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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깊은, 그래서 더 소중한

미처 몰랐던 만화 속 깊이의 그리움 

항상 사람들의 추억 속에는 1990년대가 있다. 그럴 수밖에. 1990년대에 냉전이 종식되었고 새로운 경제적 질서가 만들어졌으며, 대중 문화의 규모가 눈에 띄게 커졌다. 특히 <응답하라 1994>처럼 한국의 복고 문화 코드에서 1990년대는 필수 코스와도 같다. Again 0000이라는 표현에서 1990년대는 늘상 들어가는 예시 답안 수준에 가깝다.


그 대중 문화에서 지대한 비중을 차지했던 흔적, 바로 만화다. 정확히는 재패니메이션 (Japanimation), 즉 일본 만화다. 독재정권이 서서히 무너지고 사람들의 소득 상승 곡선이 비탈길처럼 가파르게 솟으며, 해외 문화에 대한 문이 더 넓게 열린 8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수입되기 시작하여, 90년대의 아이들에게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쳤다. 90년대에 청소년기나 청년기를 보낸 사람들은 90년대를 휩쓴 음반, 춤이 익숙하지만, 나처럼 90년대가 통째로 유년기였던 사람에게는 워크맨보다 TV 만화가 더 익숙한 플랫폼이다. 그러고보니 만화 전문 채널인 투니버스 채널이 개국한 것도 1995년이었다.


웹툰 시대 이전에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만화들을 돌아보면 다 수입산이다. 하지만 어릴 적에는 수입품이든 수출품이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걸 구분할 정도로 성숙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재미 있으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저녁 5시가 되면 자동으로 리모컨을 들고 TV 앞에 앉았다. 그래야 다음날에 학교 가면 만화 얘기에 말 한 마디라도 얹을 수 있었으니까.


그 때의 기억이 강렬해서였는지, 아니면 일말의 그리움이 스쳤기 때문인지, 대학생 시절에 어릴 적 만화들을 다시 찾아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시절의 재미만 발굴한 것이 아니었다. 어릴 적에는 볼 수 없었던, 뻔히 봐도 알 수 없었던 심오함이 눈에 들어왔다. 이 부분을 어릴 적에 봐서 기억이 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분면 봤지만 무슨 얘기인지 몰라서 그냥 넘어갔을 수도 있다. 확실한 건 그 어려운 부분이 만화를 계속 관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마 90년대의 아이들은 로봇 만화, 이른바 용자 시리즈가 가장 기억에 남을 것이다. 용자 시리즈는 일본의 애니메이션 제작사 선라이즈가 만든 시리즈이며, <용자 엑스카이저 (1990)>부터 <용자왕 가오가이거 (1997)>까지 총 8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첫 번째 작품인 <용자 엑스카이저>를 제외한 나머지 7편은 국내에서도 방영된 바 있다. 특히 세 번째 작품인 <전설의 용자 다간 (1992)>은 유일하게 두 곳의 방송사 (KBS, SBS) 에서 방영되기도 했다.

이 만화들을 다시 보니, 그 세계관이 마냥 단순하지는 않았다. 여기에 더하여, 시청자들에게 심오한 질문을 던진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용자경찰 제이데커 (1995)>였다. <용자경찰 제이데커>는 인공지능으로 무장한 로봇으로 구성된 브레이브 폴리스의 모험을 다룬 작품이다. 여기에 나오는 로봇들은 일반적인 인공지능이 아닌, 초 인공지능으로 움직인다. 신기하게도 초 인공지능을 이식하면 로봇들이 제각기 다른 성격을 지닌다. 심지어 사람처럼 화내고, 웃고, 짜증낸다. 외형은 배터리로 돌아가는 기계이지만, 그들의 속내는 사람과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여기에 더하여, 이들은 기계적인 완벽함을 거절한다. 한 에피소드에서 주인공이자 데커드는 오랜 친구인 토모나카 유타에게 아래와 같이 털어놓기도 한다. (참고로 토모나카 유타는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이다)


"우리는 모두 로봇이다. 우리의 능력은 새로운 부품을 설치하면 당연히 좋아지겠지. 그런데 그게 우리에게는 슬픈 일이야. 우리는 사람들처럼 연습해서 능력을 조정해나가는 게 더 좋아."


(상황을 더 설명하자면, 로봇들의 사격 테스트 결과에 대해 브레이브 폴리스의 아즈마 부국장이 실망하고 이들에게 사격 정밀 시스템을 설치하려고 한다. 여기에 데커드를 비롯한 다른 로봇들이 난색을 표하는 상황이다.)


자신들의 하드웨어에 새로운 시스템이 이식되는 것이 '슬프고', 자신들은 '사람처럼' 연습하고 싶다고 한다. 심지어 아즈마 부국장에게는 아래와 같이 고백한다.


"우리의 사격 성공률은 98.91%입니다. 그 나머지 1.09%가 우리의 인간적인 부분일 지도 모릅니다."


자신들의 부족함을 인간과의 교집합으로 규정하는 모습, 우리가 흔히 아는 로봇 기계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데커드를 비롯한 브레이브 폴리스는 모든 것을 계산된 알고리즘과 기계적 행동으로 수행하는 철제 기계가 아니다. 되려 최근에 이세돌 9단과 커제 9단을 상대했던 알파고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 완벽한 계산과 수싸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처럼 일부러 져주거나 실수하는 모습까지 보이는 알파고를 나는 20년 전에 이미 목격했던 셈이다. 여기서 우리가 받게 된 질문은 명확해진다.


