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 계층의 통합을 생각해본다
한 때 필라의 운동화는 기능도 떨어지고 디자인도 촌스러운, 그야말로 기피의 대상이었다. 실제로 2003년에 필라 코리아는 파산 직전까지 몰렸을 정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는 데 실패했다. 불과 몇 년전까지도 남자가 필라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경우를 보기 쉽지 않았으며, 필라 운동화를 신고 다니면 소위 '찐따'라고 눈총받던 시절도 있었다. 그 정도로 소비자들에게 외면받았던 필라가 다시 각광받는 브랜드로 주목받고 있다. 그것도 10-20대에게 말이다.
지금의 10-20대는 필라 운동화가 촌스럽다는 인식을 모른다. 오히려 그들에게 필라는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는 신선한 브랜드와 같다. 90년대에 한때 유행했던, 지금의 30-40대가 20대 시절에 찾았던 디자인이 지금의 10-20대에게는 흔치 않은 변화와도 같다. 이러한 반응 덕분에, 필라의 2017년 매출은 전년 대비 162%나 증가했고 영업이익은 무려 1743%나 올랐다. 이른바, 뉴트로 열풍의 사례다.
2020년 1월 마지막 주에 발표된 광고 모델 브랜드평판지수가 다시 한 번 화제가 됐다. 남자 광고 모델 브랜드평판지수 부문에서 1위 공유, 2위 백종원의 뒤를 이은 인물은 무려 양준일이었다. 국민 MC 유재석, 현재 대한민국 축구의 아이콘 손흥민을 제쳤다. 온라인 탑골공원의 힘으로 무려 28년 만에 국내 무대로 돌아온 양준일 열풍은 2020년 초부터 식지 않고 있다. 심지어 그의 에세이 <너와 나의 암호말>은 예약 판매 시작 4시간 만에 15,000부가 팔려나갔으니, 이는 펭수 에세이보다도 빠른 페이스다. 뉴트로 열풍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
뉴트로 (New-tro), 새로움 (New)과 복고 (Retro)를 합친 신조어로, 복고를 새롭게 즐기는 경향을 말한다. 유행이 지나서 과거의 유물과도 같던 어떤 현상이나 사물이, 현 세대에게는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발명품처럼 느껴진다. 90년대 중반에 가수들이 자주 입었던 치마 바지가 다시 한번 패션 유행이 되고, 윈도우 95 운영체제로 즐기던 컴퓨터 게임이 현 세대의 놀잇감이 된다.
엄밀히 말하면 뉴트로는 창조보다 개조에 가깝다. 레고 장난감 블록을 이런저런 형태로 만들어 보듯이, 과거의 장난감이나 놀이 문화 등을 지금에 맞게 변형시킨 셈이다. 누군가에게는 과거를 보듬어보는 추억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지금의 문화에 대한 싫증을 씻어내릴 해독제가 된다. 자연히 특정 세대만이 아닌, 여러 세대가 같이 즐길 수 있다는 강점이 생긴다.
온라인 탑골공원이 그런 공간이었다. 90년대의 여러 명곡들이 지금의 30~40대에게는 예전 생각과 감정을 떠오르게 한다. 어릴 적에 TV로 보고 라디오로 듣던 노래들을 지금 스마트폰으로 다시 듣다 보면, 저절로 아날로그 감성에 빠진다. 반면 90년대를 겪지 못한 지금의 10~20대들에게는 궁금증과 충격을 줬다. 지금 가수들의 음악과는 많이 다르면서, 지금의 음악보다 덜 세련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묘하게 빠져드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계기는 다르지만, 빠져드는 데에는 세대 구분이 없다.
이러한 뉴트로 현상이 개인적으로 반가운 이유는, 지나칠 정도로 분절된 소비 계층의 통합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마케팅 전략이 극도로 세분화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일단 각 소비 계층의 성격이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며, 그 성격 차이의 근간에는 세대 차이가 있다. 40~50대와 30대 간에도 알게 모르게 세대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30대와 20대 사이에도 간극이 존재한다. 연령대별로도 간극이 잦은데, 여기에 지역과 소득 차이까지 고려하면 소비 시장의 계층은 지나치게 쪼개진다.
시장이 계속 쪼개지다 보면, 결국은 대형 마켓이 사라지고 색깔이 각기 다른 니치 마켓만 남는다. 이렇게 되면 비즈니스의 기회도 제한될 것이다. 성격이 다른 작은 시장들만 있다면, 비즈니스를 키우고 싶어도 시장을 아우르기가 어렵지 않을까. 소비자를 만족시킬 컨텐츠의 크기도 작아질 수밖에 없다. 뉴트로 문화는 이러한 시장 분절 시대의 연결 고리가 될 수 있으며, 소비자를 위한 컨텐츠의 크기를 키울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세대를 아우르면 경계를 허물 수 있고, 경계가 허물어지는만큼 시장의 크기는 커진다.
필라의 부활, 양준일 신드롬에서 우리는 뉴트로가 일으키는 마케팅 효과를 보았다. 뉴트로 트렌드에서 파생되는 또다른 트렌드도 나올 것이다. 그 많은 트렌드 탄생의 결말은 소비 시장의 만남으로 함축된다. 여행의 끝은 연인들의 상봉으로 끝나듯, 뉴트로의 끝은 시장의 만남으로 끝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