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택: ‘마지막’의 ‘첫눈’
그리 멀지 않다고 했지만, 서울에서 출발하니 두 시간은 넘게 걸리는 곳이었다. 대절한 택시가 돌아가고, 재희는 자신이 도착한 곳을 둘러보았다. 산과 바다가 만나는 기막힌 풍경 속에 대규모 전원주택 단지 공사가 한 창이었다.
“모레면 서울에 다시 돌아갈 텐데.”
“서울을 한 번쯤은 벗어나고 싶었어요.”
“잠깐만 기다리렴.”
연락을 받고 단지 앞으로 나온 현우는 안전모를 쓰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고 옆에 있던 직원에게 뭔가를 더 지시하더니 이윽고 안전모를 벗으며 어딘가로 안내했다. 임시 사무실로 쓰는 곳에 안전모를 걸어두고, 자신의 차로 재희와 함께 이동했다.
십여분 정도를 달려 조금 더 산 중턱쯤으로 올라가자 시야가 갑자기 넓어졌다. 멀리 낮은 산 봉우리들이 섬처럼 보이고 그 사이로 수평선이 보였다.
“자, 여기.”
“네.”
산 중턱에는 뜬금없이 허름한 목공방이 있었다. 목공방은 카페도 겸하고 있어서 커피를 들고 나무 사이에 마련된 벤치에 앉으니 풍경이 멋진 천연 노천카페가 되었다. 하얗게 입김이 나는 산속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니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 같았다.
“좋지?”
“네. 그러네요. 의외에 곳에 또 의외의 뭔가가 있네요.”
“처음에 부지를 보러 왔을 때부터 여기 주인장이랑 이야기를 했었는데, 일부러 여기로 오신 분이라고 했어. 사람이 싫어서 왔는데, 또 막상 여기로 오니 사람이 그리워서 가끔 지나가는 등산객들에게 커피를 나눠준다고 했거든.”
“네.”
“이 아래에 주택단지가 완성되면 또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지.”
“......”
“인생은 늘 변화의 연속이고 예측도 하기 어려운 거니까.”
커피를 들고 있는 현우의 옆모습에서 재희는 원우를 떠올렸다.
희한하게도 닮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닮았다. 분명히 현우의 분위기 속에 원우가 보였다. 혈연이 아니라도 그는 분명히 원우와 혜숙의 가족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수긍하게 된다.
재희는 자신의 손에 들려진 따뜻한 컵을 보면서도 원우의 서늘한 손을 떠올렸다. 온통 머릿속이 원우로 채워진 것 같았다. 그날 이후로....
가득 차 올랐던 흔들리는 슬픔이 그 순간만큼은 그저 기쁨의 감정으로 바뀌었다. 어느 때 보다 깊은 감정이 결국 이별을 위한 의식이라는 것은 재희를 잠 못 들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그 순간이 무한으로 리플레이되는 장면으로 재희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저, 지금은 사랑일 뿐이라고.... 손을 꼭 잡고 집까지 바래다주는 다정함이나, 잘 잤냐고 물어보는 상냥함 따위에 이후의 이별을 묻어버렸다.
그리고 지금은 옆에 있는 현우에게 들을 말이 있었다.
“제가 들을 말이 있을 것 같아서 왔어요.”
“..., 제인과 난, 아니 제인과 우리는 한 동안 같이 지냈어.”
현우는 커피잔에 입을 떼고 담담하게 재희의 말을 이었다.
“그게 궁금했던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네가 듣고 싶은 대답을 들으려면 이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해.”
“전....”
“누가 뭐라고 해도 제인은 네 엄마가 맞아. 제인이 너를 맡게 된 건....”
잠깐.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걸까.
재희는 잠깐 동안 현우의 말에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제인이 엄마인 것은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현우는 지금 제인이 자신의 엄마인 것을 믿으라고 말한다. 무슨 의미인가.
“지금 무슨 말씀을....”
