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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더분한 버마재비
Jul 15. 2023
습하다. 습하다 못해 온몸에 달라붙은 물기가 끈적거린다. 에어컨이라도 켜면 이 눅눅함을 뽀송 털어버릴 수 있으련만 이제 겨우 초복을 지났는데 에어컨을 켠다는 것이 아까워서, 그리고 밖으로 나가면 다시 그 습한 공기가 내 몸을 덮쳐 올게 뻔한데 굳이 그럴 거 뭐 있나 하는 생각에 선풍기로 물에 젖은 공기를 말려보는 중이었다.
장자도에 갈 일이 생겼다고 했다. 나는 가방을 챙겼다.
'왜 그래?' 하는 표정으로 남편은 나를 바라보았다.
뭘 알면서...
그럴 줄 알고 말 안 하려 했더니만...
왜 누구, 다른 사람과 가려고?
응, 예쁜 사람.
응, 예쁜 사람 여기 있네!
남편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많이 뻔뻔해져 간다. 그럴 필요가 있다. 스스로 예쁘다고 해야 상대도 어? 그런가? 하고 가끔 고개를 끄덕여 준다고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봐도 나는 아주 가끔 예쁠 때가 있다. 이것은 주관적인 내가 객관적인 내게 거는 주문이다. 어릴 적에는 누가 예쁘다고 했느냐고 물어오면 울 엄마가 예쁘다고 했다며 대들어보았다면, 이제는 뻔뻔스레 내가 예쁘다고 했다며 배짱을 튕겨본다. 잘하고 있어, 스스로 토닥거려 본다.
마음만 먹으면 볼 수 있는 바다와 산이 기다리고 있는데 가끔 만나주지 않는다면 그건 몰염치한 사람 아닐까?
차에 오르며 끝까지 한마디 했다.
시내 몇 군데 들러 볼일을 보고, 장자도까지 갔다가 새만금도로를 빠져나오니 점심때가 다되었다. 우리는 출발하며 장자도 도착예정시각이 11시 15분인 것을 확인하고, 이미 점심을 결정했다. 비응항에 있는 해물짬뽕으로. 결국 바다구경은 핑계였고, 속내는 뜨끈한 해물짬뽕을 만나러 가는 꼴이었다.
비응항은 시내에서 적어도 3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짬뽕 한 그릇을 먹기 위해 이곳까지 달려온다는 것은 무리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가끔 이 주변에 볼일이 있을 경우에만 들러 해물짬뽕을 먹는다. 그런데 해물짬뽕집은 우리가 올 때마다 꽉 차있다. 지금까지 지켜본 바에 의하면 절반을 넘기는 손님들이 근처 국가산업단지와 비응항 근처 작업장에서 일하던 사람들 같았다. 음식을 기다리는 시간이면 하릴없이 식당 안에 앉아있는 손님들을 둘러보는 버릇이 있는데, 대여섯 명씩 무리 지어 앉아있는 사람들의 윗옷 왼쪽 가슴에 새겨진 회사명과 작업복 차림을 보아 어림잡아본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자리는 바닷가에 바람을 쐬러 나온 가족들이나 관광객들이 채운다. 물론 손님들의 겉모습만으로 지레짐작할 뿐이다.
짬뽕가게에 도착하니 11시 40분, 가게 앞을 서성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웨이팅을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차에서 내리자마자 손등으로 빗방울을 가리고 뛰어 들어갔다. 다행히 앉을자리가 있었다. 12시가 되려면 아직 20분이나 남았건만 꽤 넓은 홀 안 여기저기에 작업복 차림의 사람들이 많았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바닷바람을 쏘이러 나온 가족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섞여있었는데 이번에는 대부분이 주변 산업단지에서 점심을 먹으로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 같았다. 우리처럼 12시가 넘으면 대기줄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미리 온 사람들일 것이다. 게다가 아침부터 줄기차게 내리는 비가 불러올 손님들이 오늘은 더 많을 것이라는 것을 계산했을 수도 있다. 거칠게 내리는 비는 바닷가 관광객은 줄이고, 뜨끈하고 얼큰한 짬뽕국물이 생각나는 사람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인 듯했다.
