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명 1

4

거시기, 거... 안 있는가?

거시기 갖고 오란 말이여! 거시기 말이여...

아버지, 거시기는 거시기도 몰라요!


아버지는 '거시기'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 아버지의 '거시기'는 직접 말하기 거북할 때 대신 쓰는 말이 아니었다. 뭔가 얼른 떠오르지 않을 때 하는 말이었다. 아버지의 '거시기'는 무논에 물꼬를 틀 때 챙기는 삽이 되었다. 개다리소반에 올라간 막걸리 안주, 노가리도 되었다. 때로는 동네 사람 누군가의 이름이 되기도 했다.

'거시기'는 '거시기'를 말하는 이의 마음속을 한 번 들어갔다 훑고 나와야만 알 수 있는 말이다. 어느 정도 친밀감이 없고서는 '거시기'의 속내를 알아차리기 힘들다. 그때 우리는 아버지의 '거시기'가 무엇을 말하는지 누구를 지칭하는지 잘도 알았다. 그리고 그저 아버지의 '거시기'사랑은 못 말린다며 다 큰 우리들은 명절이면 마주하는 재미난 이야깃거리로만 여겼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어쩌면 그때부터 아버지의 치매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우리는 말했다. 아버지가 아프시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거시기'라는 말은 들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모음과 자음이 따로 놀며 입안에서 뱅뱅 돌 때면 내뱉던 가장 정확한 단어, '거시기'마저도 놓아버렸다. 우리도 당신의 마음속을 더는 들락거릴 수 없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병원 입구에는 버스나 승용차에서 내려 잰걸음으로 들어서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창 건너 멀리 화단에 서 있는 벚나무에 시선이 멈췄다. 바람이 부는지 젖은 이파리가 흔들렸다. 봄날 분홍을 설핏 바른 하얀 꽃잎으로 눈멀게 하던 벚꽃은 여름날 푸르름을 지나 가을 물이 들어있었다.

“봐라, 저. 저. 저. 저....... 곧 터지겠다!”

창밖에 있던 시선을 거두어 마주 보고 앉은 아버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는 창가에 있는 라디에이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뭔가 큰일이 날 것이라는 눈빛과는 다르게 너무도 무심한 목소리였다. 뭐가 터진다는 것인지 묻는 대신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아버지의 입가를 닦아드렸다.

말없이 아버지의 손을 잡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원무과에 서류를 떼러 간 동생은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해 여름, 엄마 손을 놓은 아버지를 우리 집으로 모시고 올라왔다. 지난 보름동안 엄마를 향해 독기를 품고 있던 아버지의 눈은 간 곳 없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맥 없는 얼굴로 침대에 누워있거나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계셨다. 아니 보고 계신 것이 아니라 눈을 두고 계셨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가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지만 아버지가 내용을 알고 그러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올라오신 첫날은 잠자리가 바뀌어 피곤하셨던지 아침 여덟 시가 다 되도록 누워 계셨다. 다음 날은 일찍 일어나신 듯했다. 일어나자마자 아버지 방으로 들어갔다. 바람 한 점 들어가지 않게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린 채 아버지는 눈을 뜨고 있었다. 혹시나 하고 이불을 열어보니 허리 아래쪽으로 젖어 있었다. 부스스하던 정신이 확 들었다. 침대 매트리스 덮개, 깔이불, 덮는 이불까지 벗기고 아버지 목욕을 시키는 것으로 아침을 열었다.

그때부터 말씨름이 시작되었다.

“아버지, 소변보세요!”

“봤다니까. 봤어!”

“아니잖아요. 화장실 들어와서 아무것도 안 하시고 그냥 계시잖아요.”

막힘없이 흐르던 일상에 돌이 하나 박혀 흐름을 비틀고 있다는 생각에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봤어. 봤당께...”

아버지는 내 얼굴을 보며 ‘왜 이렇게 내 맘을 몰라주냐’는 듯한 얼굴로 사정을 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어김없이 ‘소변을 보시라고, 봤다고’라며 말싸움을 하는 모녀를 보더니 남편과 딸이 할아버지, 아버님 소변 안 보셨다고 거들어주었다.