“제인이 부탁했어. 언젠가 네가 찾아와 무언가를 묻는다면 꼭 사실대로 대답해주라고 말하더구나. 그래서 처음부터 이야기해 주려는 거야.”
“제인이요?”
“제인은..., 네가 자신이 낳은 아이가 아니라고 말할 용기가 없다고 했어.”
“잠깐, 잠깐만요....”
들고 있던 잔이 살짝 떨렸다. 머릿속이 엉망이다.
울타리가 있던 낡은 집, 누군가를 기다리던 호수, 노을의 붉은빛, 어두웠던 밤하늘, 강렬하게 울린 총성, 제인의 팔에 지워지지 않는 흉터, 돌아가지 말라고 말하던 원우의 표정, 제인의 그 핼쑥한 얼굴, 익숙한 웃음....
온갖 것들이 재희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얀 입김이 가느다랗게 새어 나왔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러 온건 아닌가 보구나. 난 네가..., 어느 정도는 알고 찾아온 줄 알았다.”
왜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을까. 그건..., 그렇게 닮기 싫었던 제인이 자신과 꼭 닮았다고 생각했으니까....
난감한 표정이 된 현우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재희는 정신을 차리려고 다시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뭐든..., 뭐든 괜찮으니까 말씀..., 해 주세요.”
“혜숙과 난 늦은 유학생활을 할 때 셰어하우스 있었어. 제인은 그곳에서 만났지. 그리고 그곳에는 몇 명의 사람이 더 있었고.”
“그럼....”
“모두 형제자매처럼 친하게 지냈어. 제인은 조금 낯을 가려서 우리와 제일 친했지. 그중 제인은....”
섬처럼 떠 있던 봉우리들이 그늘지기 시작하고, 멀리 반짝이던 수평선은 서서히 물빛이 변해갔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후 식어버린 잔의 커피를 한 모금 더 입에 머금었다. 변해가는 그림자와 빛은 끊임없이 흘렀고,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그럼 제 아버지는....”
“예전에 제인이 너를 맡기러 한국에 왔을 때, ‘네 아이야.’라고 말했어. 너무 태연하고 당당하게 말해서, 순간 나도 내 과거를 의심했단다. 제인은..., 그런 사람이지.”
“정말 제 아버지가 아니신 거죠?”
“그래. 하지만, 아내와 나는 언제나 네가 우리 자식이라고 생각해. 그건 알고 있지?”
“네....”
“그래서 제인이 나에게 그런 부탁했을 거야. 혜숙에게도....”
“지금 제인에게 무슨 일이 있나요?”
“그건..., 제인에게 직접 물어보는 편이 좋을 것 같구나. 내가 부탁받은 건 이 이야기를 사실대로 너에게 해주는 것뿐이니까. 생각보다 빨리 찾아오기는 했지만....”
“전..., 지금 혼란스러워요.”
“그럴 거야. 하지만 여전히 제인이 네 엄마라는 건 변함없어. 그건 너도 알지? 제인에게는 네가 유일한 가족이니까.”
현우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살짝 저으며 재희의 손을 살짝 다독거린다. 이미 너무 많이 알게 된 새로운 사실들에 재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미 알게 된 사실들은 절대로 되돌릴 수 없다. 미지의 영역일 때 자신의 출생에 대한 유일한 사실은 제인이 자신의 엄마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마저도 사실이 아니다.
“제인을 처음 봤을 때는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사람처럼 보였어. 그러다가 너를 맡고 난 후에 모든 것이 변한 거야.”
하지만 현우의 말대로 제인이 자신의 유일한 법적 가족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절대로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날 밤, 자신을 구하기 위해 제인이 자신의 팔에 남긴 상처만큼이나 확실한 사실.
“외모는 혼혈에 성은 동양계지만 모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것도 아닌..., 늘 어딘가 애매한 자신이 싫었다고 했어.”
