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답: 너와 나의 시간을 넘어,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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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차가운 손이었다. 자신의 볼을 쓸어주며 눈물을 닦아주는 그 다정한 손은 차갑기만 했다. 똑바로 시선을 마주한 채, 더는 함께 할 수 없는 미래를 말하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원우의 눈은 여전히 자신을 향해 있었고, 그의 시선을 피하려고 할수록 더 깊게 파고들어 도저히 입을 뗄 수 없었다. 그가 버릴 수 없는 것은 반지만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기쁘다고 느낀 자신이 뻔뻔할 뿐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재희는 자신의 몸을 당겨 안아주던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느린 화면처럼 다시 떠올렸다. 따뜻한 그의 품 안에서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을 때도, 눈동자 속 작은 일렁임과 낮은 목소리도…. 하나하나 각인이 된 것처럼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미쳤어, 윤재희.”
작게 중얼거리던 재희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렸다가 곧 다시 내렸다.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아, 깜깜한 창 밖을 바라보았다. 하얀 달이 조그맣게 보였고, 달빛은 밤의 풍경을 그려내었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침대 옆에 두었던 가방 속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제인이 자신에게 남겨주었던 편지를 꺼냈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사랑’을 하라, 그렇게 말했던 제인의 편지를 읽다가 자신이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원우를…, 자신이 원우를….
편지를 손에 든 채 한 참을 있던 재희는 침대에 동그랗게 몸을 말며 다시 누웠다. 정리되지 못한 자신의 마음들이 혹시라도 어느 틈에 흘러나와 원우에게 전해질까 봐 두려운 밤이었다.
눈을 감았다가 뜨기를 여러 번 반복하던 재희는 갑자기 자신의 눈앞에 아주 크고 밝은 달이 있는 것을 보고는 조용히 말했다.
“내가 좋아해도 될까….”
“…, 응.”
그러자 밝은 달이 대답을 해 주었다.
“사실은 고민할 필요가 없어….”
“왜?”
“이미 많이 좋아하고…, 사랑하니까.”
“뭐가 그렇게 두려워?”
“내가…, 그 사람을 다치게 하고 아프게 할까 봐.”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밝은 달은 어느새 원우의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재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대답했다.
“내가 좋아한 사람들은 결국…, 죽거나 아프거나 아니면 불행해지니까.”
“그건 너 때문이 아니야.”
“정말, 그럴까?”
“누구에게나 정해진 삶이 있고, 삶 속에는 예상할 수 없는 불행도 죽음도 언제든 올 수 있는 거야.”
“그렇구나.”
“바보네. 정말 그런 것 때문에 무서웠던 거야?”
“넌 몰라. 그건 너무 무서운 일이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 때문에 다치고 불행하고, 죽는 건….”
차가운 달의 손은 재희의 볼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이제 그런 이유로 도망치지 마.”
“……, 응.”
“만약에 네가 또 도망치면, 그때는 내가 너를 다시 찾을게.”
다정한 달의 위로에 재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다행이야. 오늘 달이 참 밝아서….”
“응. 오늘 달이 참…, 밝다.”
자신의 말에 답해주는 달의 속삭임이 원우의 목소리 같았다. 이마에 닿는 입술의 촉감, 제 곁에 한참이나 머물다 천천히 사라지던 온기까지 모두 원우 일리 없었지만, 꿈이라면 정말 좋은 꿈을 꾼 거라고 생각했다.
새벽달이 지고 난 후, 해가 밝아 눈을 떴다. 재희는 자신의 침대 옆 작은 테이블 위에 두었던 반지 상자가 사라진 것을 알았다. 사라진 반지 대신 쪽지가 있었다. 쪽지에는 협박을 가장한 부탁이 쓰여있었다.
‘네가 찾으러 오지 않으면 이번에는 정말 버릴 거야. 그러니까, 꼭 찾으러 와줘’
재희는 지난밤 보았던 달의 얼굴이 꿈이 아니라 정말 원우였을까, 잠시 생각했다.
기어이 자신의 꿈에 들어와 속마음을 들어버린 원우의 얼굴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매정하게 내치지 못하고, 몇 번이고 준비했던 그 말들을 하지 못한 것은 앞으로의 원우에게 어떤 미래를 안겨주게 되는 걸까. 자신의 괜한 감정들 때문에 정리할 수 있었던 모든 것들이 또다시 엉망이 되는 건 아닐까….
“하아….”
재희는 제인의 편지 속 세상에서 가장 쉬운 그 ‘사랑’이 자신에게만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다시 원우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기대감이 드는 뻔뻔한 자신의 속내에 실소를 머금었다.
이리도 좋아하는 마음이라니, 뭘 해도 어쩔 수 없는 감정이라니.
