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구 문 반

by 키도


“강아지~ 이것이 머신지 아냐?”


등산을 가면 늘 가던 걸음을 멈춰 서서 알쓸신잡 강의를 하시는 우리 아빠.


“이건 노루오줌이라는 풀인디, 뿌리에서 노루오줌 냄새가 난다고 한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단다. 처음 듣지야?”


아빠는 백과사전 같은 사람이다. 아는 것도 많고, 알려주고 싶은 것도 많은 우리 집 만물박사님. 역사부터 시작해서 풀과 새 이름 등의 생물, 그리고 인물에 대한 것까지 모르는 분야가 뭘까 싶을 정도로 걸어 다니는 나무위키 같은 방대한 지식의 바다를 가지고 계신 분.

알쓸신잡 만물박사님 덕분에 어릴 적부터 우리 세 남매는 참 많은 곳을 돌아다니고, 많은 것을 배웠다. 온 가족이 방학이면 현장 체험 학습으로 전남에 있는 문화유산을 다녀왔다. 순천 송광사, 강진 다산초당, 해남 윤선도 생가 등 남도 문화유산 답사기를 방학마다 써 내려갔다. 그때의 기억이 자양분이 되어 자식 중 한 명은 문화유산 관련업에서 종사하고 있으니 인연이란 것이 신기하기도 하다.


우리 아빠는 여느 집 아버지처럼 무뚝뚝하고 남성스러운 스타일은 아니셨다. 다정한 스킨십을 동반한 따뜻한 아버지상에 가깝다. F 아버지답게 선한 마음을 가지고 살면 언젠가 다 좋은 방향으로 돌아온다고 자식들에게도 가르쳐주셨다. 늘 긍정적인 것을 보고 찾으려 하고 너무 욕심내지 말고 남들에게 양보하려고 했다. 누구에게 신세 지면 꼭 감사하다고 인사드려야 하고 그것은 절대적으로 갚아야 하고, 남에게 베풀며 살아야 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맡은 일은 후회가 없도록 성실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엄마는 아빠의 이런 선한 면을 너무 지나치다고 하시며, 융통성이 없어 답답해하시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면을 닮아버린 자식들이 셋이나 되었으니 피는 물보다 진하다 할 수 있겠다.


내가 이제 어느덧 30대 중반의 나이가 됐어도 아빠는 아직도 나를 ‘강아지’라고 부른다. 아직도 전화할 때도, 집에서 나를 부를 때도 아빠 강아지! 아빠 막내딸!이라고 부르신다. (둘째이기 때문에 딸의 포지션으로는 막내가 맞다.)


우리가 어릴 적, 그러니까 아빠가 오토바이를 타고 출퇴근하시던 시절이었다. 퇴근해서 집에 오실 시간이 되면 골목 어귀에서부터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언니랑 거실에서 놀다가도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면 ‘아빠다!’하면서 현관에서 똥강아지들처럼 낑낑대고 기다렸다. 문을 활짝 열고 ‘아빠 강아지들!’ 외치시면 언니랑 나는 서로 먼저 안아달라고 난리를 피웠다. 그러면 아빠가 한 명씩 안아 들고 거실을 뛰어다녔다. 둥가둥가 뛰어다니며 얼굴에 퍼붓는 뽀뽀 세례에 정신을 못 차렸다. 아직도 이 기억을 떠올리면 웃음이 나온다.


자식들이 어느새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나 사춘기를 맞이하자 현관에 퇴근 마중을 나가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아빠는 늘 현관에서 아빠 왔다~ 하고 들어오셨다. 어느 날은 아빠가 신발을 벗지 않고 서 계시면서 ‘너그 아빠 왔는디 인자 마중 안나오냐’라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아차 싶었다. 다녀오셨어요 하면서 안아 드리니 그제야 조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시며 안으로 들어오셨다. 아빠 눈에는 아직도 세 마리의 똥강아지들일 텐데, 어느새 컸다고 어른인 체하며 무뚝뚝해진 자식들을 보니 섭섭하신 걸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몇 년이 지났을 때였다. TV에서 판소리 하는 명창이 나와서 흥부가를 부르고 있었다. TV를 보던 아빠가 갑자기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가족들 모두 눈이 동그래져서 아빠를 쳐다봤다. 엄마가 여보 왜 우냐 물어보시니 판소리를 즐기셨던 할아버지가 생각난다고 너무 보고 싶다며 눈물을 멈추기 힘드신 듯 방으로 들어가셨다. 아빠도 부모를 둔 자식이었다. 그런데 부모를 잃는다는 건 저런 거구나. 몇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고, 몇 년이 지나도 익숙해지질 않는 텅 빈 마음.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그리움이 느껴졌다.


