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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더분한 버마재비 Sep 21. 2023

어머니의 마지막 용돈

약빨리 쓰는 법

청소기를  돌리면서도  벙실거렸다.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 나왔다.

'새해 초입부터 이런 횡재라니... ㅎㅎㅎ'


 다섯 시쯤 퇴근을 서둘렀다. 되도록 혼자 있는 시간을 최대한 즐겨야 한다. 어머니가  둘째 시누이  집에 올라가신 지  이제 열흘이었다. 입대를  앞둔 작은  녀석도  친구  만나러  나가고,  집에는 아무도  없다. 이럴 때는 우선  집 안  공기를  신선하게  만들어야 한다. 맑은 공기 안에서  붓끝을 가볍게 들어 올려가며 이제 배우기 시작한 난을 치겠다는 계획으로 몸을 움직였다. 춥지만 창문을 열고 청소기를  돌리려다  어머니  방으로 갔다. 깔이불과  덮는 이불은  어머니가 올라가시기 바쁘게 빨아 들여놓았지만  빈자리로  있을 때  매트리스 커버를  빨아야  것  같아  지퍼를  벗기는데  꼬깃꼬깃한 배춧잎이  보였다. 매트리스 커버 안쪽에  만 원짜리  몇 장이 무심하게  들어앉아 있었다.

"오호, 돈이닷!"

몇 장의 지폐를 한쪽으로 치워놓고  침대바닥도 닦아볼 요량으로 끙 힘을 써 매트리스를  벽면에 세웠다. 만 원짜리 몇 장이 끝은 아니었다. 침대바닥에 하얀 비닐봉지로, 화장지로  돌돌 말아 꿍쳐진 것을  보는  순간,

"심봤다!"

당신이  잃어버렸다고, 누군가  가져갔다고  여겨진  주인 잃은  돈들은  그곳 당신의 등 뒤에 숨어있었다.


숨바꼭질할 때  손바닥으로  눈을  감싸고  전봇대에  이마를  댄 채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몇 번을  반복하다

"숨었냐? 찾는다!"

하고 뒤돌아서는  술래, 내 등뒤에서 바로 손을  뻗어  '만세!'하고  전봇대에  손바닥을  쳐내던  밉살스러운 언니처럼. 어쩌면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돈은 그렇게 거기 있었다.


그동안 사라진 물건들이, 아니 어쩌면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물건들이 가리키는 화살표 끝에는 모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어느 한구석 죽은 데가 없이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잘난 손주들과 착한 아들은 그럴 리가 없다. 소심한 어머니는 드러내놓고 따져오진 않으셨다. 하지만, 당신 말을 가장 잘 들어주는 손주를 통해 나를 향한 오해는 가끔 전달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찌그럭거리던  마음은  어디 가고 거저 얻은 공돈을  한 뭉치  주웠다는 것만으로 나는 자꾸 벙실거렸다. 231,500원에 행복했다. 사진을  찍어 '심봤다!'라고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반반 하자!"

"안되지잉~"

오랜만에 혀 짧은  문자를  보냈다. 간혹 나를 단순 복잡 미묘한 사람이라 생각하는데 그날은 나의 일부분인 단순이 출현한 날이었다.

  

열흘쯤  지난 후, 우리는  큰집으로 설을 쇠러 올라갔다. 어머니도 와 계셨다. 설날  아침, 세배하러 늘어선 아들, 며느리, 손주들에게  어머니는  흰 봉투에서  반듯하게 펴진 복돈을 꺼내  주셨다.

전날 밤, 어머니에게 드린 당신 등뒤의 돈이었다.

"어머니, 어머니가  잘  챙겨놓으신 거 어머니  방에서  제가  가져온 거예요!"

잘 들리시지 않는 귀 때문에 큰소리로 말하는 내게  어머니는  놀라지도  평소처럼  무슨 소리냐고  따지지도 않고  빙긋이  웃으시며  주머니에  넣으셨다. 치매는 간혹 연결이 되지 않는다. 설명이 되지 않는 감정선이 있다.


"엄마, 약빨리 써라! 안혀요?"