“어릴 적에 늘 한국방송을 보여줬어요.”
“그래, 네가 한국어를 잘할 수 있도록 일부러 방송도 많이 보여줬다고 했어. 네가 혹시라도 자신처럼 애매한 자신을 싫어하게 될까 봐. 둘 다 확실하게 가르쳐주고 싶었다고. 언젠가 네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도록.”
선택할 수 있도록.... 자신에게는 선택지가 없을 줄 알았다.
그녀처럼 되기 싫어서 어른이 되는 것도 두려웠던 재희는 문득 제인이 자신의 진심을 꿰뚫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동안 봐왔던 제인의 모든 것들은 자신이 오해한 것일까. 자신이 만들어낸 기준으로 그녀를 판단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정말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이 모든 오해를 지금부터라도 풀 수 있는 걸까.
확실해졌다. 하나는....
이제 자신은 절대로 제인의 곁을 먼저 떠날 수 없다.
하지만 예전보다 더 외로워지더라도, 덜 괴로울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처음에는 우리가 너를 데려가려고 했었어. 하지만 우리는 그때 너무 가난한 유학생이었고, 입양 절차는 생각보다 까다로웠어. 제인은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지만, 혼자서 그 모든 걸 해결했고.”
“......”
“사람은 모두 자신만의 몫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생각해.”
현우의 서재에 가득했던 책들이 떠올랐다. 그가 하는 일은 누군가의 보금자리를 만드는 일이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그 보금자리에 있을 어떤 가정이 있을 것이다.
“기쁨, 행복, 외로움, 괴로움, 불행까지도. 난 가난한 고아에 가족 하나 없었지만, 아내를 만났고 그래서 원우가 아들이 되었지. 가족이라는 걸 이루는 건 나 같은 사람에게는 꿈과 같은 일이었는데, 어느 날 돌아보니 이미 난 좋은 가족 그 이상이 생겼어.”
“제인도요?”
“당연하지. 너와 제인도.”
눈앞에 산 봉우리들은 멀리 바다와 어울려 여전히 섬처럼 외로워 보였다. 당연히 가져야 할 몫의 외로움의 크기를 누군가는 알 수 있을까. 스스로가 그 크기를 안다고 해도 뭐가 달라질까. 재희는 할 말을 찾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저 아래 주택단지 새로 생기면 그중에 우리 집이 있을 거야.”
“이사하실 거예요?”
“오랜 꿈이지. 각 자의 공방을 집 아래에 두고, 가족이 모두 함께 사는 거 말이야.”
“혜숙 씨가 좋아하시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기대 중이야. 그 집에 네 방도 있을 거야. 꼭 오렴.”
“제 방이요?”
“제인과 네가 한국에 오면 같이 지낼 수도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날은..., 오지 않을 거라고. 재희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사람의 외로움은 꿈꾸는 섬이 되어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다.
여전히 섬이라 외로울 수밖에 없는 주제에 반짝이는 바다 너머를 바라보며 언젠가는 그 외로움이 행복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를 바랐다. 이루어질 수 없는 날들을 꿈꾸는 섬은 여전히 바다를 홀로 지킬 뿐이다.
현실은 바다에 떠 있는 섬이 아니라는 사실도 모르고, 그저 산봉우리인 주제에.... 스스로도 모르는 그 외로움은 방향을 잃어버리고 영원히 헤매다가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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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이 되지 않던 제인은 호텔 소파에 잠들어 있었다. 테이블 위에 가득한 것은 술병과 그리고 약이었다.
재희는 깊은숨을 들이쉬고, 다시 조용히 내뱉었다. 해리에게서 비행기표가 예약되었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하루 뒤면 두 사람은 이 곳에 없을 것이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야경은 같을 줄 알았는데, 원우와 함께 본 그 밤의 야경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재희는 잠이 든 제인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돌아간다면 처리할 일이 많겠지만, 그 모든 것들을 제인이 혼자 짊어지게 만들 수는 없다. 이제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
그대로의 사실은 받아들이고, 결국 선택을 하게 만든다. 제인이 현우에게 그런 부탁을 한 것은 자신의 이런 선택을 원한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마음이었을까.