뻔뻔한, 파렴치한, 염치도 없는…,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좋으니 이번에는 먼저 도망가고 싶지 않아 졌다. 혹시라도 버려야 하는 마음이라면 자신이 버려야 한다. 원우의 손에 그런 것 까지 맡길 수는 없다.
핑계 아닌 핑계를 대면서 재희는 쪽지 아래에 적혀 있는 원우의 개인 전화번호와 원우가 속한 그룹의 앨범을 발견했다. 그리고 앨범 표지의 트랙 번호에 펜으로 표시가 된 것을 보았다.
천천히 넘겨 보던 앨범은 곡이 제법 많았다. 멤버들 모두가 재능이 넘쳐서 작사와 작곡, 프로듀싱까지 스스로 하는 그룹이라고 안젤로가 칭찬하던 것이 떠올랐다.
표시된 트랙에는 작사가의 이름에 ‘원우’만 기재되어 있었다. 어떤 음악인지는 들을 수 없었지만, 재희는 쓰인 가사를 몇 줄 읽지 않고서 저도 모르게 자신의 입을 천천히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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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알아?
사랑일 줄 알았던 모든 기억이
남겨지면 슬픔이 된다는 사실
남겨진 줄 알았던 모든 슬픔이
더 채워지면 그리움이 된다는 것까지
너는 그런 모든 사실을 알려주고 떠났어
남겨진 줄 몰랐던 난 그대로 슬픔이 되고
채워질 줄 모르는 그리움은 더 애타게 널 찾아
사랑은 아직 있는 거라고 나를 속이고 또 속여
그거 알아?
그때 넌 내 삶의 일부였는데
지금 넌 내 삶의 바닥이네
그 바닥을 여전히 헤매고 있는 난
영원히 이곳에서 머물 것만 같아
두려워 헤매고 헤매도 못 찾을까
무서워 내 삶이 영원히 이곳 일까
두려워 아직도 넌 내 삶의 전부 일까
무서워 여전히 넌 어디에도 없을까
그거 알아? 그걸 몰라, 너는 몰라….
매일의 그리움도 내일의 기다림도 너는 몰라
이런 내 마음이 사랑이라는 것도 너는 몰라
그런 네가 어디쯤인지 몰라 이렇게 난 여기에 있어
그런 네가 올지도 몰라 오늘도 난 거기에 있어
그거 알아? 너는 몰라….
너는 알아? 그건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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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씩 써내려 갔던 언젠가의 마음, 수신인은 없이 오로지 발신인만 있던 그 감정들은 드디어 오늘에서야 제대로 전달되었다.
매일의 기다림과 그리움, 그리고 두려움까지. 너만 그러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모든 시간은 이어져 있었고, 이어진 시간 속에는 여전히 서로가 있었다.
높은 하늘로 날아올라 도망치던 그날, 반대로 끝도 없이 추락하던 사랑은 이제야 겨우 다시 피어올라 겨울의 눈꽃처럼 어느 사이 나뭇가지에 사뿐하게 매달려 있는 듯했다.
재희는 창밖의 겨울새가 지저귀다가 사라질 때쯤, 겨우 마음을 추슬렀다.
이 겨울이 가기 전, 원우를 다시 한번 볼 수 있다. 이제 재희에게는 그 사실만이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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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은 늘 서늘한 온도에 가까운 편이었다. 조명과 사람들의 열기, 그것과 거리가 먼 공간만 헤매며 살던 재희는 처음 본 라이브 공연장의 분위기에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음악이 있더라도 흥겨움 정도에서 그치는 그런 정적인 공간과는 사뭇 달랐다. 공연장 앞에서부터 이미 시작된 축제 같은 분위기와 떠들썩함이 재희는 조금 낯설게 느껴졌고, 익숙하지 않은 세계로 처음 들어서는 이세계인 혹은 초대받지 않은 이방인 같았다.
혜숙과 현우도 이미 한국에서 공연을 봤던 경험이 있었지만, 일본까지 공연 관람을 하러 온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초대된 가족들은 관계자를 따라서 따로 마련된 공간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었는데, 지나면서 본 일본에서 가장 큰 공연장 앞은 이미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전에 원우 몰래 찾아갔던 소극장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 재희가 긴장한 것처럼 보이자 혜숙은 손을 다독이며 웃어주었다.
“오랜만이에요!”
“그러게요. 이사하고 난 다음에는 서울에 갈 일이 많이 없어서.”
“이렇게라도 보는 게 어디예요. 우리 애들 덕분에.”
“맞아요. 여행 계획도 세워 오신 거죠?”
“우린 오늘 공연만 보고 내일 가야 해서….”
“어머, 어떡해.”
