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아야, 그건 게베가 아니고 봉창이다!

“그거 게베에 넣어.”

“...”

“원카드 게베에 넣으라고!”

“...”

“여기다 넣으라고!”

“형아야, 그건 게베가 아니고 봉창이다!”

“봉창이 뭐냐? 그건 게베거든!”

작은 녀석의 눈이 째졌다. 큰 녀석은 콧김을 내뿜었다.


애들아, 손잡고 걷자!

이 한마디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내 왼손은 업고 있는 딸아이 엉덩이를 받치고 있었다. 오른손은 작은 녀석의 손을 잡았다. 작은 녀석은 왼손은 내게 주고, 오른손으로 원카드를 쥐고 있었다. 녀석이 끔찍이 아끼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작은 녀석의 손을 큰 녀석이 잡으려고 하니 꼭 쥐고 있는 그 원카드가 말썽이었다.

큰 녀석은 동생손에 쥐어진 원카드를 바지 주머니에 넣으라고 했으나, 작은 녀석은 형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큰아이에게는 '게베'였고, 작은아이에게는 '봉창'이었던 그것은 바로 주머니였다. 게베와 봉창은 모두 호주머니의 또 다른 말, 사투리였다.

그렇게 '게배와 봉창'으로 투닥거리던 일은 우리 가족이 한 지붕 아래 모여산 지 얼마 안 됐을 때 일이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지역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주말부부였다. 아이들은 제각각, 큰 아들은 전남 산골에 계시는 친정 엄마, 작은 아들은 전북 바닷가에 계시는 시어머니 손에 맡겨졌다. 그런데 셋째가 생기면서 나는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임신 5개월 무렵 처음으로 남편과 각각 세 살, 두 살이던 아들들과 한집살이를 하게 되었다.

주말부부로 때론 격주로 만나며 서로 자유롭게 살아오던 우리 부부도 함께 사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런데 외할머니와 할머니의 세상에 둘도 없는 손주로 귀하게 살아왔던 두 아들 때문에 우리 부부의 어려움은 묻혀버렸다. 아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함께 살게 된 지 육 개월 만에 세상에 나온 딸과 더불어 세 아이의 엄마 노릇을 해야 하는 나는 대혼란을 겪어야만 했다.

좋은 엄마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현명한 아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혜롭게 살아보자 굳건히 다짐했다. 지혜로운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다짐한 그 결의는 보란 듯이 쉽게 무너졌다.

어느 날이었던가? 나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악을 쓰고 있었다. 왜 그랬는지 기억나지 않는 것을 보면 큰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사소한 일상이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만이 앓던 고통은 아니었다.


얼마 전 옷장정리를 하다가 서랍 깊숙이 들어있는 사진첩을 보았다. 아직 푸릇푸릇한 내 얼굴을 발견하고 아예 철퍼덕 앉아 옷정리는 뒷전으로 둔 채 한참을 들여보았다. 사진을 넘기다 보니 한 아이와 엄마가 눈에 띄었다. 사진 속의 엄마는 세 살쯤 돼 보이는 큰 녀석을 길게 안고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저 멀리 작은 녀석은 벽에 등을 기댄 채 혼자 앉아 있었다. 큰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는 작은 아이가 안중에도 없는 듯했고, 작은 아이도 엄마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벽에 기대어 무표정했다. 그 엄마는 바로 나였다. 딸아이가 태어나기 전, 작은 녀석이 이제 막 돌이 지난 때쯤인 것 같았다.


큰 녀석은 내 직장과 가까운 친정에서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자주 보는 편이었다. 하지만 작은 녀석은 한 달에 한번 보거나 아니면 몇 달 만에 보는 적도 있었다. 게다가 모유 맛을 알면 시어머니가 키우기 힘들다고 해서 작은 녀석에게 젖 한번 물려보지 못했다.

작은 녀석은 네댓 살까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세 살 때까지 고모하고 할머니가 키웠어.”

한 번씩 만날 때면 ‘저 녀석이 내 아들 맞을까’하는 생각이 들 만큼 서운했다. 녀석은 형을 어쩌다 얼굴 보는 친구 정도로 생각을 했을 뿐만 아니라 나를 엄마로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유치하게 힘줘가며 내가 낳았음을 강조하고, 때로는 그 녀석의 환심을 사기 위해 먹을 더 챙겨주고 책도 더 많이 읽어주려 노력했다. 그러나 쉽게 내 아들이 되진 않았다.

