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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dcat혜진 Jul 04. 2021

세계와 세계, 4에서 5까지

| 안식: 그리움과 두려움 사이에서

-




재희의 머리카락을 정성스럽게 빗어주는 제인은 기분이 좋은 듯 작게 허밍을 했다. 그에 비해 제인의 머리카락은 날이 갈수록 빠졌다. 짧게 자른 머리는 치료를 위해서였지만, 더 이상은 긴 머리를 유지할 수 없었다. 재희에게 그런 건 별로 상관없었다. 그녀가 살 수만 있다면, 죽지만 않는다면….




“전시회가 잘 끝나서 다행이야.”

“재판도 잘 끝나서 다행이지.”

“아, 그랬지. 참.”




제인이 운영하는 사업에서 그림자를 걷어내는 것은 어려웠지만, 그동안 쌓아둔 인맥은 그런 어려운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주었다.


자신이 가진 그림의 값어치가 떨어지는 것보다, 제인이라는 매력적인 사람의 죄가 없거나 혹은 작다고 판단해주는 편이 훨씬 이득이라는 사실을 이 바닥의 사람들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결국 그녀가 처한 몹시 힘든 상황과 그 외의 여러 가지 것들은  재판의 결과에 유리하게 작용하도록 만들어주었다.




“그림을 다시 그릴 수 있어서 다행이야.”

“그림을 그린다고?”




제인은 재희의 머리를 마무리 짓더니 돌아보는 재희를 향해 웃었다. 가장 시설이 좋은 요양병원이었지만, 제인이 이곳에 오겠다고 먼저 말한 건 의외였다. 제인은 자신이 재희와 함께 그 집에 오래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재희는 아직도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 같았지만….


만약에 그곳에서 마지막을 맞이한다면 남겨진 재희가 더는 있을 곳이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떠난 사람도 남겨진 사람도 모두 견딜 수 없다는 건 최선의 선택이 아니니까.

 



“네가 그림을 그리기 전까지는 내 그림으로 먹고살았다는 사실을 잊지 마.”

“알아.”

“갈 때 가져가. 네 선물이야.”

“선물?”

“아무래도 쿠키에는 영 소질이 없으니까.”




제인은 다시 한번 웃었고, 재희도 따라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쿠키와 케이크는 역시 제인과 어울리지 않았다.




“J, 지난번에 말했던 거 기억나? 네 성이 왜 ‘윤’인지 말이야.”

“응.”

“…, 찾아가 봤어?”




제인은 재희에게 하루에 하나씩 그동안 말해주지 않았던 것들을 이야기해주었다. 무엇보다 재희의 성이 왜 ‘윤’인지 대해서도. 제인의 성은 미혼모였던 자신의 베트남계 어머니 쪽 성이었고, 재희와는 달랐다. 아무 의미 없는 성을 준 것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자신의 생모와 관련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그동안 절대로 할 수 없었다.


킴의 부모는 이민자의 길을 그대로 걸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래도 자녀 교육에 대한 열의를 버릴 수 없었던 그들은 많은 자식들 중 가장 똑똑했던 그녀의 대학 지원을 열심해 주었다. 그랬던 그녀가 학업이 아닌 사랑을 택하고 미혼모의 길을 선택했던 것은 그녀의 가족에게는 배신 아닌 배신이었고,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뭐하러.”

“그래도….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아이러니하게도 킴은 그녀의 가족을 잃는 대신 새로운 가족을 얻었다. 셰어하우스의 가족들은 그녀의 모든 선택에 진심으로 대해주었고 축하해주었다.


그런 그녀의 죽음은 새 생명의 탄생 소식과 함께 그녀의 ‘옛 가족’에게 전달되었지만, 킴의 아버지는 여전히 냉담했다. 그래도 소식을 전하고 그 자리를 떠나던 제인을 길 한복판에 붙잡았던 그녀의 어머니는 조금 달랐다. 친손녀의 입양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고, 더 할 일이 있으면 연락을 달라고도 했었다.


재희의 성인 ‘윤’은 그런 킴의 어머니 성이었다.




“달라진 무언가가 있을 수도 있잖아.”

“궁금하지 않아. 지금 내 가족은 제인이잖아.”




혹시라도 재희가 남겨진 사람이 되었을 때, 그녀의 곁에 누군가가 있어준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해준 이야기였지만, 재희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나 보다.




“그거 알아?”

“뭘.”

“네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재희의 얼굴에서 킴을 자꾸 찾아내게 된다. 자꾸만…. 하지만 그 말은 삼켰다.


제인은 자신이 제법 오래 버텼다고 생각했다. 재판은 끝났고, 이제 이대로 자신이 세상에서 사라지더라도 재희에게 부담이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이제 하루하루가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시간일 뿐이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장례식은 최대한 화려하게 해 줘. 알지?”