세배를 하고 일어서며 바로 어머니 코앞에 손을 내민 막내아들은 만 원짜리 한 장을 받고 말했다.

"할머니, 학교 다닐 때 역전시장에서 푸성귀 팔아온 날이면 주머니에서 용돈 꺼내주시면서 '약빨리 써라' 그러셨는데..."

이제 마흔이 넘은 장손도 말했다.

어머니 웃음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어  아들과 딸, 손주들은 일부러 세배를 하고 두 손을 내밀며 재롱을 떨었다. 어머니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시며  세배를 하기가 바쁘게  고막손을 내미는 증손주까지 몸을 옆으로 돌려가며 흰 봉투 속에서 복돈을 꺼내주셨다. 어머니는 우리들이 바라는 대로 세뱃돈으로 당신의 능력을 기꺼이 과시했고 결국 빈 봉투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즐거워하셨다.

'모시고 사는 자네 챙겨 갖소!'라고  둘째 시누이는 말했지만 이렇게 당신이 자손들에게 주는 용돈으로 쓰시라고 챙겨 오길 잘했다 싶었다. 당신 돈으로 내가 뿌듯했다.

어머니는 우리 가족이 당신을 두고 갈까 봐 옷보따리를 싸놓고 우리가 일어설 때마다 함께 들썩거렸다. 며칠 계시다 내려가라는 시누이들을 뿌리치고 아이들보다 먼저 차에 오르셨다.


그날은 생전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용돈이자 세뱃돈을 주신 날이 되었다. 그리고 2년 후 어머니는 당신의 조의금으로  또 한 번의 용돈을 주셨다. 어머니 모시고 사느라  고생했다고 받았고, 상 치르느라 고생했다고 세 며느리에게  주는 용돈을 또 받았다. 며느리들에게 용돈을 줄 때 또 받아도 되나? 하는 잠깐 망설임이 있었지만 받았다. 손자들과  증손자들도 할머니, 증조할머니가 주시는 마지막 용돈을 받았다. 상을 치르고 난 후  자손들에게 어머니가 주는 마지막 용돈에  웃고 헤어졌지만 진정 마지막이라는 것은 씁쓸하고 휑했다.


'약빨리 써라!'

얼마 후 큰형님네가 이사를 했다. 약빨리 쓸 기회가 왔다. 이사로 살림살이 준비할 것이 많아진 형님에게 어머니가  주신 마지막 용돈을  썼다. 그리고 내  주머니  두둑한 줄 어찌 알았는지 한우 사골 영업사원의  원플러스원 작전에  말려들어 가을 일에  힘들었을 시누이와  언니에게 우족을 사 보냈다.

어머니가  원하는  약빠르다는 것을  난  그렇게  해석하고  개운했다. 공짜로  얻은 용돈을 얼른  써버리고 나니 부담을  덜은 것 같아  마음이 가벼워졌다. 어머니  모시느라, 상치르느라  고생했다고 준 용돈이  부담스러워서  얼른  덜어내고 편해졌다. 아마도  가시는 길 어머니가 주신 용돈에 비해 그동안 어머니와 함께 한 날들이 부족해서 나에게 이롭게, 약고 재빠르게 행동한 모양이다.


**어머니가 자주 쓰시던 '약빨리 써라'라는 말에서 풍기는 어감으로 '약빨리'는  '아껴서'로 자연스럽게  뜻풀이를 해왔다. 내가 살던 고향에서는 듣지 못한 말로 처음  듣는 말이었고, 재미난 표현이었기에 찾아보았다.  가장 근접하게 찾아낸 것은 '약빠르다'는 형용사였다. '약빠르다'의 뜻을 찾아보니 '약고 재빠르다, 약아서 눈치나 행동 따위가 재빠르다'로 나온다. 아마도' 약다'라는 형용사가 '제게 이롭게 꾀를 부리는 수단이 좋다, 꾀가 많고 눈치가 빠르다, 영리하다'등의 뜻인 걸로 보아 자기 잇속 챙겨가며 쓰라는 말에서 아껴 쓰라는 말까지 펼쳐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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