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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신이 Feb 20. 2019

아이를 안고 응급실로 뛰었다

걷기 시작한 아이는 위험하다

댕이 생후 16개월 어느 날의 일기


아이의 맨발이 차가웠다. 댕이는 ‘아아’ 하는 신음소리를 내며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마구 움직이는 아이의 발을 꼭 붙잡았다.


“댕이야 엄마 여기 있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이의 발을 쥐고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댕이는 수면 주사를 맞았지만 잠에 푹 들지 못한 상태였다. 혀에 마취 주사를 놓을 때 댕이의 목구멍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의사가 찢어진 댕이의 혀에 바늘을 꽂자 아이는 턱에 강하게 힘을 주며 입을 앙다물더니, 몸을 배배 꼰다. 댕이는 내복 바람에 맨발이었다. 혀를 계속 꿰매는 건 위험했다. 결국 꽂았던 바늘을 뺐다.


이게 벌써 세 번째다.


댕이가 활발한 아이이긴 하지만 아이가 극성맞다고 해서 다 댕이처럼 다치지는 않는다. 보호자의 책임이 크다. 세 번 다 나의 보호 하에 있을 때 사고가 났다. 댕이가 오늘처럼 고통스러워한 것은, 세 번이나 병원 베드에 누운 건 전적으로 내 책임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내 보호가 허술했다는 것을 아이가 뼈아프게 증명한 셈이다.


응급실에서 밤을 새우고 집에 돌아와 억지로 잠을 청하던 댕이는 서럽게 울면서 엄마를 찾았다. 차가운 응급실 베드 위에서 혀에 바늘이 꽂히는 경험을 했으니 얼마나 공포스러웠을까. 신음하던 아이의 모습이 떠올라 너무 괴롭다. 더 이상 이런 경험 하고 싶지 않다. 아이가 피를 흘리고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다시는.




세 번의 사고


댕이는 지금 20개월이 됐다. 16개월에 혀를 다쳐 응급실에 다녀온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다치진 않았다. 그 무렵 한 달 간격으로 일어난 사고. 그 기간 동안 난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댕이는 잘 먹고, 잘 싸는 건강한 아이다. 9개월부터 어린이집에 보낸 덕에 수족구에 눈병, 폐렴까지 앓았어도 대부분 식욕을 잃지 않고 잘 먹어서 매번 바이러스를 퇴치한 강한 아이다. 대신에 돌 지나 걸음에 자신감이 붙었을 때 아이는 망아지 같았다. 걸을 수 있다는 생각과 다리 근육의 부조화로 걷다가 넘어지기 일쑤였다. 어디든 기웃거렸고, 어디든 기어올라갔다.


첫 번째 사고는 14개월 때였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집에 머물 때 넘어져서 아크릴판 모서리에 귀를 찍었다. 아이가 너무 심하게 운다 싶어 봤더니 약 0.5cm의 아크릴판 두께로 귓바퀴가 찢어져 있었다. 응급 처치만 하고 다음날 병원을 찾았더니 의사는 난감한 얼굴을 했다.


꿰매야겠는데요


꿰매야 할 정도의 상황이라고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성형외과에 찾아가 댕이를 수술대에 눕혔다. 아이한테 노래 영상을 보여주며 부분 마취를 했고, 두 바늘을 꿰맸다. 마취 주사액이 상처 부위에 들어갈 때 부르르 떠는 아이를 보고, 눈물이 났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세 식구가 함께 간 마트에서 댕이는 내가 잠깐 물건을 고르는 사이 옆에서 넘어졌다. 철제 선반에 부딪혀 귀 위 피부가 찢어졌다. 한눈에 봐도 상처가 컸다. 남편과 나는 아이를 안고 또 그 성형외과로 뛰었다. 이번엔 네 바늘이었다. 흉터는 남을 거라고 했다.


피부가 길게 찢어져 있었는데도 신기하게도 아이는 처음에만 ‘아앙’ 울더니 상처를 꿰맬 때까지 울지 않았다. 그때는 댕이 대신 내가 울었다. 병원에서부터 훌쩍댔고, 집에 가서는 친동생 앞에서 엉엉 울었다. 동생은 아들 둘을 둔 선배 엄마답게 침착했다.


“언니 괜찮아. 흉 안 생길 거야”

“얼굴이야- 진짜 길게 찢어졌다고. 여자애 얼굴에 어떡해-“


난 얼굴을 감싸 쥐고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이번엔 상처가 옆얼굴이었다. 귀 옆에 2cm, 결코 작은 상처가 아니었다. 흉이 남으면... 이 흉터가 아이의 인생을 평생 쫓아다닌다면... 생각만 해도 무서웠다.