과연 기계를 생명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인간은 어떤 생명체인가? 


<용자왕 가오가이거>의 주인공은 어떤가. 주인공 시시오 가이는 우주선 충돌 사고로 죽을 뻔했으나 극적으로 구조된 이후 기계와 결합한 생명체가 되고, G스톤의 힘으로 로봇과 퓨전하여 가오가이거가 된다. 그 G스톤은 새롭게 태어난 인간의 영혼이자 에너지라고 볼 수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기계의 배터리일 뿐일까? <용자지령 다그온 (1996)>에서는 평범한 인간이 매카닉과 융합 합체한 로봇이 된다. 이들은 인간일까, 아니면 기계일까? 쉽게 답하기 힘든 문제이다.


선라이즈의 애니메이션은 아니지만, 거장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공각기동대>는 어떤가? 사람의 영혼, 즉 고스트가 해킹되는 미래 사회에서 쿠사나기 모토코가 기계로 된 자신의 신체와 존재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사건 해결에 나선다. <공각기동대>에서는 우리가 그 동안 고스트 (영혼) 이라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프로그램화된 가치관과 이데올로기일 수도 있다는 가설을 던진다. 인간의 고스트는 그냥 기계적으로 조작된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으며, 기술적으로 업데이트할 수 있는 대상이 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공각기동대>에서 던진 세계관을 계승한 것인 바로 영화 <매트릭스 (1998)>이다. 모피어스가 정의한 매트릭스를 보면, 좀더 명확해진다.


"The Matrix is a computer-generated dream world."


컴퓨터가 프로그램화한 이상 세계, 우리는 그것을 인간다움으로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그 의문을 20년도 더 된 만화에서 이미 던져놓고 있었다. 어릴 적의 나는 심오하고도 중대한 메시지를 놓쳤다. 아니, 놓칠 수밖에 없었다. 이해할 만한 나이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다시 보고 되짚어보면서 이해해 보면, 또다른 함축적인 의미를 찾아서 즐겁고 또 보람이 있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90년대의 일본 만화가 그토록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건, 시청자에게 열린 질문을 던지는 세계관 때문이지 않았나 싶다. 유토피아와 같은 미래 세계 안에는 우리가 맞이하게 될 고난이 담겨 있었다. 또한 우리가 당면해야 할 근원적 질문들도 있었다.


<카우보이 비밥>을 보면 게이트 사고에 의해 국가가 사라지고 인종과 민족이 혼합된 상태로 인류가 우주에 진출하게 되지만, 급격한 사회의 발달로 인한 부조화를 보여준다. 사람들이 혹성 어딘가의 바에서 소흥주와 노주를 마시고, 트럭 운전사들은 트럭 안에 부적을 달아놓고 있는 등 20세기 말의 분위기와 21세기 미래사회의 분위기가 물과 기름처럼 공존한다. 또한 각 혹성에서 민족과 인종이 혼합되어 생활하고 있다고 해도 각각의 커뮤니티를 만들어가고 있으며 중국어, 영어, 아라비아어 등의 간판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 무엇보다 배경은 2071년인데, 주인공 스피겔은 19세기의 카우보이처럼 현상금을 사냥하러 다닌다.


충분히 우리가 맞이할 수 있는 부자연스러움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가 현재 직면한 문제이다. 문명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민족 간의 갈등, 문화권의 충돌은 사라지지 않는다. 세계 곳곳에서는 상당히 야만적인 방식으로 사람을 죽이는 테러가 잇따른다. 어딘가에서 카우보이가 다시 나타나지 말란 법은 없을 터다. 이렇게 현실을 반영한 열린 세계관이 우리를 흡입할 수 있었다. 어쩌면 어릴 적의 나 또한 무의식적으로 이러한 세계관에 빠졌는 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지금도 빠져 있는 듯 하다.


요즘 다들 웹툰을 즐기고 소비한다. 이렇게 얘기하면 너무 늙어 보일 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웹툰을 거의 안 본다. 왜인지 끌리지 않는다. 남들은 그렇게 재미있고 빵 터졌다고들 하는데, 나는 웹툰을 봐도 별다른 감동이 없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대부분의 웹툰은 일회성 컨텐츠이다. 그냥 잠깐 보고 슥 지나가는, 화장실에서 2-3분 동안 보고 잊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그렇게 잠깐 자극하고 마는 만화가 싫어진 모양이다. 여운이 남는 작품을 나도 모르게 갈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스쳐 가는 듯한 자극, 단시간에 사람을 빼앗는 자극이 컨텐츠의 주요 스키마가 되어 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역으로 깊이 있는 뭔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 적에 봤던, 그리고 여운이 오래 남은 만화가 어디 없나 찾아보지만 허사로 끝난다. <사무라이 참프루 (2004)>를 끝으로 여운 있는 만화는 내게 없는 것 같다. 알고 보면 깊고 무겁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소중한 것들이 필요해 보인다. 어느 새 사람들은 짧은 시간과 가벼운 내용에 익숙해져 간다. 이 와중에 뇌리에 남아 있는 예전 만화에 대한 그리움은 나만의 그리움일까. 이런 걸 소위 말하는 '아재 감성'이라고 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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