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상: ‘어른’이 되는 ‘아이’
어릴 때는 미술관에 가는 것이 싫었다.
제인은 자신이 보고 싶은 전시회가 있으면 꼭 재희를 데리고 갔다. 하지만 어린 재희의 눈에는 그저 알 수 없는 그림과 기이한 것들이 가득한 재미없는 시간일 뿐이었다. 자신의 또래가 있는 놀이터나 공원에 가본 적은 거의 없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전시회에 올 때 입는 예쁜 원피스의 끝자락을 돌돌 말아 쥐어 보았다. 그리고 자신만의 놀이를 생각해 냈다.
끝에서 끝까지 본 전시회 작품의 이름을 하나하나 나열해서 특징 설명하기. 물론 어린아이가 본 작품의 특징은 ‘노란색이 진하다’, ‘철사가 많다’ ‘뾰족한 세모가 많았다’ 따위가 전부였지만, 자신이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누구보다 진지하게 들어주는 제인이 좋았다. 차분하게 사려 깊은 얼굴로 간단한 음료를 마시면서 재희와 이야기를 나누던 제인은 그때만큼은 엄마 이상의 무언가였다.
“안녕, 제인.”
서울의 미술관에서 제인의 작품을 만날 줄은 몰랐다. 재희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한국에 있는 동안 뭘 할지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오피스텔에서 멍하게 앉아 해가 뜨는 걸 보다가 문득 미술관을 검색했다. 그리고 가까운 미술관으로 걸어가 누군가의 작품을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순간 재희는 웃어버렸다.
생활이란, 그리고 차곡차곡 쌓여온 버릇이란 결국 자신의 삶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아침은 꼭 챙겨 먹으라며 기어이 자신의 오피스텔에 반찬을 전하러 온 혜숙은 구석에 있는 작은 간이침대를 보고서는 한 동안 말을 멈추었다. 그래도 걸어서 얼마 걸리지 않는 곳이라는 것은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다시 한번 집에서 함께 지내는 건 어떠냐는 권유를 했다.
“여기가 편해요. 이렇게 가깝잖아요. 제가 귀찮을 정도로 자주 갈게요.”
재희는 혜숙을 다정하게 안아주며 그렇게 말했다. 원우는 그 날 이후 주중에는 한 번도 집에 오지 않았다. 혜숙의 가게에 몇 시간 있었지만, 그녀가 평소에 얼마나 바쁜지도 알았다. 현우는 직업 특성상 출장이 잦았다. 각 자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제 더는 재희가 특별한 사람으로서 시간을 쪼개어 받을 수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원우의 말처럼 ‘손님’이 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꼭 ‘가족’이 아니더라도 그냥 각별히 신경 쓰이는 관계이고 싶지는 않았다. 여기 있는 동안만큼은 그저 그들 생활의 일부분처럼 자연스럽고 싶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사는 가족이 되어 며칠 만에 집에 오는 자신을 반갑게 맞아주고 일상을 물어보는 그런...., 그런 관계이고 싶었다.
하지만 원우가 싫어할지도 모르겠다. 막상 원우가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재희는 제 몸을 둥글게 말며 이불을 끌어안았다. 결국 또 동이 트기 전까지 잠들지 못했다.
“해리. 네, 저예요.”
며칠 째 미술관과 공원, 그리고 도서관을 돌았다. 혜숙의 가게에 갈 때도 있었지만 오피스텔을 벗어난 대부분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도서관 앞의 분수, 미술관 앞의 전시회 로고, 편의점 테이블 위 커피, 한강의 노을까지. 그렇게 사진을 찍어 가끔 원우에게 자신의 행선지를 알려주고는 했지만, 한 번도 원우의 답장을 받지는 못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아직도 아무 소식 없는 거죠?”
아니, 사실은 상관이 있었다. 오늘처럼 별로 좋지 않은 소식을 들었을 때는 한 번쯤 원우가 먼저 물어봐 준다면 어떨까, 하고.