혜숙과 현우가 그룹 멤버들의 다른 가족들과 반갑게 인사를 하는 동안 재희는 인형처럼 웃으며 옆에 있었다. 역시 낯선 시간과 공간은 영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익숙한듯한 표정과 말투,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자연스러운 척도 제법 잘한다고 여겼는데, 아무래도 여전히 아닌 모양이다.
공연 준비를 위해 가족들과의 만남은 공연 후에나 가능하다고 했다. 꼭 필요한 조명 외에는 무대 위 전광판의 VCR만 반복적으로 나왔다. 지정된 좌석으로 안내받은 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공연이 시작되었다.
“오프닝 공연이 제일 멋있더라.”
“그래요?”
“응, 다 멋있지만.”
“네.”
“남의 아들은 잘 안 보이지. 우리 아들만 보여. 어둡고 인원도 많은데, 귀신같이 잘 찾게 된다니까.”
현우와 혜숙의 이야기에 조금 긴장이 풀렸다. 둘 사이의 대화에 끼여서 이렇게 함께 웃고 있으니, 가족들에게 친척동생이라고 소개했던 그 말이 거짓말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원우 어디서 등장하는지 잘 봐. 나도 이번 공연은 처음이라 잘 모르겠다.”
“다 같이 등장하지 않아요?”
“그럴 수도 있는데, 아닌 적도 있어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것 같은 영상과 함께 음악이 바뀌었다. 어두운 무대 위 장막이 하나씩 드리워지고 저마다 다른 실루엣이 커지다가 점점 다시 작아지더니 드디어 첫 곡이 흘러나왔다. 이미 오랜 시간 다져진 팬덤과 가수의 공연은 이런 것이구나, 싶을 정도로 재희는 소름이 살짝 돋았다.
“소리 질러!”
원우 외에 익숙한 목소리는 분명히 시호였다. VCR에 나오는 장면마다 열정적인 표정과 몸짓은 여전했다. 아니, 예전보다 더 힘이 실려있었다.
재희는 귀가 적응하는 시간이 지나고 나자, 공연을 즐기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유기적인 관계, 서로가 서로에게 일방적인 무언가를 쏟아붓는 것 같기도 했지만, 자세히 보면 소통하고 느끼는 것이 보였다. 음악이 바뀔 때마다 무대 위의 조명과 함께 팬들이 들고 있던 응원봉마저 함께 변했다.
지금 무대 위에서 모두를 보고 있는 원우는 어떤 마음일까. 오롯이 자신들만을 위해 만들어진 이런 장면들을 한번 보고 나면 다시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무대 위를 즐기고 있는 원우의 얼굴이 그것을 증명하듯이 너무나도 좋아 보였다.
좋아하는 일이라서, 꼭 하고 싶은 일이라고 했던 그 말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렇게 좋아하던 일, 꼭 하고 싶었던 꿈을 자신을 붙잡기 위해 그만두려고 했던 것도….
“다행이네….”
떠난 순간을 후회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만큼 많은 날들을 그리워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럼에도 떠날 수 있었던 그 순간의 자신을 돌아본다면 칭찬해주고 싶다.
이렇게 멋진 지금의 원우를 볼 수 있게 해 줘서….
재희는 문득 캔버스에 그림을 그릴 때 자신의 감정이 그리워졌다. 한국에 온 뒤로 한 번도 그린적 없었던 것은 공허하지 않아서 라고 생각했는데, 왜일까.
아무것도 없던 공간 안을 점과 선과 면으로 채우고, 혹은 마음이 가는 방향으로 덧칠하며 색을 바꿔 나가던 자신의 손이 떠올랐다. 한 동안 캔버스 앞에 있던 자신을 보더니 제인이 웃었던 어느 날도 떠올랐다. 왜 웃느냐고 물었을 때, 제인이 말했다.
“웃겨서.”
“뭐가?”
“엄청 싫은 표정을 하고 열심히 그리고 있으니까.”
“내가? 싫은 표정이라고?”
“좋아하는 표정은 절대로 아니야.”
“…….”
“아가, 하고 싶을 때 해. 좋아서든, 그리워서든, 허전해서든…, 하고 싶을 때 말이야. 그렇게 숙제하듯 하지 말고.”
아, 그런 거였구나. 이런 뜻이었네.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그래서 즐거워지는 거.
재희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무대 위의 원우가 다른 멤버들과 장난치고 웃으며 즐겁게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웃고 있는 것을 알았다. 누군가의 즐거움이 자신마저 즐거울 수 있는 일이라니. 얼마나 놀라운 감정인가. 응원봉이 동기화되듯 지금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의 감정이 무대 위의 그들과 동기화된 것 같았다.
