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별: ‘짧은 영원’
원우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재희는 원우가 당부한 대로 그의 휴대폰을 두 손으로 꼭 붙잡고 앉아 있었다. 해는 점점 지고, 눈 앞에 있는 호수의 물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가만히 바라보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짧고 짧은 생각이 재희의 머릿속에서 쉴 새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맥락이 없는 듯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방금 자신의 곁에 그토록 원하던 누군가가 와 주었다는 사실이다.
쌀쌀한 날씨 탓에 노을이 지는 시간에는 공원에 인적이 드물었다. 원우는 기다리라고 했었다. 그때도, 지금도. 물론 지금은 혼자서도 집을 찾아갈 수 있다. 하지만 버려진 기분이 드는 것 같아서 여전히 좋지 않았다.
재희가 문득 또 버려진 것은 아닐까, 의심 아닌 의심을 하며 혼자서 웃으려던 순간에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달려온 원우가 자신의 앞에 섰다.
“약국이 길 건너편에 있었어. 잠깐만.”
가쁜 숨을 겨우 가라앉히며, 소독약과 여러 가지를 꺼내는 원우를 재희는 그저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따끔한 감각들이 여러 가지의 번잡한 생각들을 몰아내 주었다.
“아파도 참아.”
“원우야.”
“왜.”
“아직도 내가 미워?”
“.......”
“난, 네가 미웠어. 아니, 미워한다고 생각했어.”
어릴 적에는 제인이 자신을 이곳에 두고 간 이유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저 ‘미움’,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제인, 사랑받은 적 없는 자신이 처음으로 만난 아빠가 있는 곳. 그곳에 있는 낯선 사람들 속에 원우가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원우가 좋았다. 하지만 그때는 ‘미움’과 같지 않은 그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느끼던 감정 속에 그런 것은 전혀 없었으니까. 친해지고 싶었지만 어쩔 줄 몰랐고, 위로나 공감 같은 것들은 누군가에게 배운 적이 없었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최선이었던 어린아이는 결국 좋아하는 감정과 미움을 구분하지 못해서 똑같이 되돌려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혼란스러웠어. 미워하면 불편하거나 화가 나야 할 텐데, 계속 웃음이 나는 이유가 도대체 뭔지 몰라서 말이야.”
널 좋아했어, 지금도 좋아해.
아니, 실은 그 이상일지도 몰라....
하지만 재희의 그 마음은 덧붙일 수 없는 말이 되어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정성스럽게 다친 다리를 소독하고 연고까지 바른 원우의 손이 마지막으로 밴드를 붙이고 있었다. 그저 대답 없이 듣기만 하는 원우의 정수리 위로 재희의 말들이 천천히 천천히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다시는 이런 말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재희에게 오늘과 같은 내일은 절대로 확신할 수 없으니까.
“넌, 아직도 내가 미워?”
“한국에 다시 왔을 때도 너 그 말했었어.”
“원우야.....”
“그리고 난 그때, 여전히 이렇게 못 돼 먹은 윤재희는 밉다고 했어.”
자신이 정성스럽게 치료한 재희의 상처를 계속 바라보면서 원우는 말을 이어나갔다.
“난 아직도 꿈을 꿔. 널 놀이터에 두고 왔던 그때 말이야.”
“.......”
“내가 사과를 한 이유는 그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야. 그 미안함에서 벗어나려고.”
“그렇구나.”
그저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한 사과였다는 그 말에 재희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의 마음을 알 것 같아서.
“분명히 말하는데, 난 널 미워하지 않아.”
“.......”
“정확히 말하면, 미워할 수 없어.”
여전히 한쪽 무릎을 벤치 아래 땅에 굽힌 채 자신이 치료한 무릎의 상처만 바라보던 원우의 시선이 그제야 재희를 향했다.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걱정하는 사람은 없어.”
“원우야.”
“안 돌아갔으면 좋겠어.”
“.......”
“이런 말로는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그냥..., 네가 안 갔으면 좋겠어.”
“난....”
