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님: ‘가족’으로 부터
원우는 연습실에서 나오자마자 발걸음이 빨라지더니, 버스에서 내려 집 앞까지 뛰다시피 도착했다. 하지만 현관문을 열기 전에는 숨을 고른다.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들키기 싫어 괜히 현관문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잠시 후 문을 열었다.
집안 가득 손님을 맞이하는 혜숙의 바쁨이 느껴졌다. 오늘은 가게도 일찍 마치고 온 모양이다.
“왔니? 재희가 연락처도 잃어버렸다는데 너를 용케도 찾아갔다, 정말.”
원우의 연습실에서 혜숙의 가게까지 택시에 태워 보내면서도 불안했지만, 무사히 잘 찾아간 모양이다. 어쨌든 지금은 이 곳에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큰 짐도 하나도 없이 저렇게 왔던데.”
“어디 있어요?”
“서재에 있어. 누구랑 통화하더라. 도착했으니까, 제인한테 알리는 거겠지.”
뭔가를 올려뒀는지 주방으로 바쁘게 가는 혜숙의 뒷모습을 보다가 원우는 자신의 방 앞에 있는 서재로 향했다. 노크를 하려다가 열린 문틈으로 누군가와 통화하는 재희의 뒷모습이 보이자 그대로 서 있었다. 영어로 나누는 대화는 여전히 낯설었고, 또 무미건조한 톤의 목소리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이윽고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몇 마디 대화가 더 이어지고 웃음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흘렀다.
통화가 끝나고도 한 참을 그 자리에 서 있더니 천천히 책장을 눈으로 훑어본다. 이윽고 시선을 돌리다가 원우를 발견하고도 놀라지 않는다.
“현우 씨 서재는 변함이 없네.”
“그렇지 뭐.”
“남의 통화는 엿들으면 안 되는거 몰라?”
“어차피 들어도 몰라.”
“흐응, 여전히 멍청한 척하는구나.”
“캐리어 같은 건 안 가져온 거야?”
“여기 있을 건 아니니까.”
도발하는 자신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는 원우를 향해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현우가 앉는 의자에 앉아버린다. 한 면의 벽이 안 보일 정도로 책장 안의 책은 가득하다. 가벼운 베이지 색의 책상과 노트북 그리고 스탠드. 가벼운 듯하면서도 무거운 분위기, 현우의 서재 속에 앉아있는 재희는 희한하게도 잘 어울렸다.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가 자신의 자리였던 것처럼.
원우는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이 온 것 같아서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 어릴 때도 현우의 의자에 앉아서 자신을 놀리고는 했었다. 말하지 않아도 원래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가족은 자신임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게.
“호텔로 가는 거야?”
“아니, 당분간은 있을 예정이라서. 호텔은 좀 그렇고. 제인이 서울에 오피스텔 봐 둔 게 있었어.”
“엄마가 별로 안 좋아할 거야. 그래도 한국에 왔는데, 우리 집에 있....”
“엄마? 이제는 자연스럽게 너희 집이라고 하네?”
“... 어릴 때는 이해 못 했지만 지금은 이해했으니까.”
“좋겠다.”
현우의 의자에서 일어나며 재희는 원우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서.”
“쉽게 이해한 건 아니고.”
“그래, 어차피 네 가족이니까. 내가 아빠는 양보하기로 했잖아.”
원우의 어깨를 툭툭 치며 재희가 방긋 웃으며 속삭이자, 원우는 그녀의 손을 치우며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양보하지 않아도 우리는 법적으로 가족이야. 넌..., 손님이고.”
“흐응... 그래. 그거 참, 아쉽네.”
‘손님’이라는 그 말에 재희의 웃음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서야 원우는 마지막 말은 하지 말 것을 그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어깨를 스쳐 지나가버리는 그녀의 귓가에 내려앉은 말이었다.
식탁 위 가득한 음식들은 혜숙의 마음이었다. 퇴근을 한 현우는 오랜만에 만난 재희를 보고는 무거운 입으로 웃으며 오랜만이라는 말과 반가움을 전했다. 입안 한가득 음식을 씹으며 맛있다는 말을 연신하는 재희의 재잘거림에 저녁 식사는 따뜻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하지만 다과를 먹다가 재희가 자신들의 집에 머무르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혜숙은 편치 않은 얼굴이 되었다.