우선 앉을자리가 있음에 만족해서 헤벌쭉 웃으며 앉으려다 저만치서 우리를 바라보는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시내 어느 식당에서나 흔하게 만나는 외국인 아르바이트생이었다. 얼른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만들어 보이며 '해물짬뽕 두 개요'라고 외쳤다. 그녀는 능수능란한 웃음과는 다른 수줍은 웃음을 띄우고 '해물짬뽕 2개요?'하고 손가락과 표정으로 물었다. 나도 똑같이 손가락을 두 개 펴 보이며 고개를 끄떡였다. 그런데 그녀는 아직 뭔가 더 알아야 할 것이 있다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나도 그녀의 눈길을 따라 식탁 모서리를 보았다. 테이블 넘버였다. 아직 이 식당에 익숙하지 않은 아르바이트생 같아 도와준답시고 나도 모르게 외쳤다.
"18"
그녀는 수줍게 웃으며 숫자를 확인하더니 카운터로 갔다. 아마도 주문을 입력하는 것 같았다.
'18번 해물짬뽕 2개'
뒤돌아서서 카운터로 가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서야 약간 걱정이 되었다. 하필 숫자가 그랬을까?
순수하게 숫자로 알아들었을까? 아니면 욕설로 알아들었을까?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보아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듯했다.
우리 앞에 해물짬뽕이 나왔을 즈음에는 12시가 넘었다. 출입구 쪽에 앉은 우리 옆으로 점심을 먹고자 똑같은 작업복차림의 사람들이 줄을 섰고, 이미 식사를 마친 사람들도 삼삼오오 짝을 지어 나갔다. 오전 내내 일하느라 지친 몸에 얼큰하고 뜨끈한 국물로 속풀이를 한 사람들은 이쑤시개를 물고 비가 오는 밖을 향해 가슴을 펴고 나갔다. 또 한 무리가 차에서 내려 비 사이를 뚫고 가슴을 접은 채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대조적이었다. 에어컨 냉기가 하얗게 지나가는 대기줄에 서있는 사람들은 시장기 가득한 얼굴로 서서 동동거리고 있었다.
주문한 해물짬뽕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옆테이블을 보니 자장면이 보였다. 중국음식 하면 자장면인데 날씨 탓인지 전혀 입맛이 동하지 않았다.
"비 오는 날에는 역시 해물짬뽕이야!"
마침 우리를 향해 해물짬뽕 두 그릇이 걸어오고 있었다. 빨갛게 입맛을 다시게 하는 해물짬뽕을 앞에 두고 먼저 면발을 한 젓가락 돌돌 말아 후후 불어 한입 넣었다. 그리고 오징어 한 젓가락 들어 올려 함께 오물오물, 약간 매콤한 국물을 한입 떠 넣었다.
오, 세상에나...
그렇게 몇 차례하고 나니 내 몸 안에 습기를 좀 빼낸 것인가? 몸 안에 들어있던 물이 이마에 맺혔다.
비 오는 날 왕복 100킬로미터를 달려 일을 하고, 그 보상으로 뜨끈하고 얼큰해서 속이 다 시원한 해물짬뽕을 먹었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해치웠다.
사는 게 뭐 별거겠어? 열심히 일하고, 맛있는 것 먹고 일어나 쓱 땀 한 번 닦아주는 거지...
마지막으로 찬 물 한잔 마시며 생각했다. 아직도 대기 중인 사람들이 서있었다. 이만하면 됐으니 꾸물거리지 않고 서둘러 일어섰다.
식당문을 열고 나오니 여지없이 바람 탄 빗줄기가 얼굴에 밴 훈기를 쏙 빼가려 한다. 다시 몸을 움츠리고 차 안으로 달려들어왔다. 오후가 시작되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내는 사람들이 점심 한 끼로 다시 일할 힘을 얻어가는 곳.
타국살이, 익숙지 않은 테이블 넘버를 다시 보아가며 적응 중인 그녀가 일하고 있는 곳,
그곳을 뒤로하고 나도 평범한 오후 일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