“무슨 소리야. 죽지 않는다고 약속했잖아.”

“세상 사람들은 모두 죽어. 그래도….”




제인은 재희의 볼을 쓰다듬어주면서 갑자기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거지.”

“조금만 더 버텨 줘. 이번에 임상실험이 끝나는 약이 있다고 했어.”

“한 달에 몇억씩 쓰는 이런 생활도 좋지만, 이제는 좀 쉬고 싶어.”




재희는 담담히 말하는 제인의 무릎에 손을 올렸다. 해가 지고 있었다. 노을이 지는 어느 날과 같았다.




“왜 그동안 내 그림에 사인 했어?”

“네가 너무 유명해지면 곤란하니까.”

“내가 유명해지면 곤란한 거야?”

“정확히는 네가 너무 재능이 뛰어나서 곤란했지. 사람들이 너를 너무 좋아할까 봐.”

“그건 왜 곤란한데?”

“J, 당연히…, 세상에서 너를 가장 좋아하는 건 나여야 하니까.”





제인이 선물로 준 그림을 가지고 나오면서 재희는 오늘이 왠지 마지막일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침대 위의 제인에게 인사를 했다.


돌아와 포장을 벗긴 그림에는 비가 내리는 창 밖으로 보이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흐릿한 뒷모습은 제인과 킴도, 현우와 혜숙도, 재희와 원우도 될 수 있었다. 누가 되었던 그 뒷모습은 처량하지도 않았고, 외롭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림 뒤편에 편지가 꽂혀 있었다. 처음으로 받아본 제인의 편지를 읽으며 재희는 그녀의 바람대로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편지에는 제인의 마음이 쓰여 있었다. 남겨지는 재희를 위한, 떠나는 제인의 마음이….




-

.

.

.

그 아이를 좋아하지?

무엇이 너를 망설이게 만드는지 알아.

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야.


아가, 넌 그냥 평범한 인간이야.

악마도 천사도 아니지.

그냥 지루한 인생을 살면서 가장 쉬운 사랑을 원하는 그런 아이일 뿐이야.

누군가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들거나 아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 따위는 전혀 없는 그냥 하찮은 인간이지.

언젠가 갑자기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평범한 사람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원하는 대로 살아, 망설이지 마.


그가 너를 만나서 불행해진다고 하더라도 그건 너의 선택 때문이 아니라 그 아이의 선택 때문일 테니까.


킴이 말했던 그렇게 쉬운 사랑을 하고,

누군가를 아주 많이 좋아하고, 또 싸우고 이별하고,

다시 만나기를 반복하더라도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

겁내지도 말고, 망설이지도 마.


어쩌면 막상 사랑을 한다면 찬란하고 아름다운 순간보다 비루하고 괴로운 순간이 더 많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그건 그대로  의미가 있을 거야.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사랑을 나누렴.


밀어내고 밀어내도 언젠가 다가올 것들은 그렇게 나에게 와서 안기더구나.

마치 내가 너를 만난 것처럼.

그런 네가 앞으로 무엇을 만들지 궁금한데,

이제 난 모두 다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아쉬울 뿐이야.

 

J, 재희야.

내가 세상에서 사라지면 네가 많이 울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정말 그럴까 봐 걱정되는 건 뭘까.

울지 않아도 괜찮아, 그리고 울어도 괜찮아.

어쨌든 이번 생은 제법 행복했어.

그리고 매우 재미있었어.

불안하고, 불행했던 때도 있었지만, 그 모든 것들도 의미가 있었어.


그건 모두 네 덕분이야.

그러니 이제는 네가 조금 더 자유롭기를 바랄게.


널 아주 많이 좋아해,

아직은 이 세상에서 내가 너를 가장 많이 좋아하는 사람일 거야.

그건 정말 확실해.

다만, 이제는 내가 세상에서 사라지고 난 후에 너를 나 만큼 좋아하는 사람이 있기를 바랄 뿐이야.

.

.

.

-




떠나는 사람의 날에는 비가 왔다. 추도사를 마치고 교회에서 나오자 비는 더욱 세차게 쏟아졌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커다란 우산을 든 채 묘지까지 함께 했다. 묘지에 도착했을 때는 다행스럽게도 부슬비로 바뀌었다. 사람들의 많은 위로가 끝나고 모든 장례식이 마무리되자 참석했던 인파가 천천히 흩어졌다. 그리고 재희는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집으로 가자.”

“응.”




안젤로가 재희의 어깨를 부축해주었다. 며칠 사이 더 가늘어진 어깨와 몸이 낙엽처럼 금방 끌려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도 재희는 울지 않았다. 사실 제인의 임종 이후부터 지금까지,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참은 건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긴 숨을 내쉬며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 자신의 보호자가 없다는 사실이, 법적으로 더는 자신의 가족이 없다는 사실을 되짚어 보았다.