소용없는 일이지만 난 끊임없이 자책했다. 어떻게 아이에게서 눈을 뗄 수가 있었지. 아이에게서 시선을 뗀 내 눈이 믿기지 않았다. 아이의 상처부위를 볼 때마다 가슴을 쳤다. 아이의 상처는 나를 채찍질하는 것 같았다. 이젠 더 이상은 안된다고. 다시 아이를 성형외과 베드에 눕히는 일은 만들어선 안된다고.


난 댕이의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저녁밥도 안 하고 아이를 졸졸 쫓아다녔다. 하지만 한 달 뒤, 또 사고가 일어난 거다. 아이는 식탁 위를 기어올라가다 미끄러져 턱을 찧었고 입에서 피를 철철 흘렸다. 이때는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다. 그리곤 응급실행이다.


이쯤 되면, 상황이 얼마나 험악했을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달 간격으로 정확히 세 번, 돌이 지난 지 얼마 안 되는 딸아이는 바늘을 몸에 세 번이나 댔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세 번 다 엄마의 보호 하에 있을 때 사고가 났다. 보호자로서 나의 점수는 낙제 수준이었다. 아이가 사고를 당하기 직전 상황에 위험을 감지하지 못했으며, 그 순간에 아이를 구하지 못했음을 물론이다. 난 거의 자포자기의 상태가 되었다.



‘다칠 아이는 어떻게든 다친다’는 말


아이가 다친 것도 괴롭지만, 아이가 내 옆에 있을 때 다친 것도 괴로웠다.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은데 원망할 대상은 나밖에 없었다.


주변에선 위로의 말을 건넸다.


흉터 연고 잘 발라주면 돼. 혹시 흉이 남더라도 좀 커서 피부과에서 수술받으면 되고.”

“우리 애는 그보다 더 어릴 때 전신 마취하고 수술했었잖아. 큰일 아니야.”


난 주변 사람에게서 ‘엄마인 너는 잘못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한 친구는 내가 듣고 싶어 하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다칠 애는 어떻게든 다쳐. 우리 애는 어른 6명이 둘러싸고 있었는데도 고꾸라졌다니까. 댕이는 누가 옆에 있었어도 다쳤을 거야.”


‘다칠 아이는 어떻게든 다친다.’라는 말. 그 말은 아마 나 같은 부모를 위해 만들어진 말일 것이다. 죄책감에서 벗어나도록 말이다.


나는 그 말을 통해 죄책감에서 조금 벗어난 한편, 엄마인 내가 아무리 신경 쓰고 노력해도 막을 수 없는 일이 아이에게 닥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졌다. 처음으로 부모가 되어 아이를 키운다는 일의 무거움이 느껴졌다. 자주 신을 찾게 되었고, 그저 건강하게만 자라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이 정도만 다치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더는 다치지 않게 해 달라고.


난 무슨 의식처럼, 아침저녁으로 흉터연고를 상처부위에 바르는 일에 매달렸다.


"엄마가 흉터 싹 없애줄게. 걱정 마"


죄책감의 크기


그 후로 비슷한 또래의 아이 엄마를 만나면 아이가 여러 번 다쳤다고, 이 무렵에는 조심해야 한다고 알려줬다. 엄마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끄덕하긴 했지만, 누구에게서도 댕이처럼 다쳤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다. 조카들, 사촌의 아이들, 내 지인의 아이들 중에 내가 아는 한은 다쳐서 상처를 꿰맨 경우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댕이가 활동적이긴 하지만 아주 심한 편은 아닌데 왜 그렇게 여러 번 다친 걸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다만 아이를 키우는 한 지인은 이렇게 말해줬다.


"우리 애는 한 번도 다친 적 없어요. 주위에 보니까 다친 애만 계속 다치더라고요."


말하자면 댕이는 '쉽게 다치는 아이'인 것일까.


그러고 보면 댕이는 신체 활동을 주저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겁이 없다. 다친 이후 아이는 몇 개월 만에  ‘미끄럼틀 신동’이 됐다. 말문이 트이진 않았지만, 제법 큰 아이처럼 미끄럼틀에서 엎드려 슬라이딩을 하는 세 살 꼬마. 그 모습을 보며 난 다시 확신을 갖는다. ‘그래 저 애를 어떻게 막아.’하고. 나의 죄책감은 점점 크기가 작아지고 있다.


사고 후 수개월이 지난 지금, 흉터 연고 발라주는 건 잊기 일쑤다. 귀 위의 흉터는 머리카락에 조금 가려지긴 했지만, 그래도 희미하게 남아 아직 남은 나의 죄책감을 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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