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고, 바라다.
20161211
나는 누군가의 마음으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때 당시에는 나와 같은 얼굴의 친구들이 많았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나를 보며 누군가는 기쁨이라고 말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기다림이라고 말했습니다. 간혹 또 다른 누군가는 나를 고문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그렇게 나와 친구들은 많은 사람들의 생활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먼 바닷가에 사는 어머니가 보내주던 손 때 묻은 반찬통,
좁디좁은 고시원 방 안,
새벽녘 잠을 이기고 아르바이트를 나가던 그 발걸음,
하루하루 시간을 이기며 풀어내던 문제집,
덜 팔린 노점상의 과일,
퇴직을 앞둔 아빠의 낡은 구두,
땀내 나는 지하철 안의 공기,
마른하늘을 보며 비를 기다리는 과실,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의 기다림,
매일 계속되는 고통에 몸부림치던 병원의 이불,
사랑했던 사람과 이별의 순간,
내일을 기다리며 잠이 드는 꿈 꾸는 베개,
많은 이들이 생(生)을 맞이하고 사(死)를 다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그러던 어느 날. 우리가 자리를 잡고 살았던 그 모든 것들은 분명 그대로인데도 우리는 하나둘씩 사라져 갔습니다.
아마 저의 시작은 좁은 고시원 안에서 컵라면을 먹던 남자의 ‘체념’부터였을 겁니다. 많지 않은 알약을 먹고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고시원에 불을 지르고, 그래도 결국 살아서 병원에 실려 가면서도 남자는 더 이상 저를 떠올리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는 불어오는 바람에 아주 가볍게 나부껴 날아올랐고,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예전에 커다란 배가 바다에 가라앉았을 때. 나의 친구들도 많은 사람들과 함께 바다로 가 결국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날아오른 이곳에도 저와 같았던 얼굴의 친구들이 있지만,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모두 작아진 몸으로 어딘가에 급히 숨거나, 아니면 기력을 다해 긴 잠에 빠져버린 친구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잊은 채 고시원의 남자처럼 ‘체념’을 가까이 하기 시작했습니다. ‘체념’은 너무나 처연한 얼굴을 하고 아무런 힘도 없지만, 그 딱딱한 몸을 사람에게 한 없이 기대어 무겁게 짓누릅니다. 점점 늘어가던 ‘체념’, 그만큼 줄어가는 나와 친구들.
시간은 흐르고, 이윽고 그렇게 커져버린 ‘체념’은 ‘포기’, ‘미움’과 함께 하기 시작합니다. ‘미움’은 ‘증오’로 자랍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우리가 친하게 지내던 모든 것들을 잊어버립니다. 우리가 얼굴을 비비며 가끔 반갑게 만나던 친구는 ‘행복’이었습니다. 또 ‘상냥함’, ‘선의’, ‘순수’,……등등. 그 모든 동그란 얼굴에 보드라운 몸의 친구들은 더 이상 찾기가 힘들어졌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그들을 얼싸안을 수 없습니다.
이제 이곳에는 남의 ‘체념’에 전염되고, ‘포기’는 상식이 되어버린 사람들만 가득 있습니다. ‘미움’을 먹고사는 ‘증오’만 가득합니다. 우리가 설 자리는 전혀 없어 보입니다. 그다음에 모습을 보일 것은, 아마도….
‘절망’
우리가 가장 멀리하는 그 얼굴을 볼 생각을 하니 몸은 끝없이 떨리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죽음이나 마찬가지니까요. 나는 결국 바람에 나부끼던 가벼운 몸을 잠시 누입니다. 더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제 나도 바다로 가버린 나의 친구들처럼 이 추운 겨울 어두운 소나무 한 그루 밑에서 결국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겨울, 예전에는 밝은 조명등에 기대어 어린아이들의 순수한 웃음과 서로에게 나누는 온정과 내년에 대한 기대감으로 많은 힘을 얻을 수 있었겠지만, 이제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더 이상 이곳에…, 사람들의 곁에 있을 수 없다 생각하며 눈을 감았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요.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눈을 뜹니다. 수많은 내가 허공을 날아다닙니다. 나와 같은 얼굴을 한 친구들은 어딘가로 모여들어서 한 덩어리를 이룹니다. 내 몸이 나도 모르게 떠올라, 친구들과 함께 자리 잡은 그곳. 너무 밝은 불빛들이 갑작스럽게 내 얼굴에 다가와서 나는 큰 불이 난 줄 알았습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작은 촛불, 수 백 만개의 촛불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향한 길고 긴 외침. 내가 조금 전에 있었던 어둡고 불이 꺼진 그 장소를 향하여 사람들은 한 마음으로 목소리를 냈고, 왠지 모르겠지만 나는 더욱 힘을 얻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는 여전히 ‘미움’, ‘증오’ 등이 남아 있었지만, 그 보다 더 많은 다른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알던 얼굴은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그곳에 있어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습니다. 튼튼하고 단정한 그 얼굴들을 들여다보니 그것은 ‘반성’, ‘깨달음’, ‘미안함’, ‘정의’, ‘기대’, ‘고마움’ ……, 그리고 ‘나’였습니다.
아이의 손을 붙잡고 온 어른들과 머리가 반백인 할아버지, 문제집을 들고 나온 학생들, 말투가 다른 서로가 모두 한 목소리로 외치는 순간. 나는 크게 몸을 부풀리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더 많은 친구들이 잠에서 깨어 여기저기서 날아오릅니다. 새롭게 태어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앞으로 나아갈 그곳에 이미 가 있을 것입니다. 한 걸음, 두 걸음 조금 더 앞서서 사람들의 자리에 항상 있을 것이고, 그곳에서 나를 발견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무척 밝을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로 둥실둥실 떠다니는 커다란 고래 풍선. 나 또한 깊은 바다의 고래처럼 다시 한번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 위로 헤엄치듯이 높이 날아오릅니다.
나는…,
당신의 ‘희망’입니다.
-
당신과 내가 바라고 바라면 이루어지던, 어느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