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파와 호박을 써는 또각또각 도마질 소리와 함께 시작된 요란한 아침이었다. 된장국 냄새가 날리는 집안에서 이 방 저 방 잰걸음으로 녀석들은 행진을 했다. 그리고 이내 현관문이 닫히는 꽝하는 소리와 함께 갑작스러운 고요를 남기고 사라졌다.
안방으로 들어가 보니 벗은 옷가지들이며 구겨진 수건이 바닥에 활개를 치고 있다. 아침마다 머리를 감고 곱슬머리를 펴느라 아직도 콘센트에 꼽혀있는 드라이기와 고데기. 뚜껑 열린 화장품. 여기저기 널브러진 머리카락들. 아침의 절반 이상을 거울 앞에서 씨름하던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어쩌면 나는 세 아이의 무대복과 분장도구를 치우고 있는 청소부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씽긋 웃었다.
‘내 마음의 처방’
화장대 위에 널린 머리카락을 테이프로 쩍쩍 붙여내다가 살짝 열린 서랍 틈새로 보이는 글씨. 약국에서 받는 약 봉투와 흡사했다. 대신 ‘약’이라는 커다란 녹색 글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 ‘캡슐 편지’, ‘000 귀하’ 자리에 내 이름이 쓰여 있다. 친절하게도 맨 위 오른쪽에는 따박따박한 손 글씨로 ‘언제 발견할지 모르겠지만..... 그냥 읽으세요.’라고 적혀있다. 처방인에는 딸의 이름이 적혀있다. 처방일자를 보니 벌써 보름이 지났다.
손에 쥐었던 옷가지와 수건을 내려놓고 바닥에 앉아 봉투를 열어보았다. 노란 종이에 같은 손 글씨가 이렇게 속삭였다.
“엄마, 이약들 먹고 힘내세요. 우리들 세 명 감당하느라 힘드시죠? 저 항상 엄마 옆에 있으니까 제가 작더라도 저에게 기대세요. 항상 준비되어 있으니까. 지금 방에 있는데 밖에서 엄마 목소리가 들리네요. 부드럽고 자상한 목소리. 제 곁에서 항상 있어주셔야 돼요. 엄마가 뭐라고 안 해도 공부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성공한 모습 보여드릴 테니까...♡”
약봉투 안에는 1회분씩 포장된 투명한 약봉지가 다섯 개, 주황색과 흰색이 포개어진 캡슐이 한 알씩 들어있다. 그중 한 봉지를 찢고 캡슐을 열어보니 돌돌 말린 종이에는 ‘이 약 먹고 힘내세요. 사랑해요.’라고 꾹꾹 눌러 박혀있다.
‘세탁기를 돌리고 청소기를 밀고 볕이 좋을 듯하니 아이들 침대 커버를 빨까?’하고 빙빙 돌던 생각들이 갑자기 느슨해지더니 이내 멈췄다. 찻물을 올리고 거실 창가에 앉아 녹차 한 잔을 마셨다. 이 녹녹함을 코로 마시고, 천천히 입안으로서 굴렸다, 그리고 새싹 빛의 찻물을 눈에 담았다.
딸아이가 준 선물이었다. 그리고 뜬금없이 비릿한 어린 날에 산딸기가 생각났다.
그곳은 순천 아짐 집이었다. 가세를 짐작할 수 있을 만큼 큼지막한 기와집 안채가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다. 바람 부는 날이면 사라락 사라락 소리를 내는 대나무 숲이 지붕 너머 넘실대고 그 뒤로는 뒷동산으로 시작되는 산이 버티고 있었다.
"머시매들은 청소도 안함서 왜 저렇게 어질고만 댕긴다냐?"
"긍께로 말이다. 금서 선생님 말은 왜 그렇게 안 듣나 몰라야."
"야, 어제 걔들이 만들어온 대뿌리 봤냐? 삔질삔질 말은 겁나게 안 들음서 뭣 땜시 매는 만들어 온가 몰라."
