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고시엔, 그리고 2014년 월드시리즈
한국의 전체 스포츠 팬 중 70% 이상은 야구 팬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만큼 프로야구에 열광하는 나라는 찾기 힘들다. 일본 역시 가장 인기 있는 종목은 야구이다. 프로야구의 역사도 한국보다 46년이나 빠른 1936년부터 시작될 정도로 유서가 깊다.
그런데 일본의 야구 팬들이 가장 열광하는 야구는 프로야구가 아니다. 바로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이른바 고시엔 대회이다. 일본의 니시노미야에 위치한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다고 해서, 고시엔 대회라고 부른다. 이 기간에는 고시엔 구장을 홈 구장으로 사용하는 한신 타이거즈도 구장을 비워야 한다. 고시엔 대회는 1915년부터 시작되었으며, 2차 대전 기간을 제외하면 매년 같은 장소에서 열렸다. 한국의 고등학교도 일제 강점기에 고시엔 대회에 참여한 적이 있었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참고로 고시엔에 최초로 참여한 한국의 고등학교는 부산공립상업학교 (現 부산 개성고등학교) 였다.
무려 4,000개가 넘는 고등학교들이 참여하지만 모든 경기가 토너먼트이기 때문에, 고시엔에서 우승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와도 같다. 반대로 말하면 고시엔 우승은 고등학교에게 크나큰 영광이다. 그래서 일본의 고교 야구부 학생들은 오늘만 사는 사람들처럼 고시엔 대회에 나간다. 무슨 사무라이도 아니고, 지쳐 쓰러지더라도 경기장에서 다 쏟아붓고 기절하겠다는 각오로 야구를 한다.
고시엔은 일본의 야구 역사에 남을 명장면을 여러 번 연출했다. 오늘만 살아도 괜찮다는, 우리에게 내일의 태양은 뜨지 않아도 좋다는 간절함 때문이었을까. 모두가 기적이라고 부를 만한, 이것이 인간의 삶에서 가능한 얘기냐고 반문할 만한 일들을 팬들은 여러 차례 목도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팬들이 감정 이입하고 열광하고, 선수들과 감정을 같이 한다. 선수들이 울면, 관중들도 같이 운다.
가장 유명한 일을 꼽아보라면, 2007년 대회에서 일어났던 사가키타 고등학교의 기적이 떠오른다. 다시 일어나기도 힘든 기적이었다. 사가기타 고등학교는 체육특기생이 한 명도 없었다. 야구부 총 인원은 야구에 필요한 최소 인원인 9명밖에 없었다. 심지어 야구부 감독도 없었고, 학교에 제대로 된 조명이 없어서 야간 훈련도 못하는 학교였다.
그런 학교가 기적을 만들어 나갔다. 1회전에서 후쿠이 상고를 3:1로 제압했다. 1회전에 힘을 쏟아부어서 이겼다고 선수들이 하나같이 기뻐했다. 주장이었던 이치마루 다이스케는 1회전 승리로 만족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힘을 쏟아붓는 경기가 2회전, 16강, 8강, 4강까지 계속되더니 급기야 결승전까지 진출했다.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오늘만 야구하고 말겠다는 투혼이었다.
기어이 결승전까지 진출해서 만난 상대는 고시엔 우승 2회의 명문, 교료 고등학교였다. 심지어 교료 고등학교에서 등판한 투수는 당대 최고의 고교 투수였던 노무라 유스케였다. 심지어 포수는 2017년 일본 국가대표팀 포수이자, 현재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주전 포수인 고바야시 세이지였다. 누가 봐도 넘기 어려운 벽이었고, 사가키타 고등학교의 기적은 여기까지라고 다들 생각했다. 0-4로 끌려갔던 7회까지는.
8회말. 드디어 기적의 신호가 울려퍼졌다. 2개의 안타와 볼넷으로 주자 만루가 되었고, 만루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2번 타자 이데 카즈마가 밀어내기 볼넷을 얻어내며 드디어 1점을 얻었다. 또다시 만루, 그리고 타석에는 3번 타자 소에지마 히로시가 들어섰다. 원 스트라이크, 원 볼 상황에서 노무라가 바깥쪽 직구를 던졌고, 소에지마가 방망이를 힘껏 돌렸다. 그리고, 공은 좌측 담장으로 넘어갔다. 고시엔 최초의 역전 만루홈런이 터진 순간이었다. 역사상 가장 짜릿한 5-4 역전이었다.
9회에 투수 구보 다카히로가 삼진으로 경기를 끝내는 순간, 선수들 모두가 뛰쳐나와 환호했다. 당시 캐스터도 흥분하여 환호했다.
三振!! 佐賀北高校が、甲子園球場で、奇跡を起こしました!
(삼진! 사가기타 고교가 고시엔 구장에서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 누가 알았을까? 제대로 된 야구부도 없고, 야구 특기생조차 없는 학교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대회를 우승하리라는 것을. 그 기적의 근원에는 한 경기에 최선을 다하고, 오늘 단 하루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담대함이 있었다. 그들에게 다음 라운드를 생각하는 여유같은 건 없었다. 오늘의 경기가 생애 마지막 경기였을 뿐이며 다음 라운드 진출은 사치와도 같았다. 여기에서 오는 간절함, 그리고 담대함이 위대한 기적을 만들어냈다.
