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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dcat혜진 Jun 19. 2021

 세계와 세계, 비의 계절

| 그녀: 나와 너와 그리고…




떠나버린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어리석지 않기 위해 난 늘 떠나버린 그 누군가가 되는 쪽을 택했다. 하지만 그때는 떠나버린 쪽이 더 그리워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남겨진 사람은 그리워할 뿐이지만, 떠나버린 이는 후회까지 함께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비가 마구 쏟아지던 계절이었다. 이상하리만치 비가 자주 왔다.


사랑의 계절은 짧고도 짧았고, 그 후의 이별은 길고도 길었다. 그녀가 떠나버린 후에 난 그 모든 것들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

.

.

.

.


“인사해. 이쪽은 새로 온 제인.”

“안녕하세요.”

“이쪽은 킴.”

“안녕.”




한국어에 익숙해야 마땅한 얼굴을 한 그녀는 오히려 한국어에 서툴렀다. 편견이 짙게 깔려있던 시절, 그리고 보수적인 동네의 사람들은 그녀가 중국어나 일본어를 잘하는 줄 알았다. 그녀는 여기서 나고 자란 사람이었는데도 말이다.


늘 책을 끼고 학교에 다니는 다른 이들과 달리 난 그때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여기저기를 전전하는 게으른 길고양이 같았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대학이 즐비한 동네였지만, 모두가 바쁜 학생은 아니었다. 그 바쁜 학생이 아닌 사람이 나였다. 그때의 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태어나보니 아버지는 잘 모르겠고, 베트남계 동양인과 프랑스계 백인 사이에서 난 혼혈인 엄마는 내가 십 대 후반쯤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호텔에서 잠깐 일 했던 것 외에 직업이 없었던 엄마에게는 이상하게도 남겨진 재산이 좀 있었는데, 나의 아버지로 의심되는 인물이 신탁으로 맡겨뒀던 그 돈은 내가 성인이 된 후에도 꽤 많았다. 내 출생과 관련된 돈이라는 것쯤은 알았지만 상관없었다.


딱히 돈 쓸 일도 많지 않았고, 학교에 굳이 다니지 않아도 배울 수 있는 기회는 많았다. 하루하루가 너무 지루하고, 의미가 없었다. 제법 예쁘고 호감이 가는 외모 덕분에 어딜 가든 환영은 받았지만, 그것도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 했다.


가진 것에 대한 고마움을 몰랐고, 그로 인한 미안함은 더더욱 알 리 없었다.


셰어하우스를 전전하며 이곳저곳의 학생들을 만나고 이야기하며 난 사회생활을 익혔다. 모든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대화와 어떤 사람의 앞에서 한 이야기를 그 사람이 없는 뒤에서 돌려하는 법을 깨달았다.


그렇게 길고양이는 어느덧 도둑고양이가 되어버렸다.




“뭘 좋아해?”

“무슨 말이야?”

“좋아하는 것 말이야. 어떤 걸 좋아하냐고.”




비가 또 왔다. 셰어하우스 거실에는 긴 소파가 있었고, 모두가 학교에 가버린 후의 낮에는 나 혼자 소파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날 킴은 수업이 없었는지 아니면 일부러 가지 않은 것인지 나와 함께 있었다. 고요한 셰어하우스와 창밖에 떨어지는 빗소리, 그리고 언젠가부터 켜 둔 오디오 소리.


베이스가 주를 이루는 재즈 음악 같은 것이 흘렀다. 인사 같은 질문이었는지, 아니면 침묵을 깨기 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킴은 나에게 그런 질문을 했다.




“글쎄. 딱히.”

“좋아하는 것 하나 정도는 있어야 인생이 즐거워.”

“그런가. 즐겁지 않아도 살만한데.”

“기왕이면 즐거운 게 좋잖아.”

“넌?”

“나?”

“넌 뭘 좋아하는데?”

“난, 지금 이런 거. 비 오는 날 음악 듣는 거.”

“아. 되게 단순하네. 그런 거면 나도 있어.”

“뭔데.”

“낙서 같은 거.”

“그림?”

“낙서. 그림은 배운 적 없어.”

“그림은 배우는 게 아니야. 그냥 그리는 거지.”