제인의 마음,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이제부터 재희의 선택은 그녀의 뜻이 아니니까.
“언제 왔어?”
“조금 전에. 술이랑 약을 같이 먹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야.”
“잠이 너무 안 와서 그랬어.”
제인의 꿈속에는 뭐가 있을까. 이제껏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던 사실들이 문득, 재희의 마음을 두드렸다.
“현우 씨를 만나러 갔었어.”
“이런.... 생각보다 너무 일찍 찾아갔네. 그래서 어때, 마음이 바뀌었어? 한국에 남을 거니?”
소파에서 일어난 제인은 재희가 자신을 바라보고 서 있자, 예전보다 짧아진 머리를 정리하며 대답했다. 그리고 재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되물었다. 하지만 재희는 물 잔에 물을 담아 마시는 제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말했잖아. 여기는 우리 집이 아니라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괜찮아.”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 왜 제인은 항상 자신과 거리를 두려고 했을까. 그저 마음을 다 줘도 되었을 텐데. 그 해답은 이미 현우에게 전해 들었던 이야기로 충분했다.
“제인..., 난 당신을 외롭지 않게 해 줄 수는 없어. 아직은 내 외로움이 더 크니까. 하지만 각자 외로운 섬처럼 곁에 있을 수는 있을 거야.”
“.......”
“우린 서로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꼭 필요한 사이잖아.”
제인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재희를 바라보다가 다시 물 잔을 들었다. 아까와는 달리 손이 떨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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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져 내리던 재희의 마음을 자신이 잡아준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재희의 손을 잡고 떨어지고 있는 것일까.
뭐가 되었든 재희를 혼자 둘 수는 없었다. 그렇게 끝없이 추락하는 마음을 자신이 잡아줄 수 없다면, 함께 떨어지기라도 해야 했다.
원우는 자신의 외투 주머니 속에 있는 반지 두 개를 만지작거렸다. 오는 길에 홀린 듯 고민 없이 산 것이다. 반지의 치수를 고민하지도 않았다. 제법 많이 잡고 있었던 그 손의 감촉이 떠오르자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지어졌다.
“언제부터 있었어? 전화라도 하지 그랬어.”
“금방 왔어. 줄게 있어서.”
“안 바쁘면 잠깐 들어와. 춥다.”
오피스텔 문 앞에서 기다리던 원우를 보고도 재희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저 기쁜 얼굴이었다. 금방이라도 좋아한다고, 너를 정말 아낀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얼굴. 앞으로도 이런 표정의 소녀를 항상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갔다 온 거야?”
“그냥. 여기저기.”
“손 내밀어 봐.”
현관을 채 벗어나지도 않은 채 원우는 바쁘게 재희를 붙잡았다. 그 말에 재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시키는 대로 손을 내밀었다.
“딱 맞네.”
“이게..., 뭐야?”
“반지.”
“반지?”
재희의 새끼손가락에 딱 맞는 반지를 보며 원우는 웃었다. 자신의 손에도 있는 같은 모양의 반지를 보여주더니, 이번에는 새끼손가락을 가져와 걸어본다.
“어울리지?”
“이걸 왜....”
“그냥. 예쁘잖아.”
“.......”
“너처럼.”
마지막 말을 하며 원우는 활짝 웃었다. 각자의 손가락 끝에 걸린 서로의 손이 예뻤다. 재희는 흔들거리며 연결된 손가락을 보다가 결국 함께 웃어버렸다.
“너도 예뻐.”
흔들리는 손가락 두 개가 미세한 체온을 나눴다. 그 체온이 어느 때 보다 따스했다. 재희는 손가락을 놓지 않고 장난스럽게 손장난을 치는 원우를 바라보다가 다시 제대로 그 손을 붙잡아 주었다.