물론, 사가키타 고등학교 선수들 중 단 한 명도 프로야구에 진출하지 못했다. 결승전에 등판했던 구보 다카히로는 졸업 후 츠쿠바 대학에 진학하여 선수 생활을 이어갔고 사회인 야구팀 제이프로젝트에서도 뛰었으나, 결국 은퇴하고 현재는 모교로 돌아와 체육 교사로 재직 중이다. 역사적 만루홈런을 쳤던 소에지마 히로시 역시 후쿠오카 대학으로 진학하여 야구를 했으나 프로 진출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지금은 사가 현립 나카바루특별학교의 교사로 일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프로 진출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고시엔에서 모든 것을 쏟아붓는 에너지만이 중요했다. 그래서 일본의 수많은 야구 팬들이 고시엔을 사랑한다.
사실 사람이 담대한 인생을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혹시라도 실패하지 않을까, 혹시 잘못되면 다 물거품이 되는 것 아닌가 싶어서 심장이 쪼그라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조금 간이 부어 있고 심장이 크다면, 중요한 것은 30분 뒤도 아니고 이틀 뒤도 아닌 지금이 될 것이다. 내일 내 인생이 어떻게 되건, 오늘 이 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상책 아닐까? 더구나 지금 이 자리에서 결과에 연연해하지 않는 담대함까지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겠지.
이쯤에서 한 번 더 야구 이야기. 2014년 메이저리그 (MLB) 월드시리즈 MVP 매디슨 범가너가 그랬다. 범가너는 1차전에서 7이닝 1실점으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1차전 승리를 이끌었다. 그리고 5차전에 등판하여 9이닝 무사사구 완봉승을 따내는 괴력을 보이며 상대팀 캔자스시티에게 찬물을 끼얹었고, 분위기를 샌프란시스코 쪽으로 끌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리즈는 마지막 경기인 7차전까지 갔다. 무려 29년만에 월드시리즈에 진출하며 만만치 않은 기적을 준비하는 캔자스시티는 버거운 상대였다.
사람들의 관심은 오직 하나, 언제 범가너가 등판하느냐였다. 대부분은 그가 경기 후반부에 등판할 거라고 생각했다. 캔자스시티의 팬들은 그가 등판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 등판하지 않기를 바랬다. 그런데 예상을 깨고 그는 5회에 나타났다. 3-2로 샌프란시스코가 앞선 상황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 5차전에서 완봉승을 거둘 때 117개의 공을 던진 그가 3일 만에 마운드를 밟았다. 이후, 승부의 추는 더 이상 반대쪽으로 기울지 않았다. 나머지 5이닝을 무실점으로 틀어막은 범가너가 샌프란시스코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매듭지었다. 특히 마지막 타석에서 캔자스시티의 살바도르 페레즈를 상대로 똑같은 직구만 연이어 던지는 배짱으로 아웃을 끌어내는 장면이 백미였다.
샌프란시스코의 월드시리즈 우승은 전혀 순탄하지 않았다. MLB 포스트시즌 진출을 위한 와일드카드 결정전부터 치러야 할 정도로 기나긴 여정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범가너에게 그런 일정의 벽은 전혀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오직 그는 오늘의 포스트시즌 경기를 이기겠다는 담대함, 지금 이 순간 상대 타자를 상대로 아웃카운트를 추가하겠다는 차가운 승부 본능밖에 없었다. 그는 포스트시즌에서 총 7경기를 등판했는데, 그 동안 소화한 이닝이 52.2이닝으로 역대 메이저리그 단일 포스트시즌 최다 이닝 역대 1위이다. 52.2이닝동안 그가 내준 점수는 단 7점이었다.
사람들은 2014년 월드시리즈를 범가너 시리즈라고 부른다. 하긴, 4승 중 3승이 범가너의 손에서 만들어졌으니 그의 원맨쇼라고 봐도 무방하다. 더구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는 구단 역사상 단 한 번도 포스트시즌 7차전에서 이겨본 적이 없었다. 그 악몽을 범가너의 손으로 끊어냈다. 내 몸을 수시로 쿡쿡 찌르는 만성 통증과도 같은 징크스를 끊는 길은 담대함밖에 없다는 진리를 증명한 셈이다.
영화 <죽은 시인 동아리 (Dead Poets Society)>를 관통했던 한 마디, 카르페 디엠 (Carpe Diem). 어제에 얽매이지도 말고, 실체가 없는 내일만 바라보지도 말고, 그저 지금 발을 딛고 있는 현실에 집중하라는 의미이다. 누군가는 어제 있었던 낯부끄러운 일 때문에 며칠 동안 방에서 이불을 펑펑 차기도 하고, 누군가는 내일 무슨 일이 생길까 하는 걱정에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놓아 버리기도 한다. 그러는 동안, 지금의 시간은 흐르고 있다. 오늘 지금 이 순간에 전혀 집중하지 않고 있다.
어제에 대한 후회, 내일에 대한 걱정에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기 쉽지 않다. 왜 그렇게 인생에는 후회가 많고 걱정이 많은 건지.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가 어떤 일을 후회없이 하느냐가 아닐까? 굳이 현재가 미래를 빚어내지는 않더라도, 지금 하는 일에 집중해야만 인생의 머나먼 길에 밑그림이라고 그릴 수 있다. 그리고 그 밑그림을 그리기 위한 가장 중요한 물감의 색은 담대함이다. 과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지금을 크게 바라보며 다가올 일에 당황하지 않는 거대한 심장이 최고의 인생 준비물 같다.
걱정과 후회 때문에 오늘을 놓고 있는 그대여, 담대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