쿙가
융진이 함부르크에 놀러 왔을 때 아이유 노래를 잔뜩 들려줬다. 가만히 누워서 노래에 심취해 미동도 하지 않고 들었다. ‘아이와 나의 바다’가 재생되었을 때 한 구절 한 구절이 너무 가슴에 속속들이 들어왔다. 특히 “아이는 그렇게 오랜 시간 겨우 내가 되려고 아팠던 걸까”라는 가사에서는 나도 모르게 숨을 잠깐 참았다가 내쉬었다. 나는 지금의 나를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가사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계속 생각해 봤다. 나는 아이 었을 때 어땠을까. 그리고 나는 어쩌다 지금의 내가 되었을까.
지금의 나는 내가 상상하던 나의 모습과 많이 다르다. 내가 아이였을 때 나는 스스로가 굉장히 멋진 사람이 될 거라고 믿었다. 무슨 일을 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아주 그럴듯한 직업을 가지게 될 것 같았다. 돈이 아니라 꿈을 좇는! 세상에 타협하지도 않고 자신의 길을 개척해나가는! 자신의 일을 사랑하며 자부심을 느끼며 세상에 이로움을 주는! 그런 직업을 원했다.
그러나 그 원대한 꿈에 맞는 직업은 대학을 졸업하는 25살 때 까지도 찾지 못했다. 졸업하고 나서도 모호한 꿈과 환상에 사로잡혀있었다. 뭘 하고 살지도 모르면서 일단 ‘회사원’은 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회사원이라니. 너무 흔한 직업 아닌가! 나는 남들과 다르게 비범한 삶을 살 것이다!
나는 그렇게 정말 답 없는 상태로 대학교를 졸업해버렸다. 비범한 삶을 살 거라던 자신감은 졸업과 함께 사라졌다. 인정하기 너무 힘들었지만 나는 특별하지 않았고 특출 나지도 않았다. 남들보다 운이 따라주는 것 같지도 않았다. 대단한 무언가를 하고 싶었는데 그 대단한 무언가가 무엇인지, 존재하는지도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가장 무서웠던 건 여차했다가는 그 상태 그대로 평생 뭐하고 살지 모르겠는 사람으로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뒤늦게 취업 준비를 시작했다. 당시 가지고 있던 자격증이라고는 어디 가서 인정도 안 되는 독일어 어학 자격증이었다. 대부분의 회사에서 영어 자격증을 요구하는데 나는 공인 영어 시험조차 봐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영어 성적 만들겠다고 영어공부만 하고 싶지 않았다. 무작정 워홀을 갔고, 워홀 생활이 생각만큼 아름답지 않아서 독일에 있는 한국 회사에 이력서를 넣었다. 그리고 취업이 되어 독일로 갔다.
사실 나도 내가 어쩌다가 지금의 내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독일에서 살 생각도 없었고 지금 일하는 업계는 전혀 생각도 안 해본 분야였다. 그냥 정말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헤매다가 여기까지 흘러들어왔다.
숨숨
대학교 2학년 어느 날, 한 친구가 ‘스페인어 초급’이라는 교양수업을 들어보라고 추천해줬다. ‘스페인어? 재밌을까?’라는 생각으로 그냥 수업을 신청했다.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막 엄청 재밌지도 않았었다. 본격적인 흥미가 붙었던 건 중남미 사회, 문화 수업을 듣고나서부터였다. 우리나라와 정반대 대륙에 있기도 하고, 문명 이야기를 듣고 나서 미스터리하고 신비롭게 느껴져서 ‘어떤 곳일까?’ 하는 막연한 환상과 호기심 정도를 품었던 것 같다.
전공 공부가 지루해지면 그냥 스페인어 초급 책을 꺼내서 혼자서 대강 끄적거렸다. 계속 보니까 나름 매력 있었나 보다. 그렇다고 엄청 열심히 한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재미는 있었다. 학교에서 진행하는 스페인어 튜터링에 참여하기도 했었는데, 그때 내 튜터였던 멕시코, 페루 친구들이 유독 친절하고 좋았어서 중남미에 대한 인상이 아주 좋게 남았었다.
졸업할 때 타이밍이 참 기가 막히게 중남미 관련 수업을 들었던 교수님의 추천으로 멕시코 연수 프로그램에 합격했고, ‘적어도 관심이 있으면 라틴아메리카가 어떤 곳인지는 직접 가서 경험해 보자.’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나는 졸업과 동시에 멕시코에 가게 되었다.