어느새 아빠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던 그 나이를 지나고 계신다. 나이를 드시며 총명하던 눈동자를 덮는 눈꺼풀이 지면을 향해 쳐지고, 이마에도 나이테가 생기셨다. 그리고 머리 위에는 하얀 서리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이제 무슨 말씀을 하시려면 그, 어, 저기 등을 덧붙이며 시동을 거셔야 한다. 체력도 예전 같지 않으셔서 식사하시면 거실에서 꾸벅 꾸벅 졸고 계신다. 그래도 여전히 책을 좋아하시고, 땅에 피어난 자연을 사랑하는 소년 같은 감성을 가지고 계신다.


정년퇴직하고 나신 후 아빠는 늘 점심즈음 등산길에 오르신다. 당뇨 증세가 있으셔서 운동을 꾸준히 하시며 관리를 하고 계시는데, 등산하다가 심심하신지 종종 전화하신다. 그러면 10중 8번 정도는 근무하고 있을 때이다. 현장에 나갔을 때 전화를 받으면 오늘은 어디로 일 갔냐고 꼭 물어보신다. 아빠가 아는 절 이름이나 서원을 얘기하면 아빠는 또 신이 나서 백과사전 지식을 개방하신다. 얼마 전에는 등산 중에 궁금한 것을 검색하시며 핸드폰을 보고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셔서 입술 위쪽을 다치셨다. 앞니가 부러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걸 보고 속상해서 얼마나 잔소리를 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전화 끊을 때 늘 ‘아빠 핸드폰 보면서 걷지 마!’라는 얘기를 한다. 언젠가부터 아빠에게 잔소리하는 건 자식들 입장이 된 것 같다.


얼마 전 아빠와 대화를 나누던 중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이야기가 나왔다. 추운 겨울을 견디는 마음으로 제주도 귀양 시절을 담아내어서 그린 세한도. 아빠는 세한도에 대한 이야기와 어떤 경위로 박물관에 기증이 되었는지까지 모두 알고 계셨다. 그 말씀 끝에 언젠가는 꼭 세한도를 실물로 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아빠 막내딸 강아지의 손을 잡고 국립중앙박물관에 같이 가는 게 소원이라고 하셨다.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소원 까지냐고 웃었지만, 소원이 맞다고 했다. 친구들과는 그렇게 많이 가놓고 정작 역사와 우리 미술을 사랑하시는 아빠와는 아직 가지 않았다니. 어버이 살아계신 제 섬길 일란 다 하지 못하는 불꽃 효녀임이 틀림없었다.


김정희 필 세한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올가을에는 아빠와 함께 국립중앙박물관을 가려고 한다. 아빠의 소원이자 나의 소원이 된 손 잡고 같이 국립중앙박물관 가기를 올해는 꼭 해보려고 한다. 장담하건대 나보다 유물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아실 것 같다. 그러면 또 아빠에게 이건 뭔지, 저것은 어떤 그림인지 물어봐야지. 수줍게 잘 모른다고 하시면서도 들떠서 설명해 주시겠지 생각하니까 벌써 미소가 지어진다.


아빠의 취향을 배우며 닮아 우리 것을 좋아하게 되었고, 결국 공부도 일도 역사와 전통적인 것 관련하는 것을 하게 된 아빠 판박이 똥강아지. 추운 길을 걸어오신 아빠에게 올해 가을에는 따뜻한 십구 문 반의 신발을 신겨드리고 함께 박물관 나들이를 가야겠다.



*세한도 이미지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누리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