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낮, 상추를 뽑았다.
콕콕 쪼아대는 햇살에 내 등은 시들거렸고, 만지면 뽀독뽀독 소리가 날만큼 싱그럽던 상추도 진이 빠진듯했다. 하지만 해가 지면 달려드는 이른 모기떼를 만나는 것보다는 나은 일이었다.
뽑은 상추를 안고 밤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밭둑에 앉았다. 뿌리와 누런 잎을 정리해서 가져갈 생각으로 다듬으려다 그만, 이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넌 누구?'
'저... 상추예요!'
'어쭈! 요것 봐라...'
상추잎새에 빼꼼 낯바닥을 내민 녀석, 바로 줄행랑을 칠 줄 알았더니 그럴 생각이 없나 보다. 하 웃겨서 핸드폰을 뒤적뒤적 사진을 찍는데도 꿈쩍 않는다.
'어라! 갈 생각이 없네?'
'저... 아마 상추일걸요?'
'너-언 청개구리거든! 눈만 감았더라도 몰라볼 뻔, 상추인 줄 알았을 뻔!'
워낙 쪼꼬만한 녀석을 찍느라 엄지와 검지손가락을 벌려 당겨보았다.
'아, 이러지 마세요! 저도 초상권이 있거든요!'
그제야 슬그머니 제 상추잎에서 풀쩍 뛰어나온다. 뒷모습을 보이며 제갈길 가는 녀석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너 상추 아냐! "
야행성인 녀석의 낮잠을 눈치 없이 깨운 걸까? 밤새 객-깩객-깩 징징대는 수캐구리 구애가 피곤했던 녀석, 한낮 상추인 듯 청개구리인듯한 휴식을 난데없는 여자사람이 깨뜨렸을까? 맘 상했을까?
"상추라고 우기지 않아도 돼. 난 널 해칠 생각이 없어. "
사진이 너무 맘에 들었다. 내 눈에 스포이트 또옥, 초록잉크 한 방울 내려앉아 번졌다. 좋았다. 똑바로 응시하는 청개구리의 검은 눈이. 며칠을 부둥켜안고 요리조리 뜯어봐가며 사랑땜을 하다가 생각이 났다.
이틀째 폭설이 내리는 날이었다. 내리는 눈은 더 이상 발 디딜 곳이 없어서인지 공중으로 솟아오르듯 떠다니고 있었다. 거실에 앉아 아파트 앞으로 지나가는 4차선 도로를 내려다보았다. 살얼음 위에 쌓인 눈 때문에 차량들은 설설 기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앞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흰 눈 때문인지 앞산은 내게 성큼 한발 내디뎌 다가왔다. 흰 그림자 진 수묵화 한 점이 내게 걸어왔다. 참 희한하다. 흰 눈이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릴 듯이 감싸 안고 있지만 눈더께 아래 뭐가 있는지 다 보인다. 나무가, 덤불이, 바위가 제각각의 키만큼 눈을 덮고 있다. 나뭇가지에 앉은 눈더께는 소나무인지 개나리인지 벚나무인지 고사리밭인지 그 본 모양을 좀 더 동그맣게 다듬어주고 있었다. 온통 하얗게 옷을 입혀도 그 안에 들어앉아있는 게 뭔지 눈에 익어왔던 이에게는 다 보인다.
그때, 움직였다! 비탈진 덤불사이 흰 눈밭에 갈색의 겅중거림이 읽혔다. 고라니였다. 언젠가 신호대기 중 창밖너머로 바로 이 앞산에서 고라니를 본 적이 있기에 이렇게 가까이 고라니가 살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손가락을 늘려 줌으로 사진을 찍으려고 준비하는 사이 잃어버렸다. 놓쳐버렸다.
눈 위로 드러난 호리호리한 갈색 몸뚱이를 다행히도 흰 눈 그림자 부근 어디에 잘 접어 넣었나 보다. 어떤 모습으로 숨었나 숨바꼭질을 하듯 구석구석 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더 볼 수 없음이 아쉬웠지만 다행히도 고라니는 자신을 잘 숨겼다.
보호받기 위해 청개구리가 상추잎 속에 보금자리를 틀었듯이, 고라니가 흰 눈으로 드러난 자신을 산비탈 눈밭 덤불 속으로 숨어들었듯이, 나는 때로 보호받고 싶다. 그래서 보호색을 입는다. 주변에 동화되어 형체가 불분명해지고 공기가 되고 볕이 되고 비가 된다. 그렇게 멍을 때린다. 숨는 것은, 은둔은, 보호받고 싶다는 것이다. 마음을 숨기는 것은 보호받고 싶다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마음의 목소리로 '그럴 수도 있지...' 해본다.