킴은 아까부터 끄적거리고 있는 나의 노트를 휙 빼앗았다. 그리고 한 참을 뒤적이며 보더니 이내 심각한 얼굴로 나에게 돌려주었다.




“그런데 넌 좀 배워야겠다.”

“야.”




킴의 그 말에 난 얼른 노트를 덮었다. 놀리듯 웃던 킴은 창밖의 빗소리에 맞춰서 허밍 하듯 낮게 흥얼거리며 노래를 불렀다.




“너도 노래는 좀 배워야겠네.”

“난 그냥 공부하는 게 즐거워.”

“세상에.”

“제인.”

“왜.”

“좋아하는 게 없으면 날 좋아하는 건 어때?”

“…….”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킴은 웃었지만, 그 순간 난 웃을 수 없었다. 장난 같던 고백 같은 그 말에 정말 그렇게 될 것 같아서, 그 말처럼 그녀를 좋아하게 될 것 같아서 따라 웃을 수 없었다.


그렇게 사랑은 쉬웠다. 세차게 쏟아지는 비에 금방 흠뻑 젖어버리듯이, 그 짧은 순간이 나에게는 사랑으로 쏟아져 내려 그동안 내가 믿었던 모든 감정들을 적셔버렸다.




-




킴은 한 동안 밝은 갈색머리의 백인 남자를 만났다. 영국인지 아일랜드인지 어디에서 왔다고 했던 것만 기억이 난다. 그는 킴과 나이 차이가 제법 많이 났다. 지나가다 한 번 인사를 나눴던 그의 무표정에서 난 어떤 매력도 느낄 수 없었지만, 그를 바라보는 킴의 얼굴은 여름날에 비를 머금은 꽃 같았다.


나는 일부러 그 남자가 하는 강의를 몰래 찾아가 맨 뒷자리에서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하필이면 그 강의는 미술사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난 킴의 말처럼 그림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를 차근차근 배우는 건 너무 더뎠다. 난 둘셋, 그 이상의 것들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며 시간을 빠르게 소멸시켜 나갔다.


그 소멸의 시간에서 나는 킴을 일부러 피해 다녔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때의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돌아갔어.”

“왜?”

“가족이 기다린대.”




어느 날 오랜만에 셰어하우스의 거실에서 마주친 킴은 비가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초점이 없는 눈으로 말했다.




“널 사랑하지 않은 거야?”

“제인.”

“응?”

“사랑은 쉬워. 지키는 건…, 어렵지.”

“…….”

“난 쉬운 것만 하고 싶었나 봐.”




활짝 피어났던 그 얼굴은 짧은 꽃의 계절이 지나자 금세 져버리고 말았다. 아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했다. 다시 돌아온 그녀의 학교 생활은 예전 같지 않았다. 원래 게으른 고양이 같은 나와 달리 거실에 늘어져있는 킴을 볼 때면 늘 아슬아슬함이 느껴졌다.


어느 날 외출에서 돌아왔을 때, 약을 먹고 쓰러져있던 킴을 발견했다. 병원 응급실에서 그녀의 부모님에게 연락을 하려는 나를 그녀가 말렸다.




“제인.”

“응?”

“난 이제 기다리는 가족이 없어.”

“넌…, 똑똑하잖아. 괜찮아.”




위로라고 튀어나온 말이 그런 것뿐이었다.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대화와 환심을 사는 이야기 따위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 고마워.”

“다시는 바보 같은 짓 하지 마.”

“그래야지….”




이제 킴에게는 기다리는 가족이 없지만, 새로운 가족이 생길 거라는 사실을 병원에서 알게 되었다. 삐- 하고 이명이 들렸다. 담담하게 듣고 있던 킴과 달리 난 그녀의 배를 뚫어져라 빤히 쳐다보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며 킴의 손을 잡아주었다.


다행스럽게도 셰어하우스의 또 다른 메이트였던 혜숙과 현우는 그런 킴을 많이 신경 써 주었다. 머나먼 나라에서 온 가난한 고학생 커플이었지만 그들은 언제나 행복했고, 또 다정했으며 너그러웠다.


