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결국, 나의 일이다

그 해프닝, 어쩌면 내 해프닝

지난 7월에 르브론 제임스가 자신의 고향인 애크론에 학교를 열었다. 그의 본래의 직업은 농구 선수이지만, 오프 시즌의 르브론 제임스는 스포츠뿐만 아니라 미국 사회 전반에 손을 뻗치는 셀러브리티이다. 게다가 학교 설립 행사 직후에 가졌던 CNN과의 인터뷰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비판도 빼놓지 않았다. 트럼프의 인종차별적인 행동에 대해 맞대응한 것이다.


제임스의 활동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현재 미국의 정치 환경에서 프로 스포츠 선수들의 역할 변화에 대해 다룰 다큐멘터리 <Shut Up and Dribble>를 제작했으며, 공식 트레일러 영상이 공개됐다. 이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지난 2월에 FOX 뉴스의 호스트 로라 잉그라함이 제임스를 저격한 발언에서 따온 것이다. 당시 그녀는 제임스의 사회 활동에 대해 아래와 같이 비난했다.


"고졸 공놀이 선수들에게 정치적인 조언을 받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훌륭한 선수들이지만 정치는 다르다. 그러니 닥치고 드리블이나 해라. (Shut up and dribble.)"


그녀의 발언에 스포츠 선수들은 물론 그들의 팬들, 그리고 수많은 시민들이 격분했다. 너희들은 정치에 참여할 자격이 안 되니 가만 있으라는 폭언을 그냥 넘어가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정치적 결정, 그에 따른 정책의 집행은 나의 일상까지 영향을 미친다. 정치적 조언은 내 일상 생활에 대한 피드백일 터. 따라서 닥치고 드리블이나 하라는 것은 일상에 어떤 불만이 있어도, 그냥 참고 넘어가라는 의미이다. 

로라의 말은 미국을 격분하게 만들었다 (사진 = 뉴욕 포스트)

스포츠 선수들, 특히 유색 인종 선수들에게 로라의 발언은 사실상 얼굴에 주먹을 휘두른 것과 같다. 자신들을 정치적 활동의 자격이 없는 '하층민'으로 규정하지 않았던가. 더구나 흑인이나 히스패닉 선수들은 숙명적으로 자신의 직업에만 매진할 수가 없다. 그들의 어깨에는 많은 흑인 빈민, 가난한 히스패닉들의 희망과 근심이 함께 짊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정치적 소신은 다른 정치인의 일이 아닌, 자신이 주도해야 할 일이 된다. 누군가의 롤 모델이 되어야 할 의무까지 있기에.


이런 일이 미국에서만 일어나는 해프닝은 아니다. 한국이라고 다를 게 있을까? 어릴 때 들었던 얘기 중 하나가 되도록 정치 얘기 하지 말고 니 할 일이나 잘하라는 얘기였다. 그 이유를 물으면 딱히 만족스러운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저 친구 사이와 가족 관계가 나빠질 수 있으니 삼가라는 말만 들었고, 그런 무거운 얘기에 함부로 나서지 말고 입 열지 말라는 말만 들었다. 심지어 연예인들은 정치적 발언 때문에 평생 낙인이 찍힌다. 정치가 그렇게 먼 나라 얘기이고, 육중한 주제였나?


사람들은 일상에서 불편한 점들을 고쳐 달라고 구청이나 시청에 건의한다. 본인이 사는 지역의 국회의원이나 시장이 마음에 안 들면, 선거 때 다시 뽑아주지 않는다. 얼마 전에 출시한 TV 모델이 수시로 고장나서 소비자들이 불편함을 겪고 그 소비자들이 강하게 항의하면, 기업에서는 즉시 리콜 조치를 한다. 그게 정치적 행동들이다. 내 인생에서 불편한 부분, 꼭 필요한 부분을 찾아서 고쳐 나가기 위한 모든 행동과 목소리가 정치 활동이다. 정치라는 단어가 그렇게 멀리 있는 단어가 아니다. 한국 사람들은 불과 2년 전에 정치 체제를 바로잡기 위해 스스로 촛불을 들었다.


정치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더라도, 여러 가지 사회 활동도 마찬가지다. 내가 속한 집단의 불편함은 어떠한 형태로든 나의 불편함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목소리를 내고 거리로 나가고 매체 앞에 선다. 내가 속한 집단에서 너의 일, 나의 일이 의미가 있을까?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던 할 일이 어딘가에 숨어있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대신 해 주고 있을 수도 있다. 내 눈앞의 일만 잘하면 '장땡'이라고 여기기에는 세상이 상당히 복잡하게 얽혀 있다. 나의 잘못된 무관심이 가깝게는 내 주변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멀게는 어딘가의 절실한 도움을 끊어버릴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너와 나의 구분이 없는 관심과 참여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결국은 남의 일이 아닌, 나의 일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다양한 형태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픽=netscan)

이런 경우가 어디에 있는지 깊게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 회사에서 한 명만 잘못 일처리를 해도 여러 부서가 피해를 입는다. 피해를 입은 부서에서는 나의 일이 아닌데 괜히 폭풍을 맞았고 생각하겠지만, 크게 보면 그들의 일이자 책임이기도 하다. 모든 프로세스의 요소를 자신의 일, 본인이 소속된 조직의 일이라고 생각했다면 서로가 일처리를 상세히 신경썼을 수도 있다. 내 눈앞의 일, 나한테 주어진 일만 신경쓰는 분업화는 명백한 구 시대의 유물이다. 


괜한 오지랖일 수도 있겠다. 지금 눈앞의 일도 바쁜데 왜 다른 동네, 다른 지업, 다른 나라의 일까지 신경써야 하는지 납득을 못할 수도 있을 터. 하지만 그 많은 일들이 종국적으로는 나의 피부로 와닿게 되며, 내 삶에 던져진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그것을 우리는 나비 효과라고 부른다. 그 나비 효과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나의 목소리로 흐름을 되돌려놓는 데 참여할 필요가 있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직업으로 삼을 수도 있다.


정치적 활동, 사회적 활동에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비즈니스라고 예외는 아니다. 왜 사람들이 지금 4차 산업 혁명에 주목하고 4차 산업과 관련된 교육까지 계속 형성되겠는가. 그것이 당장에는 산업의 형태를 바꾸고 나아가 나의 생활까지 바꿔놓기 때문이다. 지금은 머나먼 세계의 일이라서 피부로 와닿지 않지만, 얼마 뒤에 나도 모르게 내 옆에 있을 것이다. 분명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주어진 일과 생활은 아니겠으나, 곧 삶의 일부가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주시할 수밖에 없겠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 결국, 나의 일이다.

작가의 이전글 오타니의 도전, 극미(克美)의 결정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