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바다 위를 파란 자동차가 흔들림 없이 달렸다. 분명 '덜커덩 풍덩!' 하는 비명과 동시에 물이 차오르고 점점 바닷속으로 가라앉아야 할 파란 자동차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표표히 달렸다. 파란 자동차는 달리는 내 차 안, 내비게이션 속에 있었다.
며칠 전, 신시도 자연 휴양림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비응항을 거쳐 야미도를 지나는 늘 달리던 길을 포기하고, 한 번도 달려 본 적 없는 새만금남북도로를 타기로 했다. 비응항을 한참 앞두고 새만금산업용지에서 좌회전하여 새만금내부로 연결된 도로를 달렸다. 조금 달리다 보니 확 트인 왕복 8차선의 널따란 길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내비게이션 속 차량은 바다 위를 달리고 있었다. 아직 업그레이드가 되지 않은 내비게이션은 '경로를 이탈했습니다'라는 말도 없이 조용히 바다 위를 달렸다. 아침까지 내린 장대비 때문인지, 아직 이 도로 개통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인지 도로 위에는 내 차와 앞에 가는 딱 한대의 차량 밖에 없었다. 그 한대의 차량과 옆지기가 없었더라면 현실의 차는 내비게이션의 속의 차가 되어 앞으로 전진하기도 다시 뒤로 돌아가기도 힘든 그 아찔함 어디쯤에 서 있었을 것이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마저 현실감을 떨어뜨렸다.
내비게이션 속 파란 차량은 2014년 여름의 우리와 아버지를 닮아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다리를 전륜구동 가능한 바퀴로 달리고 있음에도 내비게이션에 길이 없다는 이유로 우리는 불안했고, 아버지는 길이 없는 내비게이션 속 파란 차량처럼 아무런 표정 없이 달리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집을 나가셨다 돌아온 가을이 지나고, 다음 해 2014년 팔월 여름이었다.
너희 아버지 모셔가거라!
얼마나 힘들게 하셨으면...
정오를 막 넘긴 시각, 엄마의 전화를 받고 남편과 함께 시골로 달렸다. 엄마는 거실바닥에 앉아 눈물부터 보였다. 아버지 회색 눈이 다시 번들거렸다. 울고 있는 엄마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나를 아버지는 계속해서 달궈진 그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남편이 말해주어서야 알았다.
그즈음, 아버지는 어떤 날은 종일 주무셨고, 어떤 날은 보이지 않는 무엇과 대화를 나눴다. 하루종일 화장실과 방문고리 청소, 거기서 나오는 손빨래로 지친 엄마는 가끔 거는 내 전화에 하소연으로 끝냈다. 육칠 년 전에 한 허리 수술로 밤마다 아픈 다리를 주물러가면서도 매 끼니마다 약과 간식거리를 챙겨가며 정성을 다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모르는 척했다.
삼 년 전부터 하루에 세 시간씩 집으로 오는 요양보호사가 있었지만 남의 손에 집 안 일을 맡기고 싶어 하지 않는 엄마의 성격 탓에 빨래와 식사 준비는 늘 당신이 해 오고 있었다. 청소기 돌리기와 아버지 운동시키는 것만을 요양보호사 손에 남겨두었다. 아버지는 두 번째 바뀐 요양보호사나 동네 사람들에게 ‘고생허요’라고 늘 사람 좋은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아버지는 엄마에게만 못되게 굴었다. 가장 가까운 사이가 부딪혀 멍들고 흠집이 났다. 하지만 우리는 손을 내밀면 딸려올 가늠할 수 없는 일이 무서워 다시 손을 거두곤 했다.
한 달 전, 칠월에도 엄마의 전화에 동생과 나는 시골로 달려갔다.
