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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끈을 고쳐 묶는 그대에게

비판은 일방향이 아니다

요즘 라디오를 틀면, DJ들의 멘트는 한 마디도 들을 수 없다. 하루종일 음악만 나온다. 당연하다. 방송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방송국의 라디오 부스는 텅 비어 있다. 일하는 사람이 있어야 할 곳에 사람이 없으면 뭔가 혼란스럽고, 꽉 막힌 것 같고, 내 몸이 고장난 것과 같은 느낌이 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반 강제적으로 생긴 빈 자리를 사람들은 환영하고 있다.


세상이 잘못되었다고들 한다. 여전히 뒤틀린 힘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래서 하나 둘 모여, 잘못된 힘의 덩어리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언론 권력이 사람들의 눈과 귀를 막는 악습에 대항하여, 아나운서와 PD, 작가 등이 파업에 들어갔다. 그들이 있어야 할 방송국에는 정규직으로 고용된 사람들이 없다. 사람들의 말 소리, 키보드 두들기는 소리, 마우스 클릭하는 소리, 복합기 돌아가는 소리 등으로 가득해야 할 곳에는 언론 정의를 외치는 소리만이 남아 있다.


그 빈 공간을, 공허함을, 사람들은 좋아한다. 정의가 실현되고 있는 뿌듯함 때문만은 아니다. 그 자리를 잠시 대신하고 있는 다른 이들의 존재 때문이다. 파업으로 자리를 비운 PD들보다 대신 일을 하는 PD들이 더 일을 잘한다고들 한다. 또, 파업 때문에 스포츠 중계도 캐스터 없이 해설위원들만으로 진행되는데, 팬들은 이 모습에 더 만족해 한다. 하기 싫어서 일에서 손을 놓은 건 아니겠지만, 어찌 되었든 이 점이 시청자들에게 되려 전화위복이 되었다는 점은 다소 씁쓸한 일이다.

계속되는 파업

그렇다면 자연히 우리는 일하는 사람들의 능력에 눈길을 줄 수 밖에 없다. 언론과 정치의 야합으로 인해 미디어 기업이 뒤틀린 점은 차치하고, 과연 그들은 지금의 언론계에서 당당할 만큼의 능력을 보유하고 있을까? 혹시 우리는 그동안 그들의 능력 부족을 그냥 넘어간 것은 아닌 지 돌아보게 된다. 이들의 능력 부족이 오랜 악습과 폐습으로 인한 결과인지, 아니면 스스로 미디어의 변화에 살아남기 위한 노력이 모자라서 그랬는지 한 번쯤은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닌가 싶다.


우리가 청소하는 그 찌꺼기는 털어낸다고 다시 생기지 않는 건 아니다. 아무리 청소해도 바닥에는 늘 먼지가 쌓여있기 마련이다. 몸에서 노폐물을 배출해낸다고 몸 안의 노폐물이 영원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악의 근원은 어디선가 바람결을 따라간 곳에서 다시 씨를 뿌리고 싹을 틔우며 무섭게 자라나기 시작한다. 내가 청소를 안해서 그런 게아니라, 청소하는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청소하는 능력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설사 지금의 언론 적폐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그 집단이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간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시청자들이 그들의 빈 자리를 거의 느끼지 못하는 지금, 자신들 안에 있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본인들이 원하는 국민의 품으로 돌아가기는 어려워 보인다. 본인들이 역으로 공격당할 여지도 충분하다. 내가 안기고 싶어하는 품이 나를 맞이하려 하지 않는데, 그냥 그 품으로 들어가려 하는 것은 다소 슬퍼보이는 일방적 짝사랑일 뿐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지금 파업을 하는 아나운서, PD들의 정의로운 행동이 모두가 바라는 해피 엔딩이 될 것 같지만은 않다. 언론 부패의 축에 대한 비판은 사회 전반적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정작 그 파업을 실시하는 이들의 내부적인 반성이나 문제 해결은 볼 수 없다. 결국 그들의 문제를 그대로 떠안은 채로, 소위 말하는 개혁을 해야만 한다. 흰색으로 벽을 칠하고 싶은데, 흰색 물감을 묻히려는 붓에 검은색이나 다른 색이 남아 있다면 벽에는 찜찜한 흰색이 칠해질 터. 그 찜찜함을 느끼려고 그렇게 애를 써서 오물을 걷어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온전한 흰색을 보려면 붓도 바꿔야 한다.


내 눈도 바꿔야 변화의 완성

비단 지금의 언론 파업만의 문제는 아니리라. 우리는 기업 노조가 부패하는 과정을 보아왔고, 한때 진보적 사회 운동에 앞장섰던 이들이 등을 돌리는 것도 보아 왔다. 표면을 달라 보여도 그 안의 결은 같다. 내부의 반성없이 외부에만 소리치는 목소리는 힘을 잃을 수밖에 없고, 반성없이 고인 물은 그들이 끊임없이 싸워왔던 대상과 같은 모습으로 썩어들어가고 만다. 그래서 일방적 비판은 언젠가는 거꾸로 무방비 상태의 나를 위협하게 된다. 목소리가 나를 향하지 않기 때문에, 나를 못 보기 때문에, 언제든지 예상 못한 시점에 나를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이른바 '내로남불'도 결국 나 자신을 못 보는 일방적 비판이 가득한 세태를 압축한 표현이다.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다고, 남이 잘못하는 일을 내가 저지르면 나도 모르게 한없이 관대해진다. 그럴 수 있다고 슬쩍 넘어가곤 한다. 그것이 사람의 정신을 갉아먹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는 자신에 대한 양심까지 무디게 만든다. 적폐 세력들 혹은 내가 반대하는 정당이 그 동안 잘못했던 일을, 정작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 저질렀을 때, 우리는 얼마나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는가? 여기에 자신있게 대답하는 이는 별로 없다. 비판의 칼날을 나에게 겨눠본 적이 없으니까.


정말 우리가 변해야 한다면, 비판적 성찰을 통해 신발끈을 고쳐묶고 다시 달려야 한다면, 비판은 일방향일 수 없다. 나 자신도 비판의 대상이다. 외부 구조의 변화와 함께 스스로의 반성을 거쳐야만 변화다운 변화가 발생한다. 나는 똑같은 눈과 마음을 가지면서 세상의 구조물만 바뀌길 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극단적인 이기주의 아니겠는가? 변화의 세상에서 자신만 쏙 빠지는 건 변화라고 부를 수 없다. 인식의 주체가 변하지 않는데, 객체가 백날 변한다고 변화의 흐름을 만들기는 어려운 일이다.


자아 반성이 없는 비판은 아무런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 사측의 악순환이 사라져야 한다면 노조의 악순환도 사라져야 한다. 나는 잘못 없으니 너만 변하라는 주장은 아무도 안 따르는 명령이며, 잠재적인 권력 세습 밖에 되지 않는다. 새로운 시작을 위한 변화에 예외는 없다. 처음부터 다시 레이스를 준비하는 그대, 스스로에게도 비판의 칼날을 멈추지 말지어다. 세상을 엄정하게 비판하고 바꾸고 싶다면 스스로에게도 끊임없이 비판적이어야만 그 목소리에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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