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궤도: 그 자리에 또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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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한 조명 아래에 근사하게 차려입은 사람들. 홀 가득하게 모여 있는 그들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자니 따분할 뿐이었다.
재희는 잔을 들고 있던 손을 바꿨다. 아까부터 자꾸만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시선을 모른 척하고 있지만 곧 궁금증을 못 이긴 남자는 자신에게 말을 걸 것이 분명하다.
“잠깐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죄송합니다. 곧 가야 해서요.”
“작가님 작품의 팬입니다. 혹시 괜찮으시면….”
그때, 그 장소의 분위기와는 완전히 반전된 남자가 정문으로 등장하면서 대화는 중단되었다.
크게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카락, 잿빛 눈동자를 가진 라틴계 남자는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곧 재희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큰 키에 어울리는 슈트와 단단한 몸매가 드러나는 그의 셔츠, 한 눈에도 매력이 넘치는 그 남자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왔다.
“죄송해요. 다음에 뵙죠.”
우아하게 돌아서는 재희를 보며 말을 걸었던 남자는 아쉬운 표정이었지만, 재희에게 손을 내밀며 다가와 익숙한 듯 팔짱을 끼는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 어울려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미안, 미안.”
진심으로 미안한 듯 웃는 남자의 얼굴이 홀로 내려오자 곧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보여 준다.
“불안하게 웃지 마. 그냥 가.”
“음악이 너무 아깝잖아. 한곡만 추고 가자. 응?”
“싫어.”
재희의 대답을 무시하는 듯 부드럽게 리드한 남자는 조금 전보다 템포가 빨라진 음악에 그녀를 이끌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재희는 남자의 리드에 따라 얼마 전 겨우 익숙해진 스텝을 띄엄띄엄 밟았다.
“거봐. 잘하잖아. 나쁘지 않지?”
“리드를 잘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래도 한 곡 만이야.”
“다들 지켜보는 자리니까, 더 다정할 필요가 있지.”
음악이 끝나자 모두들 두 사람에게 박수를 보냈다. 전시회의 성공적인 마무리를 축하는 자리에서 주인공인 재희는 전혀 즐기고 있지 않는 것 같아 보여서 주최 측은 걱정을 했었지만, 이 모습으로 주최 측도 손님들도 모두 흡족한 끝을 보게 된 것이다.
“먼저 가 볼게요. 오늘 멋진 자리 너무 감사합니다.”
예의 바른 인사를 끝으로 건물을 나온 재희는 남자가 차문을 열어주자 그대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올려 묶은 머리 때문에 제대로 기댈 수도 없었다. 미간을 찌푸리다가 살짝 옆으로 기대며 눈을 감았다.
“집으로 가면 되는 거지?”
“당연히.”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았던, 돈으로 시작해서 상품으로 끝나는 전시회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재희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조금씩 계속 손을 대고 의견을 전달하고 후에 다시 확인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그리고 그 덕분에 며칠째 잠을 잘 수 없었다.
“다 왔어. 괜찮아?”
“응.”
“안 괜찮은데?”
“맞아, 안 괜찮아. 좀 자야겠어.”
남자는 익숙한 듯 넓은 정원 앞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재희를 부축해서 정원을 가로질러 큰 현관문을 열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지나쳐 바로 회랑을 거쳐 또 다른 별채로 향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마리아는 아직 주방에 있는 거야? 얼른 가 봐.”
“아까 차 가지고 나갈 때 봤어. 정리하고 아마 잠드셨을 거야.”
“그래, 너무 늦었지.”
11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본채보다 조금 작은 별채는 작은 정원을 뒤에 두고 있었고, 큰 유리문으로 연결되어 마치 정원의 한가운데 있는 것 같았다. 본채에는 크고 작은 침실과 욕실, 주방, 거실 등의 주거 공간이 뚜렷하게 있었지만, 별채에는 작업실과 침실, 그리고 거실의 경계가 없었다. 재희는 별채 중앙에 놓여있는 큰 소파에 자신의 몸을 눕히듯이 기댔다.