멕시코에서의 생활은 한 마디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값진 경험들을 많이 했다.’로 표현하고 싶다. 근데 도착한 첫날부터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었다. 일주일 간 아동기관으로 봉사활동을 하러 간 적이 있었는데, 항상 봉사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는 가족단위로 노숙하는 사람들이 보였고, 아이들이 색연필로 그린 그림을 팔거나 멜로디언을 불면서 구걸을 하고 있었다. 하필 연휴기간 이서 관광객이 엄청 많았는데, 북적거리면서 축제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과 그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 대조가 되었다. 회사에서 잠깐 일했을 때는 학교에 가 있어야 할 아이들이 엄마와 같이 청소부로 일하고, 공장에서 기계를 조립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동인권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단순한 측은함과 연민이 아니라 이 나라는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건지, 정부는 뭘 하는지, 어떻게 해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건지 알고 싶었다.
한국에 돌아가기 몇 개월 전 마지막으로 지냈던 동네에선 시도 때도 없이 단수가 돼서 못 씻고 출근하는 경우도 있었고, 바퀴벌레가 들끓었고, 차가 없어서 걸어 다니면 안 되는 거리도 막 걸어 다녔다.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일들을 겪고, 내 상황이 힘드니까 다시는 멕시코에 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너무 힘들 것 같고 불평해야 할 것만 같은 상황인데도 멕시코 사람들은 매사에 긍정적이고 에너지가 넘쳤다. 확연하게 대조되는 빈부격차와 불평등에 마음이 불편하면서도 그들의 문화와 사람들이 주는 여유로움, 삶을 즐길 줄 아는 모습이 나를 매료시켰고 겸손해지게 했다.
멕시코에서의 경험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값진 자산이다. 대학원은 더 배우고 싶어서 온 거지만, 언젠가 세상에 쓸모 있는 사람의 0.0000001% 정도는 되고 싶다.
오이기
이번 주제를 보고 참 어려운 이야기라고 생각했어. 일단 내가 어떤 사람인지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잘 알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내 성격이나 성향에 대해서 내가 보는 나와 타인이 보는 나는 다를 수도 있고, 또 그중에 뭐가 옳은지도 요즘은 잘 모르겠더라고.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서 현재 내 직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는 왜 이 일을 하게 되었나 거슬러 올라가면서 생각해봤어.
나는 지금은 국제개발협력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왜 이 일을 선택하게 되었나 생각해보았어. 우리 중고등학생 때는 필수로 꼭 채워야 하는 봉사활동 시간이 있었잖아. 고등학생 때 봉사활동 시간을 채워야 해서, 1학년 가을에 한 호스피스 요양원에서 가게 되었어. 그런데 그곳에 있을 때 마음이 참 편하고 좋은 거야. 학생 때는 마음 붙일 곳이 별로 없었는데, 그곳에만 가면 차분해지고 평온해지고 참 행복했어. 그래서 고등학교 3학년 올라갈 때까지 매주 일요일에 그곳에 가게 되었어. 그 요양원은 천주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곳이어서 수녀님이 계셨거든. 아일랜드에서 오신 수녀님 두 분과 한국인 수습 수녀님 한 분. 아일랜드 수녀님들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16, 18살쯤 나이에 한국에 오셔서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국에서 봉사하면서 살아가고 계시는 거였어. 나도 그때 16살이었거든. 나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것만 같은데, 나와 같은 나이에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다는 게 놀랍기도 하고 뭔가 부끄럽기도 했어. 수녀님들의 생각과 삶이 참 멋있어서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아. 그때는 수녀가 되고 싶어서, 나 그때부터 성당에 다니고 교리 공부도 하고 세례도 받았잖아. 하하. 신을 믿지 않았는데, 신의 이름으로 신의 사랑으로 저렇게 희생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어쩌면 정말 신이 존재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결론적으로는 믿음이 생기지 않아서 포기했지만, 수녀님들처럼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나에게 남았던 것 같아. 그 이후로도 수많은 우연들이 있었고, 그걸 필연으로 받아들여 지금 내가 이곳에 이렇게 있는 것이겠지만, 이때가 나로 하여금 국제개발협력 분야를 꿈꾸게 만든 첫 기억이 아니었을까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