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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을 가꾸는 건축가 Jul 05. 2021

도면을 그리다

손도면, 2D CAD, 3D CAD의 변화


1997년, 지금으로부터 약 20여 년 전에 대학교 건축학과에 입학하고 처음 구입한 물건은 제도통과 삼각자, I자 그리고 로터링펜이다. 지금은 아주 가끔 쓸 일이 있을 뿐 쓸모가 없는 물건이다. 당시 1학년 건축학과 과목 중에 하나는 제도판 앞에 앉아서 유명한 건축가의 도면을 그대로 따라서 그리는 것이었다. 제도판에 I자와 삼각자를 이용해서 수평, 수직, 대각선 등을 그리는 작업으로 하나의 도면을 그리는데 며칠이 걸렸고, 상당히 고된 시간이었다. 더군다나 로터링펜으로 선의 두께를 조절하며 그리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었고, 한번 잘못 그리면 고치기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몇 년 사이에 건축학과의 모습은 완전히 바뀌었다. 제도수업이 있었지만, 컴퓨터가 보급되어 CAD로 설계를 하기 시작했다. 졸업을 하고 2003년에 첫 회사에 입사했을 때 아무도 제도판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컴퓨터로 도면을 그리고 있었다. 학교 다닐 때부터 컴퓨터로 도면을 그렸기 때문에 회사에 제도판이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몇 년 사이에 상당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제도판에서 컴퓨터로 바뀌는 사이에 나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변화에 민감하지 않았겠지만, 현업에서는 상당한 대변혁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2010년을 전후로 하여 또다시 변화의 시기가 왔다. 2D CAD에서 3D CAD로의 변화였다. 그러나 이 변화는 매우 속도가 느렸다. 프로그램이 비싸고, 구동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고가의 컴퓨터가 필요하였고, 2D CAD로도 충분히 작업의 속도가 빠르고 효율이 좋았기 때문에 완전하게 다른 시스템을 빠르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2D CAD에는 별도의 프로그래밍된 리습 등이 많이 있어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도면 작업을 할 수 있게 도와주고 있었다. 구글 플레이나 애플스토어의 앱처럼 CAD에도 개인들이 별개의 간단한 프로그래밍으로 원하는 기능을 추가할 수 있기 때문에 활용성은 계속 좋아지고 있었다. 지금 2020년에도 아직 그 변화의 속도는 느리다. 조달청에서 의무적으로 3D CAD로 납품을 받기로 한 일부의 프로젝트가 있기에 일부 사무소들에서는 약 10% 정도의 활용도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몇 개의 사무실들에서는 3D CAD로 더 많은 업무를 처리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보편적으로 보급되었다고 보기 힘들다.

설계사무실에서 CAD가 보급되는 사이 현장도 같이 변화하였다. 현장의 변화는 설계사무실보다 느렸다. 2005년까지도 A1의 청사진을 만들어서 봉고에 도면을 잔뜩 실어서 납품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지금 현장은 완전하게 달라졌다. A1청사진은 필요로 하지 않고, A3 도면과 CAD 파일을 전달하면 끝이다. 현장에서도 CAD로 시공 샵을 그려서 시공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일부 현장에서는 3D CAD를 활용하여 시공성을 높이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보편적이지는 않다.

세상의 변화는 빠르다. 2000년에 30대로 건축사사무소에서 마지막으로 손 도면을 그렸던 사람이 2020년에 50대가 되어서는 2D CAD를 넘어서 3D CAD로 작업을 해야 하는 시대로 가고 있다. 더 나아가 지금의 50대가 60~70까지 건축일을 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변화를 직면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제도판에서 컴퓨터로 변하던 시기의 나의 책상


이제 건축사 시험도 컴퓨터로


현재 건축 현업에서는 3D CAD의 시대로 가고 있는 상황에 건축사 시험은 아직도 손으로 시험을 보고 있다. 지금도 건축사 시험을 손으로 그린다고 하면 놀랄 일이다. 현업에서는 CAD로 일을 하다가 건축사 시험을 볼 때가 되면 제도판, 삼각자, 연필 등 제도 도구를 갖추어야 한다. 건축사 시험이 끝나면 모든 제도 도구는 필요 없게 된다.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다. 지금은 손으로 도면을 그려본 기억조차도 없는 사람이 건축사 시험만을 위해서 손 도면을 배워야 하는 시기다. 그러나 다행히도 2027년 건축사 시험부터 컴퓨터로 보기로 결정을 했다고 한다. 2027년이다. 몇 년 남지 않았다. 대한민국에서 제도판이 완전히 사라지는 시기일 것이다. 현업에서 손으로 도면을 그리지 않은지 거의 2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이제 바뀐 것은 너무 느리고 시대착오적인 상황인데, 지금이라도 바뀐 것이 다행이다.   