“네, 네....., 그렇군요. 그럼 전시회가 끝나면 공식적으로 발표를 해야 하는 건가요? 경찰 쪽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여기에 왜 온 건지, 정말 별일이 없는지. 어릴 때처럼 아직도 악몽을 꾸고 나면 한 참이나 힘든지..., 그런 곁에서 뭔가 도와줄 일은 없는지.
“곤란하겠군요, 그쪽도. 네, 알겠어요. 제인의 회사 쪽에는 제 입장을 정리해서 전문으로 보내도록 하죠. 제가 먼저 정리해서 보낼 테니, 해리가 부족하거나 빼야 할 부분을 수정 좀 해 주세요.”
제인이 갑자기 실종돼서 온갖 추측 기사들이 나왔어. 그래서 난 그걸 피해서 한국에 왔어. 제인이 업계에 일으킨 파문이 너무 큰데, 모순되게도 이미 기획한 전시회는 성황이라고 해. 난 아직도 어릴 때처럼 그 악몽을 꿔, 그리고 그 후에는 한 참이나 힘들어. 그런 내 곁에 누구라도..., 아니, 사실은 네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왜인지는 나도 잘 몰라. 네 말처럼 우리는 가족도 아니고, 고작 어릴 때 잠깐 같이 있었던 사이일 뿐인데 말이야.
“아, 마리아는요? 휴가를 안 갔어요? 계속 집에 있는 건가요? 그럴 줄 알았어요. 제가 나중에 따로 전화할게요. 네, 고마워요, 해리.”
그래서 이 곳에 온 건데..., 그런데 넌 이렇게 가깝지만, 여전히 멀구나.
“곧 돌아가야 할지도 몰라, 원우야.”
며칠 째 노을을 보러 오는 공원 벤치에서 통화를 마친 후 재희는 혼잣말을 했다. 겨울이 이제 본격적으로 다가왔다. 따스한 낮은 짧아지고, 추운 밤은 기다리지도 않는 자신에게 빠르게 몰려드는 것 같았다. 돌아가게 된다면 처리할 일들과 맞닥뜨려야 할 현실이 기다린다.
지금 주인이 없는 집을 지키고 있는 가정부 마리아는 제인이 유명세를 타고 바빠지면서 고용한 스페인계 가정부다. 재희에게 그녀는 할머니이지, 친구 같은 사람이다. 한국으로 오기 전 해리에게 그녀를 가족이 있는 곳으로 휴가를 보내도록 말해두었지만, 지난번 통화를 하면서 그녀가 아직 집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마리아는 그 통화에서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오는 재희를 상상하는 건 싫다고 말했었다. 고마운 사람.
지나던 길에 아무 가게에 들어가 야상 점퍼를 하나 샀다. 사는 김에 원우가 자주 쓰는 모자와 비슷한 것도 같이 샀다. 입고 보니 원우에게 찍어서 보내줘야겠다 싶었다.
“너랑 비슷하게 샀는데, 내가 더 잘 어울린다.”
처음으로 사진과 함께 문자를 보냈다. 분명히 답신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재희는 주머니 안에 휴대폰을 집어넣으며, 저녁 시간에는 혜숙의 가게로 갈까 생각했다. 한 참 바쁠지도 모르는 가게에 가서 멀뚱히 있는 것도 싫어서 다시 휴대폰을 꺼내 들여다보는데, 전화가 왔다. 원우였다.
“어디야?”
반가운 목소리. 오늘 같은 날에 들으니 더 반가웠다. 멀리 있는 것 같았던 그 목소리를 원한다면 가까이서 들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위안이 되었다.
“오늘은 나랑 놀아줄 수 있는 거야?”
“..., 저녁은?”
“아직. 나랑 놀아줄 거냐고.”
“보내주는 주소로 와, 일단.”