“옷은 갈아입고 자.”
“잔소리하지 마. 정말 기운이 하나도 없어.”
재희의 대답에 남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소파에 엎드려있는 재희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정성스럽게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그냥 가.”
“그럴 수는 없지.”
“설마, 오늘도 봐야 하는 거야?”
“당연하지.”
“오늘은 춤도 췄잖아.”
“정확히 해. 그건 네 비즈니스였잖아. 계약은 계약이야.”
“알았어.”
머리를 정성스럽게 풀어주던 남자는 모두 정리가 되자 재희의 옆에 앉았다. 휴대폰을 꺼내고 눈앞에 있는 AV시스템 리모컨을 이리저리 눌렀다.
“오늘은 뭐야?”
“짜잔~ 티저가 떴어. 모레 새 앨범이 나오잖아.”
“꼭 여기서 봐야 하는 거지?”
“이렇게 좋은 시스템을 안 쓰는 건 낭비고, 죄악이야.”
“알았어, 알았어.”
잔뜩 흥분한 얼굴로 열변을 토하는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남동생 달래듯이 재희는 웃었다.
열에 아홉이면 호감을 가질 외모에 큰 키, 유명한 에이전시에서 두어 번 모델 제의가 있었고, 이 지역에서는 제법 유명한 대학에도 다니고 있다. 그를 알게 된 건 2년이 다 되어 가지만, 재희에게 그는 아주 오래된 가까운 친구 같았다. 남들이 볼 때는 분명히 다정한 연인 흉내를 내고 있지만, 사실 남자는 재희의 연인이 절대로 될 수 없었다.
“그래. 보자, 봐.”
“티저만 같이 보고 쉬어. 진짜 너무 피곤해 보인다.”
“고맙네.”
안젤로, 마리아의 막내 손자인 그는 게이다. 아직 자신의 정체성을 밝힐 용기는 없어서 지금은 재희의 남자 친구 역할을 해주고 있지만, 그가 그런 역할을 해주는 대신 재희는 별채의 최신 AV시스템을 이용해 그의 비밀스러운 취미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세상에, 저 얼굴 좀 봐. 너무 매력적이야. 봐, 봐!”
“알았어, 보고 있어.”
“어쩜 저런 얼굴을 보고 반하지 않을 수 있는 거야? 제정신이야?”
“지금은 완전 안젤라네.”
그는 태아 때 쌍둥이 누나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함께 태어날 수는 없었고, 그래서 자신의 성 정체성이 누나를 대신해서 가지게 된 것은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다고 했다.
재희는 요즘 유명하다는 남자 아이돌 그룹의 새로운 뮤직비디오 티저에 푹 빠져있는 안젤로를 보다가 다시 소파에 몸을 조금 더 편안하게 기댔다. 눈이 점점 감겼다. 안젤로가 담요를 자신에게 덮어주는 것 같았다.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별채에 연결된 문 두 개 중 하나는 침실이었지만, 재희는 그곳을 작품 보관실로 사용했다. 어차피 이곳의 침실은 재희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깊은 잠이란 그저 가끔 재희에게 찾아오는 것이었다.
…, 오랜만에 꿈을 꿨다. 원우의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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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듬히 보는 시선이 낯설었다. 길고 깊은 눈매에 보랏빛이 감돌았고, 젖은 머릿결이 흩날리고 있었다. 셔츠를 입지 않은 그는 슈트가 깊게 파여있어 움직일 때마다 단단한 가슴팍이 드러났다.
원우는 움직이는 입술로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그 말이 잘 들리지 않아서 재희는 미간을 찡그리며 그 입모양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이 사랑을 모두 지우라고 한다면, 결국 나를 지울 수밖에 없어.”
아니야, 그러지 마. 너를 지울 필요까지는 없어. 그런 건 사랑이 아니야. 나 따위는 절대로 너에게 그런 게 될 수 없어. 그렇게 되면 안 되는 줄 알아서 지금 이렇게….