헛간 담벼락에 늘어선 봉숭아가 붉고 흰 꽃잎을 떨꺽 떨구고 있었다. 아버지의 눈은 인형의 눈처럼 뎅그렁했다. 약간의 흔들림이 생긴다면 그 회색 눈망울은 굴러 떨어질 것처럼 번들거렸다. 사흘째 잠들지 못한 채 바스락 거리는 움직임에도 소리를 치셨다는 아버지 눈빛은 보통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자식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순한 눈빛을 마주한 우리는 아버지를 보고 웃었다. 가장 가까이서 당신의 만만한 수족 노릇을 하고 있는 엄마만 빼고 아버지와 우리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서로를 보듬었다.
보통, 그렇다. 엄마와 아버지 사이는 그 시절 부부가 그렇듯 '보통'이었다. 물론 요즘의 나처럼 세세히 따지자면 보통 이하이겠지만 팔십 대 이쪽저쪽인 분들이 보통 이상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데 그 '보통'이 벌써 사 년째 병시중을 드는 엄마에게 '보통 이하'를 지난 지 오래였다.
그런데 동생과 함께 아버지를 모시러 내려갔다 그냥 올라왔다.
"자식들 못 할 일 시킬 거 뭐 있냐... 내가 그냥 고생하고 말란다..."
엄마 고집에 둘은 애써 웃으며 올라왔다. 등짐을 지려다 내려놓은 것처럼 가볍지만은 않았지만 모시고 올라오면 해야 할 일들에 서 벗어났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공무원임용으로 첫 발령을 받은 날, 동기들과 무리 지어 나오는데 어르신 한분이 수위실 옆 의자에서 일어서며 내게 다가왔다. 스물다섯이나 먹은 딸을 군청 앞까지 따라와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시던 아버지였다. 그날 아버지 뒤로 노란 은행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젠 그런 아버지가 아이가 되어 내 곁으로 올까 봐 나는 겁을 먹고 있었다. 엄마의 '괜찮다'라는 소리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돌아오는 길, 엄마가 흔드는 손이 내려지기 전에 시야에서 사라지려고 서둘렀다.
그러던 팔월 의 끝자락 어느 날, 4년동안 해왔던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엄마는 손을 들었다.
"너 땜시 꼬들빼기 씨 구해서 뿌렸다!"
그 와중에도 엄마는 고들빼기 타령이었다. 이렇게까지 타박해 가며 심을 일은 아니었다.
'마트에 꼬들빼기 김치를 팔길래 먹었더니 그 맛이 아니더라고.'
어느 글자 하나에도 힘을 얹지 않은 그냥 했던 내 말을 엄마는 붙잡고 있었다. 아, 뒤에 생각 없이 이런 말을 보탰던 것 같다.
'엄마가 담은 것은 정말 맛있었는데...'
한 낮, 비가 올지도 모른다며 엄마는 건너 밭에 녹두 따러 가셨다. 아버지는 그늘진 골목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섰다를 반복하며 엄마 그림자를 쫒고 있었다. 아버지의 시간은 거꾸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젠 고집스러운 아이가 되어 엄마 주위만 맴돌았다. 그런 아버지를 함께 내려간 남편에게 부탁하고 나는 밭으로 갔다. 서둘러 따라가느라 반바지 차림으로 나섰더니 풀숲에 숨어있던 모기떼들이 호드득 반겼다. 도라지 한 움큼 자라는 옆살에 고들빼기가 자라고 있었다.
'이제 막 올라오는 것들도 있어서 호맹이로 뜩뜩 긁을 수도 없어야...'
엄마와 나는 엉거주춤 쭈그리고 앉았다. 늘어져 휘어지는 단감나무 아래서 손가락만큼도 자라지 못한 풀들을 손으로 뽑아냈다.
"엄마, 아버지 모시고 올라갈게요."
"미안하다..."
우리가 아버지에게 주문한 예쁘고 작은 소품은 넉넉하고 투박한 물건으로 완성되었다.(치매를 앓고 계시던 초기 작품, 골망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