“서재를 치우면 충분히 지낼 수 있는데..., 불편해서 그래?”
“아니요. 아니에요. 제 짐이 좀 많아서 그래요. 아마 내일쯤 도착할 거예요. 한국에 있는 동안에도 그림 작업은 해야 해서요. 한국에 작업실 겸 쓰려고 예전에 제인이..., 엄마가 봐 뒀던 오피스텔이 있어요. 마침 지금은 세입자가 없는 상태라서요.”
“그래? 그래도....”
“여기서 가까워요. 자주 올게요. 저 한국에서 한복 만드는 법 배우고 싶어요.”
“정말? 우리 가게에 와. 내가 알려줄게.”
혜숙은 한복을 디자인하고 만들어서 판매하는 가게를 운영한다. 젊을 때부터 했으니 제법 오래된 가게인데, 온라인 판매가 활성화되기 전부터 이미 주문 판매하는 운영방식으로 제법 소문이 나서 지금은 꽤 유명해졌다. 요즘은 고전 한복보다 생활한복 위주로 만들고 있지만, 고전 한복을 찾는 사람들도 가끔은 있어서 혜숙은 늘 가게 안 의상실에서 작업을 한다.
현우가 설계를 공부할 때 혜숙은 의상 디자인을 배우는 중이었고, 제인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렇게 만났던 세 사람은 다 무언가를 창조하고 만들어 내는 작업을 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다만, 재희도 원우도 모르는 세 사람의 이야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어차피 지나간 이야기일 뿐이다.
“원우도 사실은 집에 가끔 와. 연습실에서 늦게 마치고 근처 숙소로 갈 때가 많거든. 학교도 거기가 더 가깝고.”
“아, 그래요?”
“그래도 원우 방은 사용하기 좀 불편하겠지?”
“아무래도 남자아이 방을 여자아이한테 쓰라는 건 좀 그렇지.”
“신경 쓰지 마세요. 말씀드렸다시피 여기서 가까워요. 자꾸 그러시면 제가 더 죄송해져요.”
“알겠어, 알겠어.”
저녁 식사부터 별 다른 말 없이 대화를 듣기만 하던 현우가 한 마디를 거들었다. 결국 혜숙은 아쉬운 얼굴로 재희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단, 오늘 하룻밤 정도는 자고 가라고 했다.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마음에 드는 얼굴이다.
“내일 옷감 보러 가야 하는 날이라 새벽에 일찍 나가야 해서 어쩌지. 아침은 차려두고 갈 테니 원우랑 꼭 먹고 가.”
“네, 꼭 먹고 갈게요.”
새벽부터 출장이 잡혀버린 현우와 가게 일 때문에 일찍 나가야 하는 혜숙은 미안한 얼굴을 연신 지으며 재희와 한 마디라도 더 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결국 시차 때문에 피곤할 것 같다는 원우의 한 마디가 나와서야 모두 잠자리에 드는 분위기가 되었다.
잠자리를 봐 둔 서재로 들어가려다가 거실 한 편에 조명을 켜 두는 혜숙의 세심함에 재희는 드디어 다시 이 곳에 돌아왔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어릴 때도 어두운 걸 싫어하는 자신 때문에 늘 거실의 작은 스탠드를 켜 두고는 했었다. 자신을 향해 잘 자라고 손짓하는 혜숙에게 재희는 웃으며 굿 나이트 손키스를 장난스럽게 날렸다.
벽 한 가득 있는 현우의 책장이 무너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피곤하기는 했다. 무거워진 눈꺼풀이 감기고 곧 꿈이 찾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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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제인은 자신의 머리를 빗어주고 있었다. 초여름의 날씨는 후덥지근함이 몰려들었다. 이윽고 주방 쪽의 뒷문이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뜰과 연결된 주방 뒷문은 항상 문단속을 꼭 했었는데, 그날 제인은 그 문을 열어 두었다. 재희는 그날 제인이 일부러 그 문을 열어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뒷문이 열려 있네요. 위험하게.”
거실로 슬그머니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뒤뜰에서 놀고 있던 자신을 늘 훔쳐보던 파란 눈의 뒷집 남자였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인데도 제인은 전혀 놀라지 않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히려 남자가 긴장한 듯 자신의 입술을 혀로 적시며 어색하게 웃었다.
