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 ‘끝’을 향한 ‘시간’
돌이켜보면 원우도 그것이 자신과의 이별임을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생일 축하해.”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제인은 옆 좌석에서 조용히 속삭였다. 늦은 시간의 밤 비행기는 승객이 많지 않았다.
“응. 고마워.”
떠나는 날, 재희가 소원했던 그대로 서울에는 눈이 왔다. 하지만 비행기가 이륙하고 난 후에는 볼 수 없었다. 구름 위로 올라간 비행기 창 밖에는 밝은 달만 보일 뿐이었다. 추운 날을 싫어하던 원우는 밖으로 불러내지 않아도 된다. 그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떠나지 않아도 괜찮아....
제인을 대신해서 혜숙에게 마지막으로 전화했을 때,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가라는 말이 아니었다. 떠나지 않아도 된다, 그 말 한마디는 재희의 집에 이곳이 될 수 있음을 알게 해 주었다. 하지만 이미 재희의 뜻은 이곳에 있지 않았다.
언제든 돌아오렴.... 마지막까지 혜숙은 재희를 웃게 만들었다.
“어릴 때 쿠키를 구워달라고 했던 네 얼굴에서.... 누군가를 봤어.”
“그래서 그런 표정을 지었구나.”
“어떤 표정이었는데?”
“난감한 표정?”
“아니야. 그럴 리가.... 그건 아니었을 거야.”
제인은 소리 죽여 웃더니 조명의 조도를 낮추었다. 그리고 긴 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냥, 어쩔 줄 몰라하는..., 그렇네. 그러고 보니 난감한 표정이었을 거야. 그때는 반가운 표정이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반가운?”
“오랜만에 봤으니까. 그 얼굴을....”
“..., 사랑했어?”
“사랑? J.... 아직도 그런 말을 하는구나.”
“그저 필요한 사이었다는 거야?”
“글쎄..., 그런 게 아니었을까.”
제인은 다시 소리 죽여 웃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곧 잠이 들 것 같은 목소리로 재희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쉬워. 다만, 그 사람을 지키는 일은..., 너무 어렵더라. 그래서 다시는 그러지 않기로 한 거야.”
“제인.”
“말해.”
“아픈 거지?”
“..., 응.”
“돌아가면 치료부터 받자.”
“........”
“죽지 마.”
재희는 잠이 들 것 같은 목소리가 작게 ‘응’이라고 하는 대답을 들었다. 이상하게 눈물 고였다.
이 모든 상황들이 슬프지만, 그중 가장 슬픈 것은 지금 눈이 오지 않는 창밖을 혼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을 다정하게 안아줄 누군가도 없고, 이 눈물을 닦아줄 상냥한 누군가도 없다. 그러니 이제는 그만 울어야 한다.
-
넌 이렇게 떠나는 나를 보고 뭐라고 할까. 궁금하지만 연락을 할 수는 없을 것 같네.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을 거야. 어쩌면 우리의 시간은 여기까지 라는걸 너도 알고 있었을지도 몰라.
그래, 그랬을 거야.... 그런 줄 알면서도 넌 나에게 그런 마음을 줬구나.
불안함을 안고 끊임없이 나를 붙잡으려고 노력한 거겠지.
내 세상의 모든 감정들을 다 쏟아부어도 너에게 받은걸 다시 돌려줄 수는 없을 거야. 그러니 그대로 안고 가려고.
어쩌면 앞으로는 그 감정들을 끌어안고 살아야 할지도 몰라.
평생을 그때의 우리를 그리워하면서 살겠지.
다시 만나지 못할 사람처럼 이런 글을 쓰는 건 다하지 못한 말들을 이곳에 두고 가려고 그러는 거야.
헤어질 때 너를 끌어안으면서 난 네게 받은 반지를 주머니에 다시 넣었어.
예뻐서 샀다는 말은 거짓말이잖아. 그 반지는 하나도 예쁘지 않았으니까. 미안....
하지만 네가 나에게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기에는 충분했어.
꿈꾸던 것들을 포기해도 좋을 만큼 넌 내가 떠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겠지.
어릴 때 말이야. 진짜 우리 아빠가 현우 씨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어.
하지만 그렇게 되면 네가 나를 미워할 것 같았고, 나는 너를 얼마나 더 좋아해야 할지 모를 것 같았어.
어느 정도로 너를 좋아해야 우리 사이가 더 멀어지지 않을까를 고민해야 했어.
어리석은 생각이었지.
그냥.... 어릴 때는 내가 너를 그만 놀리고 괴롭히지만 않았다면 우리 사이는 멀어지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지금은 내가 널 얼마나 더 좋아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어. 이 이상의 감정은 앞으로 나에게 없을 테니까.
다시 돌아왔을 때, 그리고 너를 다시 만났을 때 나는 너를 더 좋아하게 될 거라고 느꼈어. 딱 알았지....
돌아올 때 너에게 미움받을까 봐 무서웠지만 돌아올 수밖에 없었어.
떠오르는 기억 중 가장 나에게는 소중한 기억은 그뿐이었으니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몰라... 하긴, 이제 와서 이런 생각을 한들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처음부터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어.
그런데 이렇게 너를 두고 돌아가는 일이, 네 곁에 더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다는 건 몰랐어.