“아직 지친 거 아니죠? 우리 앙코르 엄청 긴 거 알죠?!”
“우리 부모님들이 앙코르 긴 거 안 좋아하시는데, 오늘은 다를 거라고 믿어요. 네?!”
3시간이 넘어가는 동안에도 지치지도 않고 무대 위를 휘젓고 있는 그들의 열정에 부모님들은 이미 살짝 지친 것 같이 보였지만, 공연은 끝날 듯 끝나지 않은 채 한 참 더 진행되었다.
결국 모든 공연이 끝나고, 가족들이 멤버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 시끌벅적하면서도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마주친 시선, 재희는 땀에 젖어있는 원우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보기 좋았다.
“왔네?”
“응. 잘 봤어.”
“고마워.”
“…….”
“…….”
“너무 잘하더라….”
찾으러 와 달라던 원우가 남긴 그 쪽지 이야기는 꺼낼 수 없었다. 그냥 담담하게 초대받은 먼 친척의 역할을 하고 있으니 앞으로의 두 사람의 관계도 모든 주변인들에게 이렇게 보여야 할 것 같아 조금 슬퍼졌다. 혜숙과 현우 사이에서 원우를 앞에 두고 있으니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재희 맞지?”
“시호지? 오랜만이네. 오늘 공연 너무 멋있더라.”
“당연하지. 그때 말했잖아.”
“맞아, 그랬지. 나도 진짜 그럴 거라고 믿었어.”
원우와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난 시호는 몇 년 만에 만난 재희의 모습에 반가움이 가득했다.
“그거 나 주는 거야? 와!”
“아, 맞다. 이거…, 공연은 처음 오는 거라서 뭘 준비해야 할지 몰라서.”
준비해 두었던 자그마한 꽃다발을 시호에게 얼떨결에 내밀고 나서 뭔가 잘못된 것 같다고 느꼈지만…, 이미 늦었다. 재희의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고 난 뒤 원우의 표정이 조금 경직되는 것 같았지만, 꽃다발은 이미 시호의 손에 있었다.
“오늘 시호 부모님은 못 오셨지?”
“네. 마지막 공연 날 오시기로 했어요.”
“그럼 오늘은 우리랑 같이 식사하러 가면 되겠다.”
“그래, 그러자.”
“오늘 저 데리고 가려는 분들이 많아서 번호표 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우리가 1번 해. 원우랑 제일 친하잖아.”
“그건 그래요. 원우는 아닌 것 같지만, 어머니랑 친하니까.”
친아들보다 더 친아들처럼 행동하는 시호의 행동에 원우가 혼자 팔짱만 낀 채 관망하고 있으니, 시호는 그걸 더 즐기는 듯 혜숙의 팔짱을 껴버린다. 여전히 눈꼬리가 살짝 위로 휘어지게 웃던 시호가 문득 생각난 듯 재희에게 말했다.
“내가 같이 가도 안 불편하지?”
“어? 난 안 불편하지.”
“그럼 갈래. 갈게요, 어머니.”
“어머, 시호랑 재희가 친하구나. 둘이 연락해?”
“아니요. 연락은 한 번도 못했어요. 연락처도 없고. 그래서…, 이번에 받으려고요.”
혜숙의 말에 갑자기 생각난 듯 시호가 재희를 보며 웃음기를 걷고 그런다.
“나 너랑 이제 연락하고 싶은데, 연락처 좀 줄 수 있어?”
“어, 아….”
시호의 웃고 있는 입꼬리와 휘어진 눈꼬리와는 달리 눈빛은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재희는 저도 모르게 원우에게 시선을 보냈지만, 그는 이미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이미 꽃다발부터 잘 못 된 것 같은데…, 여기서 연락처를 안 주는 것도 이상하다.
“당연하지.”
“정말?”
재희의 휴대폰으로 자신에게 전화를 건 시호는 제 번호도 야무지게 저장하고 다시 돌려주었다. 이따가 보자며 뛰어가는 시호의 뒷모습을 보다가 재희는 어느새 낯선 곳에서의 긴장감보다 편안함을 느끼게 된 자신을 발견했다. 다시 예전의 그 언제 적으로 돌아간 것 같다.
소소한 감정에 연연하고, 순간순간 상대방의 기분을 살피면서도…, 한 편으로는 놀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드는 것은 뭘까.
다시 예전으로는 절대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믿었는데. 이렇게 쉽게 돌아갈 수 도 있는 거구나.
하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저 바닥 어딘가에 남겨두고 묻어둔 감정이었을 뿐이니까. 버리기 위해 찾으러 왔다 핑계를 댔지만, 정말 버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너무나 자연스러운 감정.
쉬우면서도 너무나 어려워서 무겁기만 한 이 모든 마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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