“다음 주에 데뷔조 확정 발표가 있어. 이번에 안 되더라도 난 꼭 데뷔할 거야.”
“......”
“네가 안 간다면..., 그럼 나도 그거 포기할 수 있어.”
무대 조명 아래에서 땀 흘리며 빛나던 그 얼굴이 스쳤다. 시호 옆에서 자연스럽게 웃으며 많은 이들과 그토록 원하던 감정들을 나누고 느끼던 그의 표정이 재희는 생각났다. 어릴 적부터 겪었던 악몽, 누군가가 자신을 영원히 떠날까 봐 걱정하던 작은 어린아이는 더 이상 없었다.
이제 더는 자신의 세계를 부술지도 모르는 아이의 등을 두드려 주며 불안한 밤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
그토록 원하던 소속감, 형제 같은 관계, 그리고 진짜 가족. 원우가 원하고 바라고 늘 놓치고 싶어 하지 않던 모든 것들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두 번은 말 안 해. 난 진심이야.”
어쩌면 더 큰 사랑을 받고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 그 모든 것들을 포기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 모든 것들과 자신의 존재를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재희는 그런 큰 마음이 갑자기 제 앞에 있다는 생각에 순간 숨 쉬는 것을 잊었다. 지금 그가 어떤 마음을 줬는지, 재희는 알 것 같았다. 아마 다시는 없겠지.
그에게도 오늘과 같은 내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끝내 몰라야 하는 마음이다. 슬프게도..., 지금 자신은 모른 척해야 하는 마음이다. 아니, 지금도 앞으로도 모른척해야 하는 마음.
절대로 가질 수 없어서, 아니.... 가지면 안 되는, 그래서 두고 가야만 하는.... 자신에게 마지막 남은 행복.
재희는 원우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천천히 노을이 지는 공원, 반짝거리는 수면 위의 붉은색이 점점 짙어졌다. 마치 자신의 마음을 점점 채워가는 흔들리기만 하는 슬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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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ling in love’, ‘사랑에 빠진다’는 그 말이 나에게는 얼마나 위험한 단어로 들렸는지 모른다.
조금만 잘 못 하면 ‘Falling Down’, ‘추락’으로 바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매사 조심하면서 그 언저리만 맴돌았다.
그곳에 빠지는 것보다는 그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그와 비슷하지만 다른 뾰족한 ‘미움’에 더 집중하려고 했었다.
기어이 발을 담그고 천천히 몸이 젖어들어가면서도
여전히 뾰족한 ‘미움’이라는 끝에 매달려 아직 완전히 빠진 것이 아니라고,
나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다고 계속해서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그를 미워해야만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다 가진 것 같아도 정작 가장 원하는 것은 가질 수 없었던 아이와
누군가가 간절하게 원하는 것을 가졌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이가 만나
너무 오래 서로의 마음을 맴돌았다.
아주 오랜 시간 사랑도 추락도 그 무엇도 하지 못하고,
그저 미워한다는 말만 스스로에게 반복하며 주변을 서성거린 것은 무서웠기 때문이다.
눈 앞에 있어도 그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어 미움으로 덧칠해 표현하는 나와
그것이 무엇인지 묻지도 못한 채 어쩔 줄 몰라하며 다 받아주는 네가 오늘의 우리였다.
다시 반복되는 굴레처럼 결국 난 눈 앞의 이 아이에게 추락하고 또, 추락한다.
더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이미 미움을 놓아버린 손 끝에는 그의 체온이 닿아 모든 것을 잊게 만든다.
아..., 너는 그저 아름다움 그 자체여라.
이제껏 내 미움의 덧 칠도 소용이 없는, 마치 빛과 같구나.
노을빛의 끝자락이 그의 머리카락에 반사되어 난 눈을 감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의 추락을 알리며 그에게 떨어져 내렸다.
그는 마치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는 듯,
자신의 입술에 닿은 내 입술에도 놀라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있었다.
나의 불안한 추락은 아주 안전하게, 그에게 떨어져 내리는 사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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