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있는 노력에 대하여
예전에는 서점에 가면 속담집이나 명언집을 따로 팔기도 했다. 지금은 포탈에 검색만 해도 온갖 종류의 명언이 화면을 빼곡히 채운다. 한 나라의 언어를 배우다보면 명언이나 속담을 통과의례처럼 외우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미사여구로 장식된 어록을 한 가득 남긴다. 이미 명언은 단순히 보고 듣는 대상을 넘어서, 내 귓등이나 눈꺼풀에 항상 숨어있다가 무시로 내 감각을 자극하는 듯 하다.
살면서 들어온 명언은 수없이 많지만, 지금 돌아보면 이게 왜 명언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 말들도 있다. 심지어 어떤 명언은 공감이 아닌 반감을 산다. 시대가 바뀌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시대를 잘못 보는 바람에 등장한 엉터리 명언들이 시류에 편승한 까닭이다. 겉보기에는 명언이지만, 다시 보니까 유언비어나 실언에 가깝더라. 그 명언의 가면들을 몇 번 벗겨보고 나니, 말의 값어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어떤 '명언'이 가장 엉터리 같을까?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겠지만, 살면서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은,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
이 말이다. 지금도 누가 이 말을 쓰면, 본능적으로 몸에서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 처음에는 주변의 천재들이나 소위 엄친딸들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싫었다. 내가 머리 싸매며 공부해도 평균 90점 나올 때, 널널하고 여유있게 공부해도 전교 1등하는 엄친딸들이 왜 이리 눈에 띄었는지. 그리고 그 애들은 무슨 능력이 있어서 경시대회에 나가기만 하면 상을 타는지. 정말 그들은 공부를 즐기는 특이한 인종 같았고, 내가 그들을 앞지를 수 없다는 것에 자괴감을 느끼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 말을 조금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축구를 설렁설렁 즐기고 있는 사람이라서 최고의 축구선수가 된 것이 아니다. 누구보다 독하게 자기를 관리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호날두 본인은 독한 몸 관리를 자신의 일상이나 루틴처럼 여긴다. 변화를 위한 노력이 아닌, 지나가는 일상인 셈이다. 여기서 우린 '즐긴다'의 의미를 다시 새겨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즐긴다는 것, 달리 말하면 어떤 대상과 하나가 된다는 의미도 된다. 음악을 즐기는 사람은 음악의 리듬, 멜로디의 흐름과 하나가 된 것처럼 몸을 흔든다. 음악을 제대로 즐기다 보니 자연스럽게 리듬에 몸을 맡긴다.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은 자기가 경기에 뛰는 것처럼 감정을 바짝 이입한다.
진정으로 즐기는 것은 단순히 가볍게 놀고 마는 게 아니다. '한번 해 봐야지~'라는 마인드로 잠깐 발만 담그고 나오는 것은 즐긴다고 표현하기 어렵다. 말 그대로 체험밖에 되지 않는다. 즐기려면 몰입이 필요하다. 그리고 몰입을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따지고 보면 결국 즐기는 자는 노력하는 자인 셈이다.
스마트폰을 탄생시킨 스티브 잡스에게 컴퓨터나 핸드폰은 단순한 장난감이 아니었다. 매 순간 컴퓨터에 정신을 쏟았고, 프로그래밍에 수많은 시간을 투자했으며, 디지털 기기를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방법을 항상 고민했다. 어느 순간부터 잡스는 스마트폰을 가지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는 게 노력이 아닌 일상이었다. 그렇게 노력을 '즐긴' 덕에 혁신이 탄생한 것은 아닐까?
물론 그 노력이 공무원 시험 공부마냥 하루종일 책상머리에 눌러앉는 것과는 확실히 다를 터다. 머리에 열나게 책에 집중하는 것 말고도 노력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혼자서 의문점을 갖고 이리저리 부품을 뜯어보든지, 아니면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을 곱씹으면서 다시 써보는 것처럼, 내가 정신의 주도권을 잡고 여러가지 방법을 그려보고, 부딪혀보고, 고쳐보는 노력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게 진정한 의미의 노력이다.
위에서 내가 거부한 명언에는, 이러한 부분이 빠져 있다. 그러니 노력하는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잘못을 범할 수밖에. 경지에 오를 정도의 노력을 하지 못하는 자는 즐길 기회를 받을 수도 없고, 즐길 자격도 주어지지 않으리라. 결국 공부를 즐기려면 문제를 파헤쳐가면서 여러 솔루션을 발굴하고 파헤쳐가는 피와 땀, 눈물이 나의 발 밑에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열심히 하면 잘 될 거다" 라는 말도 거짓말이다. 그러면 지금 이 시간에도 노량진과 신림동에서 고시 준비에 열을 올리는 수험생들은 뭐란 말인가? 하루에 10시간도 넘게 의자에 눌러앉아서, 공부에 방해가 될 것 같은 소음은 별의별 방법을 동원하여 막아가면서 공부하는 수험생들이 왜 그토록 인생이 풀리지 않고 꼬이기만 하는 거지? 몸이 아플 정도로 열심히 했는데?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공부를 잘하기 힘든 방법으로 파고드니까. 분명 노력은 노력인데, 내가 원하는 열매를 얻을 만한 가치는 없었기 때문이다. 조금 잔인하지만, 이게 현실이다. 잘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거나 생각하지 않고 그저 방에 죽치고 앉아 눈앞의 활자들만 줄줄 읽어나가는데, 이렇게 공부해서 좋은 결과가 나오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가야 할 방향과는 무관한 방향으로 낑낑대며 뛸 수록, 결과와 거리가 멀어질 수 밖에. 그래서 나는 '열심히 한다'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누군가 그렇게 말하면 나는 무조건 되묻는다.
"어떻게 열심히 할 건데?"
여기에 제대로 대답하는 사람은 좋은 결과를 얻어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아직 방향이 불명확한 사람이다. 자신만의 노력으로 피와 땀, 눈물을 흘려가며 나아가는 사람, 그냥 주변에서 하는 대로 똑같이 끙끙대는 사람. 그 둘의 차이는 너무 명백해 보인다. 전자는 즐기는 경지에 사람, 후자는 땀만 흘린 사람이니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노오력'이란 바로 그런 의미 없는 노력이다. 어릴 때부터 열심히 뛰기만, 열심히 공부하기만, 열심히 윗 사람 말을 따르기만 하니까, 내 눈 앞에 원하는 열매가 없다. 그런 가치 없는 노력을 가치 있는 노력으로 바꿔내야 삶에 변화가 문득 찾아오리라. 이미 '열심히'의 시대는 끝났다. 아니, 처음부터 그런 시대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환영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풍파를 견뎌내는 이에게 '열심히 해라!'는 말은 격려로 들리지도 않고, 격려라 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열심히 하는 건 누구나 하는 일이므로, 아무 뜻도 없어 보인다. 꼬아서 들으면 계속 삽질하라는 의미로 들릴 수도 있으니까. 우리는 이 말이 더 입에 붙어있고 익숙하지만, 상대에게 그렇게 와닿는 격려는 아닌 듯 하다. 그냥 담백하게 '잘해라!'라고 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그 사람은 잘 살아보려고, 잘 이겨내려고 아등바등 버티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