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원래 그런 건 없어

나를 가두는 편견의 피안에서

예나 지금이나 제일 질문을 많이 하는 사람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다. 어른들이 무슨 말만 하면 "왜요?" "왜 그런 거에요?"가 습관적으로 튀어 나온다. 여기에 제대로 대답해주는 어른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어느 순간 말문이 턱 막히고, 그 때마다 하는 말이 있다.


"그건 원래 그런 거야! 알았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대화를 종결시키는 멘트이다. 이 말을 할 때는 조금 엄격, 근엄하게 말을 한다. 애들도 이 말을 들으면 분위기를 눈치채고 더는 질문하지 않는다. 물론 너무 속상해서 눈물을 찔끔 흘리는 애들도 가끔 있으나, 이 말을 내뱉은 어른들에게는 아이의 기분보다 머리 아픈 대화에 종지부를 찍는 행동이 우선이다.


원래 그렇단다. 조금 과장을 섞어 해석하자면 300만년 전에 인류가 두 발로 걷기 시작할 때부터 쭉 그랬다는 뜻이다. 딴지를 건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얘기다. 우리가 그렇게 단순 무식한 존재였을까? 단순하고 사소한 이슈에도 열을 내는 우리가, 자기말에 조금이라도 딴지를 걸어오면 이유없이 속에서 화가 올라오는 우리가, 나를 조금이라도 이해해주지 못하면 좌절하는 우리가, 지난 300만년동안 아무런 이의 제기를 하지 않은 뭔가가 있었다는 건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단어도 변한다. 끊임없이

어쩌면 세대 갈등은 이 무책임한 말 때문에 빚어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걸 물어볼 때, 어른들은 으레 두루뭉술하게만 답하거나 그냥 원래 그런 거라며 단절의 벽을 세우기도 했다. 이해시킬 자신이 없으면 그냥 외우라는 주입식 교육을 돌아보면, 아무 이유없이 외운 적이 얼마나 많았던지. 그렇게 뇌 용량 초과 시점까지 무식하게 외우고 시험보면, 언제 외웠냐는듯이 머릿 속에서 부드럽게 지워진다. 이 무의미한 챗바퀴 때문에 좌절하고, 여기에 나를 밀어넣은 어른들이 괜시리 미워지고, 왜 그랬냐고 물어보면 원래 그런 거라면서 싸늘하게 돌아서고... 그렇게 서로를 향한 시선도 싸늘해진다. 원래 그렇다는 말 때문에.


돌아보면 우리 주변, 많이 변했다. 부모 세대가 살았던 시대와, 지금의 청년들이 사는 시대는 너무나도 다르다. 크게는 정부와 경제 정책이 달라졌고, 작게는 전화기의 기능과 교과서 내용, 입는 옷, 점심 메뉴까지 달라졌다. 먹고 입는 게 다르니, 생각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달라진 환경 속에서는 이전에 맞다고 생각했던 게 틀린 게 될 수도 있다. 과학 이론도 수없이 맞고 틀리기를 반복하는데, 사람 머릿 속의 생각도 시대에 따라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지 않나.


이렇게 달라지는 세상 속에서도 맞다고 우기는 것, 원래 그런 거라고 단정하여 장막을 세우는 것, 그것을 나는 편견이라고 부른다. 편견은 경험 부족, 좁은 시야 때문에 오기도 하지만, 그저 맞다고만 생각할 때도 생긴다. 한번 받아들인 것에 대해 의문을 가져보지도 않은 채 무조건 맞다고 나사를 박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고인 물로 변해버린다. 그렇게 나의 눈과 마음이 혼탁하게 변하고, 언젠가는 눈을 뜨고 싶어도 뜰 수 없는 비극까지 이르고 만다. 무비판적으로 무언가를 받아들인다는 게 알고 보면 이렇게 무섭다.


천만 다행이라면, 원래 그렇다는 권위적이고 진부한 말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는 것. 나는 대표적 경우로 세이버메트릭스를 꼽는다. 이제 미국이나 한국이나 야구계에서 세이버메트릭스를 빼놓고 논리적 전개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세이버메트릭스는 상당히 깊이 들어와 있다. 세이버메트릭스의 창시자인 빌 제임스가 이러한 고품격 통계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질문 덕분이었다. 기존의 경험에서 발생한 편견에 대해 항상 의문을 갖고 질문을 던지며, 숫자를 통해 정확한 사실을 향해 나아간다. 원래 그렇다는 야구계의 정설, 혹은 통념을 그냥 받아들이지 않고 한두 번쯤 고개를 갸웃거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야구의 편견을 쪼개어 정확한 사실을 본다

굳이 우리가 통계적 사실을 들이대지는 않더라도, 나를 가두고 세상을 가두는 편견에 대해 한번쯤은 저항해야 세상을 조금 더 넓게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어릴 때 배운 시각이 절대 전부는 아니며, 지금 이 시간에도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이 새로이 변하려고 꿈틀대기도 한다. 나를 둘러싸는 세상은 변하는데 나의 눈이 변하지 않는다면, 나는 평생 세상을 틀리게 바라볼 수밖에 없겠지. 원래 그런 거라며 마음 한 켠까지 닫는 한, 한평생을 혼자만의 착각과 나르시시즘에 빠질 것이다.


물음표가 있어야 느낌표가 있고, 그 느낌표가 깨달음의 방점을 찍어준다. 삶에 온점과 마침표만 있다면, 그 어떤 여지도 없다는 것이며 이는 곧 나를 가두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스스로가 자기도 모르게 멈춰 버린다면, 지금의 사회적 용어로 '적폐'가 되어 버린다. 적폐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원래 그런 거라는 권위적 의식과 편견으로 스스로를 가두면서 세상을 그릇되게 인식하는 모든 것이 적폐 아닐까. 


요즘 40~50대 직장인들이 많이들 변화의 물결에서 흔들리고 요동친다. 이전과는 눈에 띄게 달라진 업무 환경과 직장 문화 때문에, 여기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다. 이 물결을 수용하는 사람은 계속 커리어를 유지하면서 유능한 가장이 되겠지만, 그 물결을 편견의 틀 안에서 거부하는 이는 '꼰대'로 낙인찍히고 세상이 달가워하지 않는 이로 쓸쓸하게 살아야 한다. 꼰대가 되지 않으려 몸부림치는 직장 상사가 있다면, 그는 그래도 삶이 편견에 갇히지 않았다고 인정해주는 게 맞는 것 같다.


가두지 말자. 나를 가두지도 말고, 세상을 가두지도 말자. 나를 둘러싼 세상은 지금도 조금씩 흔들리기도 하고 앞으로 한발짝 걸음을 옮기기도 한다. 대한민국 사람들의 핫플레이스가 영원히 카페가 되리란 법은 없다. 한번 강대국이 영원한 강대국이 되리란 법도 없다.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유연하게 밖을 바라보고 내 안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지금을 살아가는 제1원칙이리라. 


원래 그런 것은 없다. 

작가의 이전글 그냥 열심히? 그건 삽질이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