하지만 딸은 고스란히 나와 함께 했다. 내게 첫아이와 같았다. 돌이 될 때까지 나는 늘 그 녀석을 바라보는 해바라기였다. 나는 쌕쌕 잠든 아이의 콧잔등에서 달큼한 젖 냄새를 맡고, 아이는 자신의 얼굴을 그윽이 바라보고 있는 내 머리 그늘아래 낙낙하게 잠들곤 했다.

딸아이 돌이 지날 때까지 큰아이 엄마는 외할머니였다. 작은 아이는 할머니가 엄마였다. 딸아이 엄마만 나였다.

딸아이 돌이 지나고 이제 세 아이가 모두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자 우리는 집을 벗어나 넓은 마당으로 나가 서로 부대꼈다. ' 게베와 봉창'사건이 있던 날도 우리는 그곳으로 가는 중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던 연립에서 초등학교 운동장까지 가려면 양쪽으로 늘어선 주택가를 5백여 미터 반듯이 걸어가야 했다. 그곳에 는 등나무 그늘이 앞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는 병설유치원이 있었다. 그리고 병설유치원 건물을 지나면 바로 뒤쪽에 마로니에 나무가 빙 둘러있는 학교 운동장이 있었다. 그 곳이 바로 우리를 보통 가족의 테두리 안으로 이끌어준 마당이었다.

오전이면 유치원 마당에 있는 모래놀이터에서 놀았다. 오후에는 학교 운동장을 둘러싸고 있는 마로니에 나무 옆에 있는 철봉에서 매달리고, 그네를 타고 놀았다. 매일 오고 가는 우리들도, 매번 주택가 평상에 앉아있는 동네 할머니들도 번뜩이는 새로움은 없었지만 일상이 주는 나른함과 낙낙함이 일렁이는 곳이었다.

세월이 흐르니 녀석의 환심을 사서 꼭 엄마로 인정받아야지 하는 생각은 옛일이 되었다. 어떻게 그리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학교 운동장을 오고 가는 그 길 덕분이었다. 겨울날 엿기름을 삭히고, 조청을 고아 식히며, 쭈욱 늘여 만들던 엿가락처럼 그 길은 밉거나 곱거나 함께한 시간을 고아 삭히고 식혀 이에도 달라붙지 않는 달착지근한 엿가락을 만들어 놓았다.

그곳은 셋째인 딸이 초등학교 일 학년을 마칠 때까지 다섯 명의 가족이 끈끈하게 엮일 수 있도록 해준 길이었다. 유치원 옆 토끼풀 더미 속에서 네 잎 클로버를 찾고, 시계꽃을 꺾어 반지와 목걸이를 만들고, 구름사다리를 함께 오르며, 서로에게 멀뚱멀뚱하던 두 아들은 어느새 함께 공을 차고 있었고, 딸은 그 옆에서 줄넘기를 하자고 보챘다 . 그곳은 아름다운 길이라는 소개로 잡지에 실리기도 하는 주택가 속 기찻길도 바로 옆에 두고 있었다.

벚꽃축제장, 길거리 화가 손에 그려진 아이들


서로 쭈뼛쭈뼛 섞이기 힘들어하던 ‘게베와 봉창’이 동거한 지 어느덧 이십여 년이 넘었다. 이제는 모두 ‘게베’라고 ‘봉창’이라고도 하지 않고 딱히 ‘호주머니’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냥 ‘거기’라고 말하면 이해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자신들이 '게베와 봉창'으로 말씨름을 했다는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따로 지내 온 기억과 경험이 가져왔던 움퍽움퍽한 고랑은 어느새 함께 한 시간 속에서 쇠스랑으로 고르게 일구어 놓은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서해 바다 위 노을을 본다. 늦은 가을 홍시처럼 말갛게 익어가는 주홍빛 노을은 깊고 낙낙한 밤을 준비하는 바다를 달군다. 그리고 이내 달구어 놓은 바다와 한 몸이 된다.

우리도 제각각 색을 가졌지만 잘 어우러져간다.

빨강, 노랑, 주황, 녹색, 검정 파스텔을 손가락으로 펴 바른 듯한 저녁노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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