“무슨 일이시죠?
“뒷문이 열려 있으면 들어오라는 뜻 아닌가요?”
“그럴 리가요. 아닌데요.”
“그렇군요. 그런데, 둘 밖에 없나 봐요? 남편은....”
“없어요. 아실 텐데요.”
“역시 그렇군요.”
소름 끼치게 웃는 남자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제인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남자에게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 아이를 탐내는 건가요, 아니면 제가 목적인가요?”
“둘 다요. 조용히 하면 아프게 하지는 않을 거예요.”
가까이 다가오던 남자가 주머니에 있던 칼을 꺼내자 제인은 재희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머리를 숙이고, 쿠션으로 귀를 막고 있으렴. 시끄러워도 절대로 소리 지르지 않는 거야. 알겠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재희는 시키는 대로 했다. 이윽고 쿠션으로 귀를 막자마자 제인은 재빨리 소파 시트 밑으로 손을 넣어 준비한 물건을 꺼냈다. 이윽고, 탕!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바닥에 뭔가가 크게 넘어지는 소리도 들렸다. 처음 들어보는 큰 소리에 재희는 놀라서 순간 딸꾹질을 했다. 딸꾹, 소리가 날 때마다 제인은 한 걸음씩 쓰러진 남자에게 다가갔다.
분명히 눈을 감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재희는 쿠션을 살짝 들어 제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바닥에 쓰러진 남자에게 다가간 제인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권총과 쓰러진 남자를 번갈아 보더니 남자의 손에서 칼을 뺐다. 그리고 그 칼로 자신의 팔에 작은 상처를 냈다. 피비린내가 났다. 퍼져나가는 그 역겨운 냄새가 재희는 견디기 힘들었다. 어지러웠다. 멀리서 들리는 사이렌 소리, 점점 다시 가까워지는 피 흘리는 제인.
“하아....”
... 꿈이다. 너무 오랜만에 긴 꿈을 다시 꿨다.
그때의 기억이 너무 생생해서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재희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갔다. 이 문 밖에 피 흘리며 쓰러진 그 남자와 제인이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이 잠시 들었지만, 그럴 리 없었다. 혜숙이 켜 둔 거실의 조명 덕분에 어둡지 않았다. 주방으로 가서 컵을 들고 물을 마시려다 어지러움에 그냥 주저앉았다. 자신도 모르게 욕설이 작게 튀어나왔다.
“뭐해, 야..., 너 괜찮은 거야?”
“쉿, 조용히 해. 너희 부모님 깨시겠다.”
긴 그림자가 거실의 조명 빛을 짙게 가렸다. 주저앉은 재희 앞에 천천히 눈높이를 맞추며 쪼그려 앉은 원우의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
“또 악몽 꿨어? 너 어릴 때도 늘 그랬잖아.”
“그랬었나?”
“무슨 꿈인지 몰라도 꿈꾸면 늘 이런 상태였잖아.”
맞다. 어릴 때 항상 같은 꿈을 꾸고 나면 온 몸을 동그랗게 말고 추운 듯 떨었다. 그럴 때마다 부모님을 깨우기 싫어하는 재희를 위해 졸린 눈을 한 원우가 옆에서 등을 두드려 주었다. 영문도 모른 채, 지금처럼. 다행스럽게 떨림이 잦아들었다.
“아직도 이러면 문제 있는 거야. 병원이라도 가봐.”
“큭, 그러는 넌.”
무심함을 가장한 그 걱정에 재희는 작게 웃었다. 그리고 잘 보이지 않는 원우의 얼굴 자세히 보기 위해 조금 더 다가가 작게 속삭이듯 물었다.
“넌..., 아직도 꿈에 내가 나와?”
“.......”
“여전히 내가 미워?”
“응. 여전히 이렇게 못 돼 먹은 윤재희는 미워.”
질문에 대한 대답과 달리 원우는 재희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일으켜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대답은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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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숙이 오지 않기를 잘했다. 분명 지금의 이 곳을 봤다면 걱정했을 것이다. 열 평 조금 넘는 오피스텔은 필요한 것이 모두 있었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곳에서 악몽을 꾸게 된다면 누가 재희의 등을 두드리며 달래줄 수 있을까.