여전히 목소리에 특별한 다정함은 없었지만, 주소와 함께 어떻게 와야 하는지 상세히 적혀있는 것을 보면서 재희는 또 한 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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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희는 원우의 버릇을 알고 있다. 이어폰을 낀 채 저 멀리서 보이는 원우는 습관처럼 옷소매를 끌어다 손끝을 가렸다. 한 겨울도 아닌데, 추워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일까. 여름이면 짧은 반팔을 끌어내릴 수 없으니 그 가릴 수 없는 손끝을 주머니에 넣었다. 무슨 옷을 입던 조금만 느슨해지면 자신도 모르게 주머니에 손을 넣거나, 아니면 소매를 끌어내리는 모습은 여전했다.
저런 허술한 모습을 자신만 알고 있다면 좋으련만, 언젠가 원우가 원하는 꿈이 이루어진다면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너 뭐하냐?”
재희가 먼저 아는 척하려고 하는데, 원우의 뒤에서 누군가가 아는 척을 하며 가볍게 어깨를 쳤다. 조금 작은 키에 그 소년은 당황한 원우를 신기한 듯 쳐다보다가 재희가 가까이 다가가자 이번에는 자신이 한 걸음 물러났다. 재희와 원우를 번갈아 보면서 어버버 거리는 모습에 이번에는 원우가 당황해 말이 빨라졌다.
“친척, 친척이야.”
“아, 어.... 그래.”
여전히 재희와 원우를 번갈아 보는 표정은 알쏭달쏭한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이다. 재희와는 가벼운 고개 끄덕임으로 인사를 나눈다.
“연습 일찍 끝나서 근처에서 밥 좀 먹고 서울 구경 좀 시켜주려고.”
“아, 그래. 알았어.... 그럼 우리 이번에 소극장에서 연습 유닛들 평가 발표하는 것도 오는 거야?”
“어?”
“너 이번에도 부모님한테 말씀 안 드렸어?”
“아니, 뭐... 바쁘시니까.”
“얘, 이번에 연습생 끝날지도 몰라요, 평가 잘 받으면. 뭐, 일단 매번 데뷔할 마음으로 하는 거지만. 나중에 보러 와요.”
재희는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흔들며 사라지는 소년을 보다가 재희는 원우와 눈을 마주쳤다.
“평가? 무슨 말이야?”
“밥이나 먹자. 저녁 안 먹었다며.”
“무슨 말이냐니까?”
“월말마다 연습생 평가회를 하는데, 소극장에서 하거든. 늘 하는 거야.”
“연습생 끝나면 데뷔하는 거야? 평가 잘 받으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원우는 재희가 자신의 발걸음을 따라 옮기는 것을 확인하며 조금 더 번화한 거리로 나왔다.
짐짓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말했지만, 내년이면 햇수로 3년째다. 원우는 같은 유닛의 연습생으로부터 초조한 마음이 전염되는 것 같았다. 처음 시작할 때는 가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한 것은 아니었으니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연습한 시간보다 결과물이 나오지 않으면 만족이 어려웠다.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은 안무를 할 때 정확도는 높일 수 있지만, 유려한 느낌이나 특유의 춤 선 따위를 내기가 쉽지 않았다.
첫 해의 월말 평가는 뭔가를 만들어내고 결과물이 드러나는 즐거움이 있었지만, 날이 갈수록 어느새 그런 즐거움은 사라지고 스트레스로 변해 있었다.
“너 정말 그런 일이 하고 싶은 거야?”
“몇 번을 물어봐.”
“네가 대답을 안 해줬잖아.”
기껏 데리고 온 곳이 햄버거 가게였다. 하지만 원우도 근처에서 놀아본 적은 없으니 매번 연습생들과 함께 가는 곳으로 자연스럽게 올 수밖에 없었다. 주문한 새우 버거의 포장도 벗기지 않고 질문하기 바쁜 재희의 입에 대답 대신 튀긴 감자 하나를 물려준다.