재희는 지금 자신이 꾸고 있는 꿈이 너무 생생해서 눈을 깜박거렸다. 그리고 깜박이는 순간 원우는 시호로 변해있었다. 밝은 금발로 변해버린 시호였지만 재희는 그의 얼굴을 금세 알아보았고 또 반가웠다. 그리고 이제 이 모든 것들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벽면 가득한 화면에 시호가 건방진 표정과 심각한 표정을 오고 가며 열심히 노래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군무가 나오고, 예전에 무대에서 봤던 그 춤 선이 예뻤던 그도 다시 등장했다.
“뭐야. 왜….”
“잘하지? 얘네 진짜 잘하네. 데뷔한 지 3년 차라고 하던데, 너무 잘해. 노래도 안무도 다 좋아.”
“…….”
“무엇보다 다들 매력이 있어.”
“안젤로….”
“응?”
“이제 그만 가 줘. 진짜 좀 쉬고 싶어.”
“아, 알았어. 한 시간은 됐으니까.”
“늦었는데 게스트룸에서 자고 가.”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 잘 자.”
안젤로는 재희의 말에 금세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마침 벽면에 있던 원우의 얼굴이 클로즈업된 장면은 금방 암흑이 되었다.
“잘 자.”
안젤로가 나가고 난 후, 담요를 끌어안고 재희는 한동안 망부석처럼 멈춰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 안젤로가 검색하였던 기록을 리모컨으로 천천히 다시 눌러보았다.
“… 원…, 우야.”
정말 다시 등장하는 그의 모습에 재희는 한 동안 또 뚫어져라 뮤직비디오를 보기만 했다. 많은 멤버들 사이에서 간간히 나오는 그의 모습을 좇아서 천천히 다시 돌려보기를 몇 번 하다가 결국 멈춰버렸다.
도망쳤다. 피했다. 잊을 수 없으니까, 그 방법뿐이었다.
그가 정말 자신을 찾아 이곳으로 올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런 여지나 단서조차 남기고 싶지 않았다. 얼마든지 연락할 수도 있었다. 연락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그런 여유가 재희에게는 없었다.
먼저 연락해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무너져 버릴 것 같았다. 겨우 버티고 있었던 그 모든 힘든 순간들을 뿌리치고 다시 원우에게, 한국으로 돌아가버릴 것 같았다.
충분히 시간이 지났고, 이제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 끝도 모를 높은 궤도를 돌게 되었는데…, 그의 얼굴을 이렇게 다시 보는 순간 무방비 상태로 그 높은 곳에서 떨어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결국 재희가 안전한 추락으로 그에게 사랑이 되어 내리던 그날…, 노을이 지던 그 호수가 기억 나 버렸다.
원우의 검은 머리카락은 붉게 빛나서 밝은 갈색이 되었다. 지금 화면에 있는 그의 머리카락과 같은….
“미안….”
도망친 주제에 이렇게 그리워하는 것조차 미안했다. 원우는 자신을 잊었을지도 모른다. 그러기를 바라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모순된 마음은 여전했다.
현우가 자신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제인의 과거와 자신의 출생에 대한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재희는 생각했다. 이런 복잡한 모든 자신의 배경과 존재 자체가 원우에게 어떤 무언가가 될지…, 다정하고 자상한 예쁜 그 가족에 완벽한 조각을 부서트리는 것은 아닐지에 대해….
그리고 결국 재희는 도망쳐 버렸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다시는 원우의 그 소중한 모든 것들에 어떤 무언가도 되면 안 된다고 다짐했다.
맞다. 다짐하고, 다짐했다.
매일을 그렇게, 매 순간을 이렇게…….
원우의 얼굴은 다시 어둠이 되었다. 유리 너머의 새벽 달빛은 시리도록 차갑게 보였다. 매일과 매 순간의 다짐 따위가 무색할 정도로 그리움에 눈물이 고였다. 무릎을 끌어안은 채 재희는 다시 암흑 속으로 자신의 감정들을 들이밀었다. 지금 겨우 할 수 있는 것은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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