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하고 단단하게, 나만의 속도로

오늘도 나답게 살아가기 (20)

by 녕이담

그러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애쓰기도 전.


몸의 신호가 또 한 번 경종을 울려댔다. 와르르 무너지는 몸을 보며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컨디션이 좋지 않았지만 그보다 마음의 상태가 더 좋지 않았다. 결국 강릉의 겨울 바다 소리를 들으러 같이 정맥영양을 하는 동생과 함께 여행을 떠났다.


몇 년만에 발걸음을 재촉해 아침부터 KTX를 타고 2시간 넘게 걸려 강릉에 도착했다.

택시를 타고 숙소로 이동. 바다가 보이는 숙소는 작지만 깔끔했고, 하얀 커튼이 나풀거리며 겨울의 향기를 흘렸다.얼마 전 또 장출혈이 심해 입원해서 수혈도 하고 했던터라 직전까지 여행을 취소할까 말까를 고민한 터라 첫날부터 무리한 일정은 잡지 않기로 했다.


숙소 바로 앞의 강문해변에서 흐리지만 시원하게 들려오는 바닷 바람을 맞으며 그 날이 막냉이 S의 생일이었던 것이 떠올랐다. 모래사장 위에 아무리 발자국을 남겨도 바닷물에 씻겨져 가는 것을 보면서 짧게 생일 인사를 건네었다.


차디찬 바람을 맞으니 시장해진 배를 채우러 가까운 곳에 위치한 베이커리 카페로 걸음을 옮겼다.

와글와글. 대형 카페 안에는 사람이 가득해서 우리가 떠드는 소리가 묻힐 정도였다.

숙소로 다시 돌아와 겨울 바람에 시렸던 몸을 잠시 녹이며 어디를 갈지 찾아보다 이전에 남겨둔 숙소 근처에 위치한 독립서점에 가보기로 했다.


늘 도심에서 살던 빠름과 달리 한적한 시골 동네의 모습이 느껴지는 버스 배차간격.

쉽사리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다 온 버스에 몸을 싣고 잠시 기다리자 이내 정거장을 떠났다.

그렇게 어둠이 스며들기 시작할 무렵 정류장에 내려 도착한 강릉의 독립서점 한 곳.


약 반년 후 문을 닫을 예정이라고 하는 이 무인 책방의 형태를 한 서점은 1년 후 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낼 수 있었다. 우리는 자신에게 쓰는 편지를 남겼고 휘갈긴 편지를 부친 나는 책을 몇권 사서 돌아왔다.


늦은 저녁. 근처 마트에서 간단히 장을 봐서 초밥과 맥주를 사와 간단히 저녁을 먹고.

종일 이곳저곳을 다녀 피곤함이 몰려와 곤히 잠에 빠져들었다.

첫날 여행의 밤은 새근새근 내뱉는 코끝에 겨울 바람이 살랑거렸다.


둘째 날, 아침부터 유명하다는 카페를 찾아가 답지않게 칼바람을 맞아가며 1시간 넘게 대기하다 동사 직전 겨우 입장해 커피 한 잔을 마셨다. 그 후 미디어아트 전시를 보러 아르떼 뮤지엄으로 향해 그 안에서 화려한 색감을 감상하며 ‘기다림의 가치’는 이런 곳에 발휘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몇 시간을 머물다 그도 지쳐 다시 근처 카페로 가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오는 동안 언 몸을 녹였다. 전날 급하게 원데이 클래스를 하러 가서 예쁜 젤캔들을 만들고 저녁으로 빨갛게 익은 배를 내민 대게를 먹으며 밤을 마무리했다.


얼마 안 되었다고 생각한 여행이 벌써 1년 반이 넘었다.

그때 그 겨울 바다의 냄새가 아직도 코끝에 불어오는 듯한 감각은 당시의 감정 때문에 더 차갑고 시렸을지도 모르겠다.

작년 여름. 병원에 있다 퇴원하고 오는 날 우편함에 꽂혀있던 편지 한 통.강릉에서 썼던 편지가 도착해 있었다.

당시 무슨 말을 적었는지 잊어버릴 즈음 불안함이 담겨있던 감정을 마구 휘갈기던 기억만이 스쳐갔다.


그렇게 편지는 지금까지도 열어보지 않고 서랍에 보관되어 있다.


언제쯤 뜯어보게 될까?

어떤 마음으로 그것을 뜯어보지 않는가는 아직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대신 받은 지 곧 2년이 다 되어가는 S가 생일에 선물한 드립백 커피를 하나식 꺼내 마시려다 늘 머뭇댄다. '아끼지 말고 먹어'란 말이 귓가에 들려와 아까운 마음을 달래 가끔씩 꺼내서 내려 마셨다. 그럼에도 자꾸만 없어지는 것이 왜 그리 아쉬운지 늘 방황하는 손. 아직도 다 먹지 못하던 드립백은 이제 3개가 남아있다.

나는 이 3개를 언제 다 마시게 될까.



여행 이후 나의 삶은 참으로 무료하고 지난하여서, 크고 작은 이벤트들이 가득했다. 그렇기에 매일을 그저 잘 버티는 것만이 할 일이 되어버렸지만 반복되는 그것에 지쳐버리기도 했다.


일상을 살기 위해 버티는 것이 큰 숙제로 한동안 매일 표류하지 못하고 둥둥 떠나니는 부표 같은 하루를 마지못해 살았다.

종종 시간이 나면 평소 버스를 타고 환승해서 오가던 퇴근 길을 좀더 여유있게 걷고 걸어서 빙 돌아 지하철을 탔다. 그렇게 걸으며 계절이 변해가고 공기가 변해가며 사람들의 옷차림이 변해가는 모습들을 감상하며 나의 다음 계절은 어떤 모습일지 그려보았다.


답이 없는 삶을 어떤 길로 걸어나가야 할지, 어디로 가야할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애초에 알려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란 것도 잘 알지만 매번 이런 방향성의 혼돈이 올 때마다 참 야속하다.

바다처럼 구름처럼 자유로운 시간을 단 며칠이라도 보내고 싶다는 현실과 거리가 먼 생각을 하면서 겨울 바다를 떠올린다.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는 모양처럼 내 혼란함도 그렇게 쓸려가길 바라며 그 아이의 유서처럼 오늘의 최선을 위해 또 하루를 버텨간다.

작가의 이전글조용하고 단단하게, 나만의 속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