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약은 낮은 담장 앞에서 예뻐 보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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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더분한 버마재비

좁은 마당 한쪽에서 붉은 작약 몇 송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무척 예뻐 보였다. 사진에 담고 보니 뒤에 서있는 족히 삼십 년은 된 벽돌담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 손으로 직접 쌓아 올린 담장이었다. 저 담장 때문일까? 붉은 꽃봉오리가 눈두덩이에 박하향을 얹은 듯 훤하게 들어왔다.


아버지, 거기까지만 쌓아!

그럴끄나?

그믄... 그래야 저 밭이 내 밭이려니 하고 볼 것 아녀?

아버지는 하던 일을 멈추고 담장 너머 옆집 텃밭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거실 유리창가에 앉아 훈수를 두는 내게 오진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만하믄 됐지야?


아랫채를 짓느라 옆집 텃밭을 조금사서 집어넣었지만 마당은 좁았다. 내 땅 한 뙈기 없이 처갓집에 들어와 열 마지기 남짓 논이 생겼으니 아버지는 옆집 텃밭이 그리 부럽지 않으신 모양이었다. 엄마는 마당에 올망졸망 고운 꽃도 심고, 상추니 고추니 반찬이 될만한 것을 심고 싶어 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집은 먹고, 자고, 쉬는 곳이었다. 마당에 잡아넣을 땅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이 집은 아버지 평생에 걸쳐 처음이자 마지막 집이었다. 겉보리 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는 안 한다는 말이 있듯 아버지와 엄마는 친정동네까지 이사는 왔지만 외할머니와 한솥밥은 먹지 않았다. 외할머니 집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모마저 시집을 가버린 후였다. 그러니 그 해, 아버지가 담장을 쌓기 전까지는 그 집은 아버지의 처갓집이었다.


주말이면 집에 들를 때마다 보았듯이 아버지는 구멍 난 메리야스가 다 들여다 보이는 체크무늬 남방에 카키색 바지, 장화신 차림이었다. 얼마 전까지 소 여물통이었던 귀퉁이가 찢어진 검은 고무대야에 시멘트를 개어놓은 아버지는 벽돌 한 줄 올리고 흙손으로 시멘트를 떠서 살그랑살그랑 날렵하게 바르고 계셨다. 소매와 바짓가랑이는 둘둘 말려 있고 목에는 땀에 전 꾀죄죄한 수건이 걸려있었다.

아버지, 안 힘들어?

방충망 너머로 참견만 하던 나는 물을 들고 마당에 나갔다. 아버지는 물 한 대접을 달게 드시고 수건 끝을 가져다 이마의 땀을 훔쳤다. 그리고 이제 담장만 두르면 끝나는 새 집을 한번 둘러보며 아버지는 다시 한번 그렇게 오진 웃음을 지어 보였다.

괜찮해. 요정돈 암 껏도 아녀. 요것이 일이다냐!


외갓집이 아버지 집으로 바뀌면서 스레트 지붕은 슬라브 주택으로 바뀌었고, 아궁이와 검은 무쇠솥 대신 가스레인지와 전기밥솥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설거지 후 그릇을 얹어놓던 살강 대신 엄마가 평생 그리던 원목 찬장이 마지막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몇 년에 한 번 이엉을 엮어 올려주던 흙담이 벽돌담으로 바뀌는 중이었다. 모든 것들이 새 옷을 입고 마지막으로 눈앞에 경계를 두르고 있었다.


그 후 30여 년이 흘렀다. 작약은 해묵은 담장에 기대어 그 때깔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하지만 작약은 담장이 외부와 경계를 짓고 보호의 팔을 두른 채 묵묵히 버텨주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눈치다. 꽃잎은 나풀거리며 담장 너머 세상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느라 담장은 애초에 잊은 듯 뒤꿈치를 들고 저 멀리 가 있었다.


휴대폰 벨 소리가 몰캉한 잠에 뾰족한 주삿바늘처럼 파고들었다. 습관대로 머리맡에 놓아두었던 전화기를 집어 들다 침대 밑으로 떨어뜨렸다. 일어나 앉아 어둠 속에서 울고 있는 전화기를 주워 들었다. ‘울 엄마’라고 떠있었다. 새벽 세시 삼십육 분이었다.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다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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