"그것 때문에 어제 순천 아짐이 막 야단쳤어야. 뒤에 대나무밭을 온통 들쑤셔 논 것들이 누구냐고... 순천 아짐 시끄럽다고 헐지 모릉께 얼른 교실로 들어가자."
돌쩌귀가 있는 대문을 삐그덕 열고 들어서면 기와집 오른쪽으로 장독대와 나란히 작두샘이 있었다. 서너 명의 소녀들이 조잘거렸다. 그곳은 소녀들의 빨래터였다. 나름 컸다고 자부하는 열세 살 소녀들은 둘씩 마주 서서 걸레의 양끝을 잡고 뽈깡쥐어 돌려 짜고 있었다. 대문과 연결된 아랫채에 위치한 그녀들의 교실을 닦기 위함이었다.
"야, 그런데 산딸기 주스는 어따 뒀냐? 간은 봤냐?"
"응, 겁나 달아부러야."
"그냥 숟가락으로 으깬께 맛이 별로드만 사카린 쪼금 넣었더니 그럴싸하당께."
"혹시 언니들이랑 아니먼 머시매들이 먹어분디 어디 안보인디다 두자."
노란 주전자 숨길 곳을 찾아 나섰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십리길. 물통거리를 지나 외남천과 만나는 신작로 양옆으로 산딸기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소녀들은 비탈진 그곳에서 오이씨처럼 여린 팔뚝을 긁혀가며 빨갛게 익은 산딸기를 땄다. 믹서기도 없던 그 시절, 수저 뒤꿈치로 산딸기 알갱이를 으깨고 마지막으로 사카린을 몇 알 넣었다. 동에 점방에서 팔던 오란씨 색깔보다 더 예뻤다.
"야, 선생님 오시나 봐! 저기 불빛 보이지?"
"응. 보인다 보여! 얼른 들어가자. 글고 산딸기 주스 챙겨."
어둑해질 무렵 멀리 불빛이 앞산을 넘고 있었다. 선생님의 오토바이보다 먼저.
소녀들은 오후 내내 마련한 산딸기 물을 선생님에게 수줍게 내밀었다. 하지만 선생님이 그 물을 맛있게 드셨는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 단지 우리가 노란 주전자에 찰랑찰랑 빨간 산딸기 물을 담았던 기억밖에.
대부분 청소는 소녀들이 도맡아 했지만 선생님은 중학생 언니들과 더 친했다. 스물 갓 넘은 검은 테 안경의 멋있는 선생님은 중학생 언니들과 수업이 끝난 후에도 농담도 하고 장난도 더러 치는 모습도 보였다. 소녀들은 그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샘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멀리 논에서 개구리울음소리 시원하게 들리던 초 여름밤이었다. 선생님은 수업 끝나고 데이트를 하자고 했다. 소녀에게. '데이트'라는 말이 귓속을 간지럽힐 때부터 태어나 처음으로 가슴이 콩닥거렸다.
"다음 달부터 수업료 안내도 돼. 그리고 열심히 해"
그 말을 듣는 순간 소녀는 수줍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딱 한마디였다. 그리고 뛰었다. 집으로 가는 지름길은 한 사람만 걸을 수 있는 좁다란 밭둑길이었는데 거침없이 뛰었다. 집 앞에 이르러서야 숨을 몰아쉬며 멈췄다. 중학생 언니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선생님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한 소녀가 자라고 있었다
캡슐은 이제 세알 남아서 매일 들고 다니는 가방 안쪽에 자리를 틀고 있다. 오도독오도독 사탕을 깨먹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입안에서 굴려먹기 위해. 딸은 그 약봉투를 내게 주고선 어떻게 했는지 물어보지 않는다. 소녀가 선생님에게 산딸기 물을 드리고 난 후 그 노란 주전자를 어떻게 했는지 잊어버렸듯이.
삼십 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후 선생님에게 드렸던 선물은 이제 내게 다시 돌아왔다. 가끔씩 꺼내보며 씽긋 웃을 수 있는 추억이라는 선물로.
이제 산딸기 주스를 건네던 열세 살 소녀는 오십을 넘겼고 , 캡슐편지를 써주던 딸아이는 스물이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