개구리는 자신의 모습을 자연환경과 비슷한 색상으로 위장함으로써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 반대로 먹이사슬의 최상위층인 호랑이는 먹잇감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황갈색과 검은색 줄무늬의 보호색을 입는다. 포식자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피식자에게 들키지 않고 사냥하기 위해 나름의 이유로 보호색을 입는다. 또는 무당벌레처럼 경계색을 입고 주변환경보다 튀는 붉은 바탕에 검은 도트 무늬와 악취를 풍기는 노란색 액체를 이용해서 천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동물들은 생존을 위해 긴 세월에 걸쳐 "먹느냐 먹히느냐' 생존경쟁과 자연의 선택 속에서 비장하게 진화해 왔다.
인간도 자연의 법칙에서 예외는 아닌 듯하다. 오랜 세월 자연환경에 적응해 온 동물들처럼 보호색으로 위장과 은둔을, 경계색으로 날 선 과장을 통해 인간은 사회라는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게 아닐까?
상추로 위장한 청개구리를 발견하고, 흰 눈 속에 숨은 고라니를 잠깐 찾아낼 수 있듯 세상의 모든 색은 완전한 보호색도 경계색도 되지 못한다. 여전히 인간이 가진 보호색도 경계색도 그 자체로 완전할 수 없다. 그 구분이 모호하다. 단지 보호색과 경계색 사이를 뒤치락 엎치락해 가며 취하는 것은 아닐까? 순수하게 보호색만을 취하면 안온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어렵고, 온전한 경계색을 입으면 자신의 매력을 발산하지만 때론 사회로부터 소외당한 채 공격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보호색을 껴 입어도 청개구리는 상추가 아닌 청개구리이고, 화려한 경계색을 입어도 무당벌레는 무당벌레다. 그 자체의 고유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때로는 나는 멍을 때리며 초록이 되고, 비가 되고, 눈이 되어 사라진다 해도 인기척이 들리면 다시 내가 된다. 그리고 내 색을 발한다. 때로는 빨강이고 때로는 노랑이고 어떤 때는 검정이나 회색빛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도 나다.
내가 너를 닮아간다는 것은 네가 나를 보호하고 있다는 것.
내가 너의 그늘 아래 보호받고 있다는 것.
사랑을 할 땐 서로가 닮아간다. 그대가 말을 할 때면 한눈은 찡긋해 보였다면 어느새 내 눈도 잠깐 찡긋거리고, 네가 웃고 있다면 내 입가에도 웃음이 와닿았겠지.
아이 때가 그랬다. 어른들 그늘 아래에서 보호색을 입고 안온하고 편안하고 느긋함 속에서 살았다(물론 어른이 된 지금의 내 눈으로 말이다. 아이도 나름의 고민과 잠들지 않는 날도 있기 마련이니까). 나는 주변환경을 닮아갔다. 서서히 주변에 스며드는 평온한 삶이 이어졌다. 그런데 어느 날, 바람 한 점 없는 날, 삶이 무료해져 파도가 이는 바다로 가고 싶은 날이 있다. 물빛과 같은 고등어가 되어 파닥거리고 싶은 날도 있다. 이때 나를 품고 있는 어른들에게는 얼마나 기나긴 침착함과 담대함의 시간이 지나갔을까?
내가 너를 떠나는 것은 내가 너를 떠나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다는 것,
나 하나로 충분히 경계를 줄 수 있다는 것.
그러던 어느 날,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이 지겨워지고, 비슷함이 주는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틀을 깨고 색을 덧입히는 작업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독(매력?)이 되어버린 경계색을 갖게 되었다.
자기 부정과 동시에 난 빨간 등에 검은 점을 가진 무당벌레가 되었고, 나를 해치는 손길에 날이 선 고약한 노란 냄새를 피웠다. 익숙하지 않음이, 생경스러움이 좋아지는 시기였다.
초록과 검은 반점이 어우러져 주변에 드러나 보이지 않던 어린 날을 버리고, 붉은 바탕에 검은 무늬가 선명한 배를 드러내 독이 있음을 과시하는 무당개구리가 되었다. 그렇게 아이는 어른이 되었다. 청개구리가 상추가 아님을 알게 된 어떤 날, 부정당했으므로 다른 푸른 길을 찾아 떠났던 것처럼.
아차, 잊을뻔했다.
고마리 풀숲으로 풀쩍 뛰어들기 전, 청개구리가 말했다
'알아! 나도...
내가 청개구리인 걸.
난 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