   

군대에서 손으로 계산하다


나는 군대에서 포사격을 위한 계산병이었다. 적진지에 포사격을 위해서 포의 각도와 방향을 계산하는 업무를 하였다. 이 업무는 두 가지 방식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하나는 노트북보다 조금 큰 전용 컴퓨터로 하는 방식과 제도판과 유사한 격자 모눈종이 위에 각도자와 길이자로 거리를 계산하고 전용 계산 종이 양식에 숫자들을 채워나가면서 결과를 도출하는 방식이었다.

비교하자면 전자는 2D CAD이고 후자는 손 도면이다. 군대에서 유사한 논란이 있었다. 컴퓨터로 계산하면 되는데, 꼭 작도 도구와 연필과 종이를 사용한 계산을 병행해야 할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군대는 전쟁 중에 컴퓨터가 안 될 수도 있고, 파괴될 수도 있기 때문에 손으로 하는 것을 병행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원칙이었다. 군대는 정해진 방식을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조직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는 2가지 방식을 병행하는 것이 이해가 됐다.

손으로 도면을 그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손 도면을 그렸을 때 숙련도가 높고 디테일 등 이해도가 높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회사 초년병 시절에 사수로부터 디테일을 손으로 그려서 내라는 숙제를 받은 적이 있다. 그때 손으로 그려본 경험이 많이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손과 컴퓨터를 병행했던 시대 사람들의 의견일 수 있다. 손도면의 기억이나 연습이 전혀 없었던 사람은 컴퓨터로 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 속에서 나름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 맞다고 본다. 어릴 때부터 아이패드를 가지고 손으로 터치하던 시대의 사람들에게 지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방식을 고집하는 것이 맞을까.   

  

학교에서 손도면 교육 괜찮은가


일부 대학교 건축과에서는 아직도 손도면 교육을 하는 곳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맞는가. 이전까지는 건축사 시험을 손으로 그리기 때문에 손도면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손도면 교육과 건축사 시험의 상관관계가 100%라고 말하기에는 과한 면이 있지만, 마지막 남은 당위성조차 없어졌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도면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최근 건축과에서는 상당히 과도한 교육을 하고 있다. 손으로 도면 그리는 수업, 손으로 스케치하는 수업, 2D CAD 수업, 3D CAD 수업, 3D 모델링 프로그램 수업 등 너무 많은 수업을 하고 있다. 그들에게 이렇게 많은 것을 동시에 가르쳐주는 것이 맞는가. 이전 시대의 건축과에서는 손으로 하는 것만 가르쳤을 것인데,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수업의 양은 많아지고 학생들이 배워야 하는 프로그램도 많아진다.

현업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손으로 도면 업무를 하던 곳에서 2D CAD로 도면을 그리고, 이제는 3D CAD까지 하는 상황이 되었다. 시대가 변하고 있으니, 건축도면을 그리는 도구가 발전하는 것에 맞추어서 현장도 변해야 하는 상황은 맞다.

손에서 2D, 3D로 계속 변하고 있지만, 도면의 기본 속성은 변하고 있지 않다. 평면, 단면, 입면의 구성은 그대로이다. 도면은 건축물을 실제로 시공하기 전에 가상의 세계에 건축물을 올려보는 것이고, 그 결과물을 2D 또는 3D로 만들어서 시공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건축물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와 생각을 모아서 건축가는 도면을 만들고, 그것을 시공자에게 전달하여 처음의 의도와 생각대로 결과물이 나오게 만드는 기본적인 과정 속에 도면은 존재한다.

그 도면을 어떤 방식으로 하던지 상관없을 수 있다. 서로 의사소통의 도구이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원활하면 도면의 존재는 그것으로 끝이다. 도면을 어떤 방식으로 그려서 전달하는지 상관은 없고, 전달만 잘되면 된다. 학교에서의 도면 수업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면의 근본에 집중하자.


손으로 도면을 그리는 것이 맞나 틀리냐를 논의한다는 것은 얕은 논란일 수 있다. 의뢰인의 의견을 도면을 통해서 시공자에게 전달하는 것이 건축가의 역할이라면, 도면을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 그리는 것은 건축가의 판단에 따르면 되는 것이다. 손, 2D CAD, 3D CAD 등 어떤 프로그램이어도 상관없다. 어떤 것이 가장 적합한지,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지에 따라서 도구를 선정하고 그 도구로 도면을 그리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도구에 능숙해야 한다는 결론인데, 그것도 참 어려운 일이다.

지금의 변화를 더 예리하게 들여다보면 손으로 도면을 그리는 능력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고, 이 다음의 2D, 3D의 문제는 프로그램의 문제이다. 프로그램은 계속 변하는 것이고, 프로그램의 인터페이스 또한 계속 발전되어 더욱 쉬워지고 있는 추세이다. 그리고 지금 교육을 받은 학생이 몇 년 후에 전문가로 활동을 하는 시기에 또 어떤 프로그램이 나올지 알 수 없다. 계속 변하고 발전하기 때문에 도면의 근본에 집중하며 변화를 적극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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