“짐은 언제 와?”
“오늘 오후에 온다고 했어. 관리실에서 받아둘 거야.”
“정말 괜찮겠어?”
아무도 없다. 자신의 꿈에는 재희가 있지만, 재희의 꿈속에는 자신이 없다는 것쯤은 원우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염려되고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런 염려와 걱정을 모두 보여줄 수는 없었다. 그때보다는 훨씬 자란 마음이지만, 여전히 전부를 보여주기는 너무나 작고 뻔뻔하지 못한 마음이라 생각돼서.
“걱정되면 나랑 놀아주던가.”
“안 돼. 연습실 가야 해.”
“주말인데? 그런데 너 정말 가수가 하고 싶은 거야?”
“일찍 마칠지도 몰라. 마치면 연락할게. 번호 줘.”
오피스텔의 한편을 차지한 간이침대를 정리하다가 재희가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건넸다. 혜숙의 번호가 1번이었다. 원우는 자신의 번호를 저장하고 현우의 번호도 함께 저장했다. 자신의 번호는 6번 정도로 해 두었다.
“저장해 뒀으니까,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못 받을 확률이 높지만.”
“대답 안 했어. 너 정말 가수가 하고 싶은 거야?”
“나중에, 나중에 이야기해. 지금 가야 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겠지. 지난 새벽의 재희를 보지 않았다면 모르겠지만, 수면 아래에 있던 어릴 적의 장면이 몇 가지 떠올랐다. 뭘 해도 담담하던 표정과 달리 악몽만 꾸면 애처롭게 떨던 어릴 때의 기억이 겹쳐지면서 다시 한번 재희를 흘깃 바라봤다.
아직도 다 자라지 않은 자신이 원망스럽고, 또 한 편으로는 자신과 같은 재희가 안쓰러웠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모든 일을 해결해 줄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부쩍 드는 요즘이다. 그리고 재희도 얼른 어른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이 되면 이런 일들이야 ‘그저 그런 일’로 치부하며 넘길 수 있을까.
“원우.”
“왜.”
“내가 와서 기뻐? 아니면 슬퍼?”
“귀찮아.”
“피이..., 오늘 언제 마치는데?”
“몰라. 늦게 마치면 안 올 수도 있어.”
“여전히 거짓말은 잘 못하네.”
자연스럽지 않은 표정이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절대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다. 애초에 기쁨과 슬픔 따위로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재희는 정리가 된 간이침대 위에서 고양이 마냥 뒹굴거리더니 창 밖 너머의 건물들 사이로 멀리 보이는 공원을 가리켰다.
“저기 가보자.”
“오늘 엄마한테 갈 거지? 걱정하시니까, 전화하고.”
“너, 말이 많아졌네.”
“걱정하실 일은 하지 마. 네가 여기 있는 동안은 우리 부모님이 보호자라고 생각하시니까.”
“... 알았어. 그런데, 원우야....”
“.......”
“내가 여기 온 이유 왜 안 물어봐?”
“...,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니까.”
“.......”
‘우리’. 그 안에 재희는 없다는 뜻이다.
괄호 안과 밖을 나누어 그 안으로 들어올 수 없도록 자꾸만 선을 긋는다. 어릴 때부터 묶여있던 ‘가족’이라는 그 이름이 참 이상하게도 무섭고, 무겁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 아픔이 아니라 다행이지만, 과연 그건 아픔이 아닐까.
머리색보다 짙은 갈색 눈동자가 동그랗다. 빤히 쳐다보는 그 동그란 눈을 살짝 긴 눈매가 마주 보며 피하지 않았다. 어릴 때는 비슷했던 눈높이가 이제는 확연히 달라졌다. 그때와 달라진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도, 여전한 뭔가가 자꾸만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기분이다.
어릴 때의 원우는 무언가에 쫓기고 빼앗길 것 같았던 조급함을 들키기 싫었지만, 재희는 그 마음을 참 잘 알아차렸다. 원우는 그런 재희가 견디기 힘들었다. 이만큼의 시간이 지난 지금은, 과연 이 관계는 달라졌을까.
“갈게.”
도어록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자신의 등 뒤로 남아있을 재희가 언젠가의 자신처럼 먹먹한 기분이 들지 않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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