“데려다줄게.”
“뭐?”
“매번 네가 데려다줬잖아. 오늘은 내가 너 데려다 줄래.”
마지막이니까. 그 말은 삼키며 재희는 웃었다. 나가기 전 원우가 예전에 줬던 목도리를 그의 목에 다시 둘러줬다.
“생일에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음, 글쎄.”
“잘 생각해 봐.”
꼭 잡은 손을 원우의 재킷 주머니 안에 함께 넣었다. 찬 바람이 잔잔했다. 사람들 사이를 스치고 걸으며 두 사람은 꼭 잡은 손을 한 순간도 놓지 않았다.
“원우....”
“응?”
“내 생일에는 눈이 오면 좋겠다.”
“그게 소원이야?”
“아직 첫눈이 안 왔으니까. 첫눈이 오면 같이 보자.”
“그래, 꼭 그러자.”
“그런데 너 괜찮아? 추운 거 싫다며.”
“따뜻한 데서 보면 안 되는 거야? 꼭 밖에서 봐야 해?”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이 된 원우의 얼굴에 재희는 다시 한번 크게 웃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이지만 ‘네가 밖에서 보자고 하면 그럴 거라’고 말하는 원우의 다정함이 재희는 아팠다. 이런 다정함과 상냥함을 누군가에게 다시 받을 수 있을까.
아니, 이 보다 더 큰 다정함이나 상냥함을 그 누군가가 준다고 하더라도 원우가 아니라면 아무 의미가 없다. 그 생각에 재희는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더 크게 웃으며 원우의 손을 꼭 잡았다.
“조심해서 가. 고마워.”
“전화할게.”
“원우..., 연습 그만두는 건 조금 더 생각해봐.”
“다음 주쯤에는 말할 거야. 같이 준비하던 애들한테는 미안하지만.”
“꼭 그렇게까지는....”
“아니. 말했잖아. 네가 안 돌아가면..., 네가 내 옆에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 꿈을 두 가지 모두 이루는 건 욕심이 과한 거지.”
“꿈....”
‘꿈’이라고 말하는 원우의 입 끝이 살짝 올라갔다.
자신을 향해 ‘꿈’이라 말하는 원우의 그 말이 재희는 무겁게 느껴졌다. 추락하는 자신을 향해 빠른 속도로 함께 떨어져 내리는 원우의 모습이 보였다. 무거운 이 감정의 무게에 원우의 추락이 자신보다 빠를까 봐 걱정되었다.
서서히 떨어져 내리기를 바랐지만, 그런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을 줄 이미 알고 있었다. 이미 자신도 그에게 떨어져 내리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조금은 기대했다. 이 행복의 끝이 조금만 더 유예되기를....
하지만 더 이상은 원우를 무겁고 무서운 이 감정에 휩쓸리게 둘 수 없다. 그러니까..., 자신은 더는 이 곳에 있으면 안 된다.
“원우야.”
“왜, 내가 다시 데려다줄까? 역시 그렇지? 자, 가자.”
반색하며 자신을 향해 다시 손을 내미는 원우를 향해 재희는 천천히 다가가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갑작스러운 재희의 행동에 원우는 잠깐 당황했지만, 이내 그대로 서 있었다. 늦은 시간 오가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사이에서 두 사람만의 시간이 흘렀다.
“그냥..., 여기서 안녕해.”
“그러기에는 네가 너무 꽉 안고 있잖아.”
“그러게. 미안.”
안녕, 안녕....
연습해 둔 그 말을 눈물 없이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꼭 끌어안은 다정함과 상냥함에 이제 이별을 고한다. 한 번 더 최선을 다해 힘주어 끌어안아본다.
누군가에게는 어느 때와 같은 평범한 날이었다. 그리고 재희에게는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을 행복의 마지막 순간이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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