그래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제인의 편지를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다. 그래도 눈물이 나지 않는다면, 닥터 사라에게 예약을 하고 상담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도대체 지금 상황에서 정상적인 감정은 뭘까.




“집 앞에 누가 있는데?”

“누구….”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와 원피스를 입은 여자 한 명이 대문 앞에 서성거리고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려는 것 같았는데, 마침 나타난 자동차에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재희는 그들을 보자마자 차문을 열고 뛰어내리듯이 달려갔다.




“재희야…. 우리가 너무 늦었지?”

“최대한 빨리 오려고 했는데, 비행기 예약이….”

“괜찮아? 너 혼자 얼마나 힘들….”




현우와 혜숙은 재희의 얼굴을 보자마자 걱정스러운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런 혜숙의 품에 달려가 안긴 재희는 그제야 눈물을 쏟았다.


이런 것이 필요했다. 이런 사람들이….


왜일까. 안젤로도, 마리아도, 닥터 사라도 분명히 자신을 걱정해주는 좋은 사람들인데….




“재희야, 괜찮아…. 제인은 좋은 곳에 갔을 거야. 울지 마.”




다독이며 해주는 별말 아닌 그 위로와 따뜻한 손길이 지금 재희에게는 전부였다.


급하게 오느라 호텔 예약도 겨우 하고 왔다는 말에 재희는 그들에게 게스트룸에 머물러 주기를 간곡히 부탁했다. 그날 밤 마리아와 안젤로 그리고 혜숙과 현우와 함께한 저녁이 재희에게는 꿈과 같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재희는 사흘 만에 깊은 잠이 들었다.


다음날 일어나니 오후였고, 이미 혜숙과 현우를 데리고 안젤로가 제인의 묘지에 다녀온 뒤였다. 짧은 일정으로 온 것이라 오래 있을 수 없는 그들이었다.




“이렇게 금방 가시는 게 어디 있어요.”

“그러게. 다음번에는 네가 오렴. 네 방 만들어뒀어.”

“제 방이요?”

“그래, 지난번에 찾아왔던 그 동네야. 주소 보내 둘게. 휴가가 생기면 꼭 와.”

“네.”




혜숙은 그동안 재희를 생각하면서 만들었다는 얇은 외투를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꺼내 입어본 재희의 모습에 잘 챙겨 먹으라는 말을 수없이 했다.  




“원우도 같이 오면 좋았겠지만, 해외 투어 중이라….”

“우리도 자주 못 본단다.”

“괜찮아요. 안부 전해주세요.”

“원우랑은 연락 안 하니?”

“아, 서로…, 바쁘니까요. 이제 연락하는 게 부담스러울지도….”

“무슨 말이야. 그럴 리 없잖아.”




혜숙현우는 기어이 그들의  주소와 함께 원우의  번호를 알려주고 떠났다. 공항까지 바래다준 재희는 그들이 떠나는 뒷모습을 계속해서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출국장 앞에   서있었다. 안젤로가 재희의 팔을 잡아당기자 퍼뜩 놀란 얼굴로 돌아보다가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왜?”

“나 방금 저 사람들 따라서 갈 뻔했어. 상상 속에서는…, 이미 비행기까지 타고 말이야.”

“가고 싶으면 가. 이제 떠나고 싶으면 떠나도 되잖아.”

“아니.”




재희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저들을 따라 한국으로 돌아가, 그들의 집에 가서 자신을 위해 꾸민 방을 보고 원우의 얼굴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자신을 막을 수 있는 건 없고, 누구도 자신에게 그 일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도 없다.




“안젤로. 그때, 내가 먼저 떠났어. 그래서 다시 돌아갈 염치 따위는 없어.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

“무서워.”




그가 나를 어떻게 볼지 몰라서…. 나를 밀어내거나, 아니면 본체만 체 할까 봐 너무 무서워.


그렇게 되면 지금 나를 위해, 제인을 위해 먼 하늘을 날아와준 저들마저 이번 생애 모두 잃어버리는 거니까. 따뜻한 그들을 잃고 싶지 않으니, 내 지금의 시간과 앞으로의 시간은 따뜻하면 안 되는 거야. 절대로. 그래서 난 다시는 저들의 따뜻한 그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 모순되지만, 그게 지금 나야.




“해변에 가서 좀 걸을까?”

“그래. 좋아.”




이상하리만치 비가 쏟아졌던 제인의 장례식 날과 달리 햇빛이 반짝하고 나는 날씨였다. 따뜻한 것이 지극히 당연한 미국 남서쪽의 계절이었다.


햇빛을 받으면 기분이 나아질지도 모른다. 안젤로의 팔을 잡고 재희는 웃으려 애쓰며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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