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불편한 진실을 마주한다는 것

역사를 배우는 데에 선택지는 없다

<초한지>를 통해 사람들에게 가장 인상에 남은 이름은 항적 (항우) 이 아닐까? 진나라 멸망 후에 중국을 통일한 사람은 유방이었지만, 정작 후세의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사람은 항적이었다. 중국 역사상 최강의 용장이며, 역발산 기개세의 주인공인 항적은 지금까지도 힘과 낭만을 쫓는 남자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자신의 강함을 잘 알기에 세상과 타협하기를 거부하고, 끝내 우희의 남자로 남기를 택했기 때문이다. 


사실 항적은 군주로서의 역량은 낙제에 가까웠다. 강동에서 거병한 지 고작 2년만에 중국을 제패하고 서초패왕로 군림했지만, 기동력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투항한 진나라 군사 20만명을 지금의 뤄양 근처의 신안에 모두 생매장시켰다. 게다가 초나라의 의제는 자신의 앞길에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로 주변의 반대를 만류한 채 침현으로 유배보낸 후에 죽였다. 의제는 초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기 위한 명분으로 꼭 필요한 존재였지만, 항우에게 그런 점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항적은 자신의 힘과 출세를 보여준다는 허영심 때문에 정복한 지역을 수습한다는 개념이 전혀 없었으며, 고향에서 자신의 전공을 자랑해야 한다는 이유로 중원을 다스리기 최적의 입지인 관중을 포기했다. 세상의 흐름을 전혀 읽을 줄 몰랐던 항적이 역사의 패배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역사를 모르는 대중은 이러한 점을 애써 기억하지 않고 항적의 힘과 낭만을 <패왕별희>로 기억할 테지만, 역사적 이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항우의 실책과 잔인함을 기억하는 것이 당연하다.

남은 것은 사면초가

선택적 기억력 때문일까. 우리는 어떤 역사적 사건을 배우는 순간에도,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려 한다. 정작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 때로는 불편한 진실들을 외면한다. 사실이 가리키는 방향을 차마 볼 수 없을 것만 같아서, 그 길이 맞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길로 돌아선다. 항일 독립 운동 역사를 배울 때에도 우리는 불편한 진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백야 김좌진, 항일 무장 독립 운동의 대표적인 주인공이다. 역사 교과서에서 다루는 항일 운동에서 무장 투쟁은 가장 대표적인 줄기이며 그 많은 전투 중에서도 김좌진의 청산리 대첩은 빠지지 않고 나오는 사건이다. 홍범도의 봉오동 전투와 함께 세트로 엮이는 주요 이벤트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있다. 홍범도의 봉오동 전투, 완루구 전투는 전공과 관련된 기록이 남아있다. 봉오동에서 150명, 완루구에서 400명의 일본군이 사살된 기록이 존재한다. 실제로 봉오동 전투 기념비에는 150명의 일본군을 죽이고 보총 60자루를 빼앗았다는 글귀가 남아 있다. 그런데 청산리 대첩 기념비에는 전공 관련 얘기가 전혀 없다.


당시 임시정부에서는 김좌진의 독립군이 총 3,300명의 일본군을 사살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수치가 부풀려졌다는 증언들이 속출하면서, 1,200명 정도로 발표 수치를 낮췄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정확한 기록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게다가 당시에 청산리 전투에 투입된 일본군이 1,000명도 되지 않았다고 하니, 전과에 대한 발표의 신뢰도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청산리 대첩에 대한 얘기는 모두 '카더라 통신'이다.

청산리대첨 기념비에는 상세한 기록이 없다

그리고 정말 3,300명이 넘는 관동군이 전사했다면 일본 측에서 그냥 넘어갔을 리가 없다. 대대 단위로 치면 10개의 대대가 전멸했다는 얘기인데, 10개 대대 전멸이면 육군에게 얼마나 큰 피해인가? 이런 대형 사고와 관련된 기록이 전혀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본인들이 당한 사건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집요하게 기록하는 일본 사관들인데, 일본 측 기록에도 정확한 숫자는 없다.


자연히 김좌진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정말 한국인의 뇌가 그리는 독립 투사 김좌진인가? 정말 만주에서의 독립 투쟁을 주도한 위대한 장군이며 일본군을 공포에 떨게 한 인사인가? 지금까지 전해진 기록이나 증언을 종합해보면 긍정하기가 힘든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역사 교육에서 무장 독립 투쟁에 대한 환상을 이미 심어버리는 바람에 불편한 진실을 가르치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전쟁을 하려면 엄청난 돈이 필요하다. 정규군이든 의용군이든 싸우려면 돈이 든다. 그렇게 때문에 무장 투쟁은 엄청나게 돈을 많이 잡아 먹을 수밖에 없다. 무장 독립 운동을 계속 하려면 누군가로부터 후원을 받거나 재외동포들로부터 세금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을 하고 싶어도 못한다. 이시영 형제의 돈이 없었으면 신흥 무관 학교가 존재할 수나 있었을까?


