업 시간 전부를 출석하기도 어려웠기에 또래 친구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하기 어려웠다.
그렇기에 TV 속 애니메이션과 책은 늘 곁에 머물러 주는 좋은 친구였고. 재미있게 읽은 책이 생기는 날은 혼자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끄적여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기도 했다.
그래. 어쩌면 그때부터 이야기를 듣고 쓰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랬기에 학교 출석이 부족해도 일기만큼은 부지런히 써서 6학년 즈음엔 1년동안 5권 이상의 일기를 쓰기도 했었다.
가끔은 마트에 장을 보러갔다가 오빠와 나를 책을 볼 수 있는 곳에 남겨두고 엄마 혼자 장을 보러 가시는 일들도 종종 있었는데, 덕분에 그 사이에는 마음껏 읽고 싶은 책을 읽고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골라 만족스레 품 안에 넣어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었다.
긴 병원 생활에서는 원내 도서실에서 매주 병실을 돌며 책을 빌려주었었다.
컨디션이 좋은 날은 직접 가서 빽빽한 책을 사이에서 보고 싶은 것을 골라오기도 했다.
도서실은 아주 큰 공간은 아니었지만. 공간 내 알차게 여기저기 빼곡하게 차 있거나 쌓여있는 책들이 가득했기에 그 사이에서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며 고심했다. 그곳을 나설 때는 늘 빌릴 수 있는 한도였던 2권을 골라 병실로 돌아오는 일이 점점 잦아졌다.
어느새 사서분과 얼굴이 익숙해져 반갑게 인사하며 들어가는 곳이 되었고, 지루한 병원 생활 속에서 유독 더 지루하게 느껴지는 주말이나 공휴일을 앞두고 있는 날은 책 한 권을 더 빌려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중3 즈음 닌텐도를 선물로 받고, 고등생 나이 때는 병원 친구들과 병원 안팎으로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거나 질환으로 고생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독서의 시간은 차츰 이전보다 줄어들게 되었다.
스마트폰이 생기고 나자 직접 가서 빌리는 책 말고도 자유롭게 책을 선택하고, 읽을 수 있는 방법이 많아지자 스마트폰으로 취향에 맞는 소설을 찾아 읽을 수 있었다.
잠이 오지 않는 날은 어둠이 가득한 병실에서 모두 잠든 시간. 나만이 깨어 있는채로 휴대폰 화면에 비친 얼굴로 동이 터오는 새벽까지 읽다가 잠들었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정도만 되어도 그날은 아주 나쁜 컨디션은 아니었지만 컨디션이 나쁜 날은 그 무엇도 볼 겨를이 없었다.
그래도 작고, 좁게 갇혀 있던 세상에서 잠시 도피를 할 수 있었던 곳은 손안의 작은 세계였다.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전보다 종이책을 읽는 빈도도 줄었다. 책을 펼치고 바라보는 눈은 마음과 달리 글자가 머리와 들어오는 대신 흔적없이 스치고 가버리는 날이 점점 늘어갔다.
글자 대신 머리를 차지하던 고민이 글자 대신 빙빙 날아다녀 무엇을 보는 것인지 알 수 없어 피로감에 책을 덮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틈만 나면 책을 사고 드라마를 보다 마음에 드는 내용이 있으면 대본집에도 시선이 간다. 그외에도 내가 좋아하는 소설,웹툰,애니를 틈틈히 본다.
깊게 자리하지 못하고 스쳐가던 것들이 어느 날은 살며시 정착하는 날이 올 때가 있어 그때를 기다린다.
나날이 다양해지는 글의 형태와 미디어의 발전. 큰 변화가 없는 반복적 일상을 버텨야 할 나에게는 마음 한 구석 숨어있던 다른 욕구가 확장되어 가는 세상을 만나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렇기에 활자와 영상 속 누군가의 이야기에 몰입하게 될 때마다 대사 한마디 글 한줄에 울고 웃는 사람이 된다.
등장인물 저마다의 이야기들이 각각의 삶의 모습을 하고, 내가 겪어보지 못한 모습으로 성큼 다가온다.
손 안에 쥐어진 것이 종이로 엮은 글이던 쇳덩어리로 된 휴대폰 안의 활자이던 가상의 세계이던 간에 여러 사람이 만들고 다듬고 엮은 이야기 속 세상이 곧 나의 세상 같았다.
적어도 그 안에서는 다른 고민을 할 필요 없는.
지친 일상 중 손만 뻗으면 닿는 곳은 또 다른 세상을 향해 오늘도 연결해주는 존재가 되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