나에게 그들은 가장 이상적인 커플과 가족을 보여주었다. 내가 한 번도 가져본 적 없었던, 어쩌면 앞으로도 가질 수도 없는 가족의 모습, 서로를 제 몸처럼 아끼는 사랑이라는 건 어떤 것인지 그들은 보통의 매일로, 그리고 우리 주변의 생활로 보여주었다.  




“이제 곧 출산 준비를 해야 하지 않아? 킴, 부모님에게 연락을 해 보는 게 어때?”




혜숙의 걱정스러운 한 마디에 킴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 또한 함께 고개를 저었다. 킴의 부모님은 이제 그녀의 가족이 아니었다.


셰어하우스에 있던 모두의 걱정과 불안, 그리고 축복 속에 한 겨울이 시작되는 크리스마스 밤에 킴은 새로운 가족을 맞이했다. 빨갛게 익은 사과 같은 아기의 얼굴은 킴을 닮은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쉽게 사랑했던 그를 닮은 것인지 몰라서 한참 바라봤다.




“제인.”

“말해.”

“날 사랑해?”

“…, 아니.”

“그래, 다행이네.”

“널 좋아해. 많이. 네 말대로 좋아하는 게 하나 정도는 있으면 인생이 즐거울 것 같아서. 그뿐이야.”




조심스럽게 아기를 안고 있던 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내가 신경 쓰이는 건 그뿐이었다.




“그럼 이제부터는 내 아기도 좋아해 줘.”

“그건 싫어.”

“왜?”

“그냥. 너무…, 무서워.”

“뭐가.”

“많이 좋아할까 봐.”

“바보구나.”




얼떨결에 아기를 넘겨받은 내가 혹시라도 실수하지 않을까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고 있으니 킴은 웃었다. 크게 웃지는 못했지만 그 웃음 끝에 걸려있던 마지막 말이 나에게는 그녀의 유언이 되었다.




“원래 좋아하는 건 말이야. 더 많이 좋아하려고 시작하는 거야.”

“안 피곤해? 좀 자둬.”

“제인, 약속해줘.”

“뭘.”

“사랑은 됐으니까 그냥…, 아주 많이 좋아해 줘.”

“알았어.”

“살면서 가장 필요한 일일 거야.”

“알겠다고.”

“됐어, 그럼.”

.

.

.

.

.

.

다시 비가 마구 쏟아지는 계절이 되었다. 이상하리만치 비가 자주 왔다.


사랑의 계절은 짧고도 짧았고, 그 후의 이별은 아주 길고도 길었다. 그녀가 떠나버린 후에 난 그 모든 것들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은 내가 떠난 것인지 그녀가 떠난 것인지 가끔은 헷갈릴 때가 있다. 아니면 아무도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가 오는 날이면 숨 쉬듯 그녀의 기억이 났다. 빗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눈을 뜨니 킴이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비가 온대, 제인. 곧 공항이야.”




아니다, 킴을 닮은 아이가 나를 보고 있었다. 그녀를 닮은 얼굴과 표정으로.


현재 도착하는 지역의 날씨를 알려주는 안내 방송이 나왔던 모양이다. 비행 중인 상공에 비가 오는 것도 아닌데, 빗소리가 계속 들리는 것 같았다.  


그녀를 닮은 아이를 잠시 동안 떠나고서야 나는 알았다.  


떠나버린 쪽이 더 그리워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남겨진 사람은 그리워할 뿐이지만, 떠나버린 이는 후회까지 함께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치료를 포기하고 다시 돌아왔을 때, 마주한 아이의 얼굴에서 난 그리움이 아닌 원망을 보았다. 그 또한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다. 지키는 건 늘 어려운 일이다.


여전히 사랑하지 않는 것이 옳다. 이 아이를 많이 좋아하는 것에 그쳐야 한다.


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이미 그녀가 충분히 하고 있을 테니까. 세상 어느 누구도 그녀만큼 이 아이를 그리워하고 사랑하지는 못 할 테니까….




“J…, 도착하면 쿠키 구워줄까?”




거절의 대답이 돌아올까  괜히 담요 안으로 숨어들었다.  




“그래…, 크리스마스잖아. 케이크도 같이 만들어.”




아이의 대답에 빗소리가 그쳤다. 역시 사랑은 너무…,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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