그나마 홍범도와 같은 사회주의자들은 1930년대 이후로 소련 정부로부터 후원을 받았지만, 소련을 멀리 했던 민족주의 계열은 외부의 후원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재외동포들로부터 전쟁 경비를 갈취했고, 나중에는 같은 동포들마저 독립군들을 원망하기도 했다. 조선인을 위해 조선인의 등골을 빼먹는 아이러니에 빠진 셈이다.


김좌진이 그런 사람이었다. 강제적으로 10년치 세금을 강요하고, 만주인들에 대한 폭력을 서슴지 않았으며 공산당원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기도 했다. 그가 암살당한 것도 공산당 탄압에 대한 보복이었다. 참고로 김좌진이 암살당한 장소는 자신이 운영하던 정미소였다.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당시 조선인들은 김좌진을 영웅으로 떠받들었지만, 정작 만주에 살았던 동포들이 바라본 김좌진은 말을 타는 폭군이었다.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 나오는 마적패가 사실 우리가 알고 있던 만주의 무장 투쟁 조직의 실체였을 수도 있다.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이런 대사가 있었다. 건달들은 거리의 독립군이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웃을 것이다. 상인들의 돈을 갈취하고 서로 주먹을 겨누는 깡패가 무슨 독립군이냐며. 그런데 만주의 독립군이라고 사정이 달랐을까? 결국 그들도 재외동포의 고혈을 빨아먹었고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기도 했다. 환상이 깨지더라도 어쩔 수 없다. 이게 독립군의 실제 모습이었다.


나는 일전에 한일 합방과 관련해서 다른 커뮤니티에 긴글을 남긴 적이 있다. 교과서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사실들 위주로 밝혔다. 왜 우리가 잘못한 일들을 굳이 알아야 되냐는 악플이 달리더란다. 그만큼 우리는 역사 교육에 대해서는 아직도 멀었다. 역사를 제대로 배웠다면 김좌진을 포함한 독립 투사들을 맹목적으로 떠받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항일 독립 운동의 영향으로,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애써 감추는 일본을 매일같이 비난한다. 하지만, 한국의 역사학계나 대중들이라고 해서 같은 맥락의 비난을 피할 수는 없다. 한국이 베트남 전쟁에 남긴 상처는 아직까지 치유되지 않고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 주둔 지역에서만 민간인 9천 명이 학살당했으며, 이들을 기리는 위령비에는 보자인 (Vo Danh), 즉 이름도 없는 아기들이 보인다. 베트남에게는 씻기 어려운 상처지만, 진상조사는 여전히 답보 상태이다.

우리도 사과해야할 입장이다 (출처 : 한베평화재단)

최근에서야 '베트남 피에타'와 같은 조각상을 통해 한국 측의 반성이 조금씩 이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대중들에게는 부각되지 않고 있다. '베트남 피에타'는 위안부를 잊지 않기 위해 '평화의 조각상'을 만든 조각가 부부가 만든 작품이다. '평화의 조각상'이 우리가 위로받아야 할 상처라면, '베트남 피에타'는 우리가 처절하게 반성해야 할 상처다. 또한 우리가 평생 마주해야 할 불편한 진실이기도 하다. 어쨌든 우리가 안고 가야 할 책임이기에, 피할 수 없다.


지난 스즈키컵에서 박항서 감독의 베트남 대표팀이 우승을 차지했을 때, 한국 언론에서도 적잖은 기쁨과 축하를 표출했다. 축하의 대부분은 대부분 박항서 감독을 향했다. 그 축하와 위로가 이제는 베트남 국민에게로 가야한다. 그것 역시 반성의 일부일 터. 매번 코리아 패싱을 거론하는 아베 수상을 비난할 자격이 있으려면, 한국이 베트남 앞에서 진심으로 반성하는 것이 먼저다.


역사를 배우는 데에 선택지는 없다. 우리가 보기 좋은 것만 배울 수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다 똑같은 역사의 흐름 위에 있다. 모두 배우고 떠안고 가야 할 흔적이다.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매번 역사 속 불편한 진실을 피해왔다. 한국이 역사적으로 죄를 저질렀다는 말 자체가 쪽팔려서 고개를 돌려왔다. 그러나 진정으로 생각이 있는 나라와 사회라면, 시간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을 줄 알아야 한다.

작가의 이전글 우리에게 필요한 문화의 내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