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rbour매장의 면접은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설립년도를 잘못 말한 것과 면접날 농구화를 신은 것 트렌디한 옷을 입은 것이 걸렸다. barbour는 아주 클래식한 브랜드이기 때문에 이 요소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리고 데상트의 매니저에게 연락이 왔고, 보스와 면접 날이 잡혔다. 데상트의 면접날 오스퍼드역의 카나비스트리트로 향했다. 매장에 들어서자 나를 인터뷰했던 매니저가 다시 인터뷰했던 직원들만의 공간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곳에는 그을린 피부의 깡마을 여자가 않아있었다. 그녀는 한국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어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처음부터 인터뷰가 끝날 때까지 영어로 대화를 했다.
그녀는 인터뷰에서 이전에 매니저와 인터뷰를 봤을 때에 매니저가 나에게 했던 질문은 대부분 똑같이 했다. 나는 더욱 쉽게 대답할 수 있었고 그녀는 일주일 동안 함께 일을 해보고 결정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데상트에서 일주일 동안 일을 하게 되었다.
데상트에서 일하면서 브랜드의 역사와 상품들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데상트는 같은 브랜드로 일본과 한국 각각 다른 회사로 운영되고 이있었다. 프로 스키선수 팀을 후원하면서 성장했다고 했다. 내가 일하게 된 매장은 한국 데상트에서 유럽 마켓에 대한 수요를 실험하기 위해서 오픈했다고 했다. 영국에 몇 년을 살면서 데상트가 있는지는 몰랐었다.
매장의 한국인 보스도 한국 데상트에서 영국으로 파견된듯했다. 일을 시작하면서 매장의 에이스로 보이는 백인 남자와 일하는 동안 같이 다니며 브랜드와 일하는 것에 대해 숙지하는 기회를 주었다. 한국 여자도 스테프로 일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시간 때가 맞지 않아서 만나는 기회는 없었다.
백인 남자는 상품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상품에 대해 숙지해야 손님들이 왔을 때 잘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품들은 모두 하이테크 기술이 접목된 것들이 많았다. 방수는 기본이고 패딩 겉면에 방수테이프로 길을 만들어 수분이 잘 떨어지도록 디자인된 디테일도 이있었다. 아름다운 빛깔의 연한 하늘색 패딩은 걸어만 노아도 예뻤다. 이 패딩을 매장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 쪽으로 잘 보이게 걸어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패딩을 보고 매장으로 들오 올 수 있도록 미끼 상품으로 디스플레이 해노았다. 이 방법은 나중에 한국에서 회사에 입사하였을 때 추천 하기도 했다.
보스는 동양인들이 매장사진을 찍으면 경계하라고 말했다. 중국인들이 레퍼런스로 사용하려고 매장과 상품 사진을 종종 찍어간다고 했다. 데상트는 나름 스포츠웨어시장에서 성공한 사례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매장의 대부분의 직원들은 에이스 백인 남자아이와는 다르게 매장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것보다는 창고에서 재고 정리를 하는 것을 선호하였다. 나는 매장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기 대문에 매장에서의 일과 창고에서의 일을 번갈아 하면서 스테프들에게 일을 곧잘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한국인 보스도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한 것 같았다. 하지만 끝까지 한국말로 대화를 하지는 않았다.
일주일이 끝나고 계속일해도 좋다고 했다. 마지막날 나의 근무 날짜가 정해지지 않았으니 다음 주 월요일에 전화를 해서 확인하고 나오라고 했다. 나는 알았다고 했다. 월요일 날짜 체크를 하기 위해 전화를 하려 했지만 마침 그때 스마트폰이 먹통이 되었다. 그리고 석사 과정의 학업 스케줄은 엄청 바빠졌다.
나는 영국생활 동안 저렴한 중고 아이폰5를 사용했다. 스마트폰이 고장 나면 애플매장에서 돈을 더 주고 새것으로 교환을 하던가, 캠든의 중고 전자기기 숍에서 똑같은 모델을 사서 사용하였다. 중고기기에다가 용량도 적어서 이 스마프폰은 문재가 많았다. 데상트 매장에 연락을 할 수 없었다. 나중에 보스에게 연락이 와서 나오지 말라고 했다. 그때 나는 오래일해서 질린 유니클로를 떠나 새로운 경험을 하는것 보다는 당장의 석사과정이 더 중요 했던것 같다. 새로운 기회 였지만 그곳에서 일할수 없어도 그리 섭섭한 마음 들지 않았다.
공부를 하는 동안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유니클로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유니클로는 나를 반겨주었다. 이전에 유니클로에서 같이 일했던 친구들이 이직도 일하고 있었다. 그중 일본에서 온 아유미에게 연락을 해서 자리가 있냐고 물어보았다. 다행히도 내가 이전에 일했던 alteration(바지 기장 수선) 업무에 자리가 있다고 했다.
아유미가 매니저에게 내가 이전에 alteration 업무를 잘했다고 했고, 나는 다시 유니클로로 돌아갈 수 있었다. 실제로 내가 유니클로에서 근무할 때 수선을 엄청 빠르게 해서 밀리는 날이 없었었다. 오히려 시간이 남아돌아 여유를 부리다가 매니저에게 핀잔을 듣기도 했다. 그 후 에는 속도를 조절하며 업무를 끝냈다.
alteration룸에는 미싱이 있고 다리미도 있었다. 패션을 공부하던 학교의 풍경과 흡사했다. alteration은 나와 일본인 아주머니가 로테이션을으로 근무를 했다. 일본인 아주머니는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여 영국에 정착했다고 들었다. 우리는 시간이 겹치는 날이 있으면 소소한 대화를 하곤했다.
그 아주머니는 일본에 있을 때 "문화복장학원"을 다녔는데 동문 중에는 언더커버를 설립한 준타카시와 함께 공부했다고 했다. 준타카시는 학교에서는 조용한 남자아이 었다고 했다. 먼 일본의 유명 패션디자이너를 유니클로에서 일하는 일본인에게 들으니 신기했다. 영국을 여러면으로 내가 공부하는 패션을 일상에서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아무튼 나는 돌고 돌아 다시 유니클로로 돌아오게 되었다. 미싱을 다루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게다가 학업에 보탬이 되는 생활비를 벌수 있었고, 전 세계에서 온 친구들도 만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