“일단 먹어. 먹고 이야기해.”
“... 먹으면 이야기하는 거다?”
그래도 원우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이 더 큰 모양이다. 얌전히 새우버거를 우물거리며 한 입씩 먹는 재희를 보며 원우 또한 버거를 열심히 씹었다.
“이번 월말 평가는 언제 하는데? 어디서 하는데?”
“알아서 뭐하게.”
“나도 응원 갈게.”
“됐어, 오지 마.”
“어딘데, 응?”
“절대 안 알려줘.”
재희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치사하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원우는 그런 어설프고 풋내 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연습생들을 응원해주러 주기적으로 오는 팬들 입장에서는 하루하루 시간이 갈수록 성장하는 모습들에 박수를 보내줄 수도 있겠지만..., 재희에게만큼은 보여줄 수 없었다.
여전히 어른이 되지 못한 자신이 모습이 조명까지 환하게 받은 채 설익은 그 모습 그대로 고스란히 재희의 눈에 각인되길 바라지 않았다.
“넌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아니면 계속 이대로였으면 좋겠어?”
버거 가게를 나와서 나란히 걸으며 원우가 묻자 재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넌 어떤데?”
“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되면?”
“그냥 되고 싶어. 그러면 생각도 좀 자라 있지 않을까.”
“지금은 아닌가 보네?”
“아니지. 십 년도 넘은 사과도 이제야 겨우 하는 주제에....”
원우는 그 사과를 하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실제로 잊고 있던 사과를 꺼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다.
“난 어른이 되는 건 싫어.”
“........”
“내가 싫어하는 모습이 될 것 같아서....”
누구나 두려움이 있다. 대단한 사람이든 유명한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든..., 이미 다 자란 마음이라 생각해 더는 둘 곳 없는 체념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어디를 가는 건가 했더니 야경이 예쁜 타워였다. 높은 산 위에 올려둔 그 타워가 있는 끝까지 올라가는 케이블카의 거의 마지막 손님이었다. 둘은 아무 말 없이 반짝거리는 도시를 그저 바라보았다. 저렇게 많은 불빛 아래로 그 보다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고요하게만 보이는 도시다.
“언제 돌아가?”
“가지 말까?”
“.......”
“응? 가지 말까?”
“니 마음대로 해.”
어차피 그럴 수 없다는 것쯤은 원우도 알고 있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해줘야 할지 몰라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웃는 재희의 얼굴이 잔상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진다. 혹시라도 정말 재희가 이 곳에 있을 수 있다면, 그렇다면 둘의 관계는 달라질 수 있을까.
“... 정말 안 가도 돼?”
“........”
“아니야. 이제 가자. 늦었다.”
괜한 말을 했다. 원우는 다시 한번 재희 앞에서는 저도 모르게 속마음이 흘러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은 무슨 일로 온 것인지, 그것부터 묻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갈 곳 잃은 속마음은 재희의 대답 없는 표정 앞에서 허공으로 허무하게 흩어져 버린다. 한숨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돌아서던 원우는 긴소매를 내리며 자신도 모르게 손 끝을 가렸다.
“같이 가.”
긴 옷소매로 가려져 있던 왼손 끝이 재희의 오른손 끝과 닿았다. 앞만 바라보던 원우가 멈칫거리다가 다시 걸음을 옮기며 그 손끝은 또 다른 제자리를 찾았다. 새벽과 달리 재희의 손은 미지근하지 않았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손이었다. 잡을 수는 있지만, 절대로 뿌리칠 수 없는 손. 여전히 작지만 자신에게는 큰 우주 같기만 한 소녀....
“혜숙 씨 선물 사러 언제 갈 거야?”
절대로 자신은 모든 걸 알 수 없는 우주, 그 안에 속해 있으면서도 가끔은 사실을 의심하게 되는 그런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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