딸아이에게 할아버지 식사 좀 옆에서 지켜봐 달라는 내 목소리는 거칠었다. 아이들 아침 식사용으로 달걀 토스트에 블루베리 주스를 갈며 급성신부전으로 입원하셨을 때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투석도중 옆에 앉아있던 내게 아버지는 살며시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처음 당하는 일에 아무것 모르는 나는 간호사에게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간호사는 기저귀를 드릴 테니 누워서 보시라고 했다. 아버지는 도저히 기저귀도 누워서도 볼 수 없다고 버텼다. 결국 투석기에 달린 모든 줄들을 빼고 화장실을 다녀온 후 다시 투석을 했었다.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병세는 속도를 내고 있었다.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걸... 당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좀 더 이해했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다.


우리 집에서 며칠 계시던 아버지는 동생집으로 옮겨 가셨다. 동생은 내가 살고 있는 곳으로 이사를 왔다. 한참 아버지의 투석과 치매발병, 병원입원으로 온 가족이 번갈아가며 병간호에 매달리고 있을 때였다. 우리는 오남매였지만 나를 제외한 4남매가 서울과 경기도에 살고 있었다. 모두가 생계를 버리고 아버지에게 매달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마침 시골집에서 제일 가까운 곳이 내가 살고 있는 곳이었고, 막내아들인 동생은 아직 미혼이었다. 막내딸, 막내아들인 우리는 혼자서 아버지를 돌보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난 후 현명한 판단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어른 한 사람을 간호하기 위해서는 가까운 곳에 빨리 달려와줄 또 한 사람의 핏줄로 얽힌 돌보미가 있어야 했다. 우리는 이후로도 몇 년 동안 서로 옆에 있다는 것을 고마워했다.


학원을 운영하던 동생은 늦은 오후부터 열 시까지 집을 비웠기 때문에 그때까지 나는 식사 준비를 하거나 아버지를 지켜보는 것이 다였다. 하지만 나는 슬슬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초등학생이던 세 아이의 엄마 노릇도 해야 했다. 그리고 비록 시어머니가 가끔 시골집에 다니러 가시기는 하지만 함께 사는 며느리이기도 했다. 동생도 힘들어하고 있었다. 모시고 올라오면서 요양원을 염두에 두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우리는 서로 모르는 척 조금씩 미루고 있었다.


내가 미적거리는 것은 모두 아버지 때문이었다.

너 덕분에 내가 살았다-

며 오진 웃음을 지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내 운전 실력은 아버지 덕분이었다. 아버지 병원 입원 직전에 딴 면허증으로 바로 고속도로를 탔다. 신장투석과 동시에 입원한 날도 종합병원 검진을 받을 목적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올라오는 길이었다. 다니던 종합병원에 소견서를 끊으러 갔다가 당장 투석하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의사의 말에 덜컥 입원을 했었다.

그때 아버지는 '너 덕분에 내가 살았다'라고 오진 웃음을 지어 보였다.


동생과 남편은 요양원을 알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방문했던 세 곳 중 단 한 곳만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아버지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피하고 싶었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지만, 아무도 내게 뭐라 하지 않았지만 요양원에 보내는 것은 내가 아니라고, 나는 눈 가리고 아웅했었다.


2014년 가을, 병원 앞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을비는 풀썩거리던 내 안에 쌓인 검불의 목덜미에 손가락을 살며시 집어넣은 채 살살살 쓰다듬었다. 어디로 날아가야 하는지 방향을 잡지 못해 횡설수설하던 검불은 어깨를 늘어뜨린 채 땅에 주저앉아 버렸다. 깊숙한 장롱 밑에 머리카락과 한 몸이 되어 버린 덩어리도 방문을 열고 나와 그 빗속에 몸을 내맡겼다. 그리고 이내 빗속으로, 물속으로 사라져 버렸으면 했다.


그때 아버지는 동국사를 뒤로 한 채 꼿꼿하게 서있던 지난 겨울의 모습과 변함이 없었다. 나는 맞은편에 앉은 아버지를 찍었다. 아버지는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라디에이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원무과에서 ‘시설입소용 건강진단서’를 발급받은 동생이 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다음글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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