그러니까 이렇게 너를 좋아하고 또 좋아해서.... 결국 내가 너를 두고 가게 될 줄 알았다면 말이야....
아니, 그래도 괜찮아. 너와 함께 했던 모든 시간들은 이제 죽을 때까지 내 것이니까.
그런 시간조차 없다면 아마 앞으로의 삶은 더 견지기 힘들지도 몰라.
상자 속에 좋아하는 것들을 넣어두고, 힘든 일이 있을 때 꺼내볼 수 있다면..., 내 상자 안에 가득히 그 시간 속의 우리가 있을 거야.
어쩌면 네 말대로 우리는 지금보다 더 많이 사랑하고, 함께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원우야..., 난 지금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그 이상으로 너를 좋아해.
내 유일한 사랑이 되어달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말한다면 넌 기꺼이 그러겠다고 하겠지만....
너를 내 추락에 함께 둘 수는 없어. 이 모든 것들이 해결될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 과정은 고단하고 힘들 거야.
그런 모든 것들이 지나고 난 후, 언젠가의 너와 내가 지금의 우리를 원망하고 서로를 미워하게 될까 봐... 이제 무서워졌어.
가보지 않은 시간을 먼저 걱정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할지도 몰라.
맞아, 난 늘 어리석고 이기적이잖아.
그래도 네 인생에서 이제 이런 사람을 만나는 건 나 하나로 끝일 거야.
..., 앞으로의 네 삶이 어둠 없이 빛나고, 또 아픔 없이 행복하길 바랄게.
다시는 악몽 같은 건 꾸지 마. 이제 나한테 사과도 했으니까, 죄책감 같은 것도 갖지 마.
그 이야기는 평생 우리 둘만 아는 이야기로 할게.
더는 쓸 말이 없다. 어차피..., 이 글은 너에게 보내지도 않을 거니까.
원우야.... 원우야....
“원우야....”
동그랗게 말리는 입술 모양으로 그 이름을 작게 불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재희는 티슈에 정성스럽게 쓴 글씨들을 읽어보다가 천천히 내려두었다.
티슈 속에 적힌 그 마음은 눈물을 흡수해 점점 번져가는 감정들로 변했고, 누구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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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 속의 반지를 발견했을 때, 이미 반지의 주인은 없는 번호가 되어 있었다. 그 어디에도 소녀는 없었다.
어딘가로 떠나버린 반지의 주인은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돌아오더라도 다시 반지의 주인은 될 수 없을 것이다.
원우는 자신의 손가락에 주인을 잃은 반지 두 개를 사이좋게 모두 끼워보았다. 아무런 문양이 없는 단순한 그 반지 두 개를 바라보다가 다시 빼서 상자에 넣었다. 오늘 데뷔조 공식 발표와 함께 그룹 멤버들과 같은 반지를 나눠 낄 예정이었다.
이제 하나의 ‘가족’이라는 증명으로 그 반지는 계속 그와 함께 할 것이다. 주인을 잃은 반지를 대신해서....
자신이 그날 어떤 마음을 줬는지 재희는 알고 있었을까. 알았다면 이 마음을 받았을까. 아니, 알아서 받지 않은 걸까.
소용없는 질문을 되풀이해 보았지만 현실의 재희는 원우의 마음을 받지도 않고 떠났다.
원우는 재희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두 번 다시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을 진심을 말이라도 해 보아서 다행이라 여겼다.
이제껏 한 번도 제 속마음을 끝까지 말한 적은 없었으니까.
그날, 상처투성이가 된 재희의 다리를 보면서 원우는 자신이 대신 아팠으면 했다. 그 짧은 순간에 그런 마음이 든 자신이 놀라웠고, 결국 모른 채 할 수 없어서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제 모든 것들이 흔들리고 결국 부서진다고 해도, 그래서 절대로 되돌릴 수 없다고 해도, 그날의 원우는 재희에게 그렇게 전하고 싶었다.
모든 것을 끌어들이는 블랙홀, 우주, 아니..., 그냥 작고 작은 상처 받기 쉬운 연약한 소녀. 그 뭐든 간에....
그것이 재희라면 원우는 모든 자신의 마음을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미워할 수 없었다. 제 세상의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정말 미워한다고 하더라도.... 원우는 절대로 그럴 수 없었다.
“안녕. 이번에도 너는 도망가 버렸네.”
서랍 속 깊은 곳에 반지를 넣으며, 원우는 인사를 했다.
사과 한 마디 못하고 떠나버려서 당황스럽던 처음의 이별과 달리 이번에는 제 마음을 꺼내어 재희에게 보여주었다. 이미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곧 어른이 된다. 누구보다 잘 자란 어른이 되어 재희를 다시 만날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다면 자신이 찾으면 될 일이다.
분명히 오늘 같은 내일은 없겠지만, 내일은 오늘이 아닐 테니 달라질 수도 있다.
기다리는 것은 익숙하고, 이제 그 기다림 속에 악몽은 더 이상 없으니 되었다. 다만, 재희의 악몽이 계속될까..., 그때마다 손잡아 줄 누군가 없이 또 어두운 밤 혼자 떨고 있을까 걱정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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